둠 속이다. 패닉은 조금씩 가라앉아 가고 있지만 실물경제의 침체라는 긴 터널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기준금리는 내려가고 돈은 풀리고 있다. 그런데도 시장의 반응은 감감하다. 답답할 수도,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풀린 돈이, 한껏 낮아진 금리로 인해 갈 곳 없어진 그 돈이, 마침내 주식시장으로, 부동산으로 돌아와 준다면 좋으련만 아직은 종무소식이다.기준금리의 연속적인 인하에도 불구하고 시장금리의 반응이 신통치 않은 것이 1차적인 이유다. 일례로 미국의 경우 기준금리는 연 1%로 낮아졌지만 모기지 금리는 떨어진 것도 없거니와 변동 폭만 커졌다. 가산금리가 올라간 데다 시장 참여자들의 불안감을 반영해 조그만 변수에도 등락을 반복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은행에서 두 차례나 금리를 인하하면서 기대감은 잔뜩 높아졌어도 양도성예금(CD) 금리의 하락은 더디고 대출 금리는 요지부동이다. 회사채와 금융채 금리의 고공 행진도 계속되고 있다.위험 자산 투자의 타당성 여부를 따질 때 흔히 사용되는 지표로 일드 갭(Yield Gap)이라는 게 있다. 이는 주가수익률(PER)의 역수와 국채 투자 수익률의 차이로, 국내 주식시장의 경우 이 숫자는 최근 9~10%까지 치솟아 역사적 평균(6%)보다 크게 높아졌다. 주식 투자의 매력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의미다. 그러나 시장엔 국채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국채를 대신할 수 있는 금융채나 우량한 신용 등급의 회사채, 은행 예금 등의 대체 투자 수단과 비교하면 이 수치는 역사적 평균과 별반 차이가 없다. 주식이 결코 싸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내년 이후 경기 침체에 따른 기업 수익률의 저하를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이른바 유동성 함정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돈이 풀리고 금리가 제로에 가까워져도 투자를 통해 돈을 벌 수 없다면 사람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통화 정책에 이어 세율 인하와 지출 확대를 근간으로 하는 재정 정책이 속속 나오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신뉴딜 정책에 대한 논의도 활발하다.이러한 정책들은 결국 시차를 두고 실물경제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현재의 금융 위기가 언제까지, 어느 정도의 깊이로 진행될 것인가를 논의한다는 것 자체가 인간의 탐욕과 자기 과신의 산물일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전문가들이 주목하고 있는 시기는 대개 내년 상반기다. 시간은 필요하겠지만 넘치는 유동성이 서서히 금리를 끌어내리게 되고 이는 소비와 투자 증가로 이어져 경기 회복에 기여하게 되리라는 논리다. 이런 과정을 거쳐 수요가 증가하면 물가가 상승하고 다시 금리가 오르게 되는, 이러한 순환 과정이 자본주의의 속성이다. 장기적인 호황기를 구가하던 지난 1960년에는 ‘영원한 성장’이 가능할 것처럼 들떴지만 그 끝은 인플레이션이었고 1990년대에는 정보기술(IT)의 발달과 함께 ‘불황이 없는 신(新)성장 시대’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올랐지만 그 후유증은 ‘거품의 붕괴’였다. 이처럼 경기는 철저히 순환되는 것이다.자산 운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동안은 투자가 대세였다면 당분간 채권과 예금에 대한 관심이 자산 운용의 중심에 있을 전망이어서 ‘신(新)저축의 시대’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특히 넘치는 유동성이 금리의 하락을 유도할 것으로 본다면 지금은 채권 투자의 적기다.그러나 주가가 이미 상당 폭 하락한 데다 금리 또한 정부의 의지에 따라서는 빠르게 떨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고금리의 혜택을 구가할 수 있는 시기는 그리 길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우리 경제의 경우 원자재 가격의 하락에 따른 물가 안정, 낮은 성장률, 기업과 가계의 자금 수요 부진 등을 감안할 때 고금리가 지속되기는 힘들다는 점을 주시해야 한다. 게다가 현재의 금리가 예전보다 올랐다고 하더라도 물가상승률과 이자소득세를 감안하면 실질금리는 높은 편이 아니다. 주식과 펀드에 대한 관심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체리 피킹(cherry picking)’이라는 말이 있다. 원래는 마케팅 용어로 고객이 기업의 특정 서비스나 제품만을 구매한다는 의미였지만 최근에는 가치에 비해 과도하게 떨어진 주식이나 상품을 골라서 투자한다는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되는 말이다. 주식 시장에는 현재 ‘체리 피킹’할 수 있는 종목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개별 기업은 말할 나위도 없고 국가별로도 PER가 5배 미만인 나라들이 수두룩하다. 현금 비율이 높은 투자자라면 주가가 떨어질 때마다 이들 주식을 ‘체리 피킹’함으로써 투자수익률을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물론 주가가 추세적 상승으로 돌아서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문제의 진원지인 미국의 경우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의 배경이 됐던 주택 가격 하락이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내년까지 미국의 주택 가격은 계속 하락하리라는 전망이다. 안정을 찾아가는가 싶었던 모기지 금리가 다시 상승하고 있는 점도 부담스럽다. 무엇보다 경기가 장기적인 침체 국면에 접어들고 있음을 알리는 각종 지표들이 미국은 물론 전 세계 금융시장을 짓누르고 있다. 디커플링에 대한 기대도 있지만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선진국의 소비가 위축되면 이머징 마켓의 성장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그러나 미국 시장의 안정을 전제로 할 때 주가 상승에 대한 기대는 여전히 이머징 마켓 쪽에 무게가 실려 있다. 세계경제의 신성장 엔진으로 평가받고 있는 브릭스(BRICs) 4국을 비롯해 과도한 주가 하락으로 저평가돼 있는 국가들이 주목의 대상이다. 특히 중국의 경우 부동산 가격의 하락, 높은 대외 의존도의 부담에도 불구하고 지난 7년간의 주가 상승분을 불과 1년 만에 고스란히 반납한 만큼 또 한 번 ‘기회의 땅’이 될 수 있을지 눈길을 끌고 있다. 이와 관련, 중국 정부가 경기 부양을 위해 775조 원을 풀고 부가가치세 경감, 금리 및 지급준비율 인하 등 일련의 조치를 내놓은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이런 가운데 우리 시장도 시련 속에서 새로운 기회를 맞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넘어야 할 산은 아직도 첩첩이다. 한미 통화 스와프 체결과 은행들의 외화 차입에 대한 정부 지급보증으로 외환위기는 한 고비가 넘어갔다고 하지만 산적한 미분양 아파트와 이로 인한 건설사의 자금 악화, 제2금융권의 부도 가능성은 우리 경제의 뇌관이 되고 있다.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의 부실화와 가계 대출 증가도 부담이다. 이들은 곧바로 은행의 부실 자산 증가로 이어져 가뜩이나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의 연체 대출 증가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은행들로 하여금 운신의 폭을 더욱 제약할 우려가 있다.더욱이 정부의 공급 확대 정책에 따라 수도권 신도시를 중심으로 주택 공급은 지속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수요의 감소에도 불구하고 공급이 이처럼 늘어난다면 당분간 주택시장에 봄볕이 들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부동산 수요를 진작하고 위기에 빠진 건설사를 살려낼 정부의 적극적인 대책이 아쉬운 대목이다. 사정이 이런 만큼 새로 내 집을 마련하고자 하는 이에게 내년은 더없이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간적 여유를 갖고 접근해야지 서두를 필요는 없어 보인다. 경매든, ‘급급매물’이든 부동산 시장에도 ‘체리 피킹’의 시기가 오고 있는 것이다.김상윤 하나은행 목동역지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