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오클래식, 또는 앙투아네트 스타일
오클래식은 루이 16세 양식이라고 하거나 앙투아네트 스타일이라고도 한다. 그만큼 여러 가지 요인들이 이 시대를 풍미했다. 네오클래식이라는 뜻은 클래식 리바이벌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으나 르네상스와는 구분된다. 르네상스는 미슐레가 처음으로 사용해 오늘에 알려졌지만 클래식과는 그 내용이 상당히 차이를 두고 있다.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클래식은 라틴어 명사 클래시스(classis)의 형용사 클라시커스(classicus)에서 유래한다. 로마의 여섯 번째 황제 세르비우스툴리우스는 시민을 재산에 따라 다섯 계급으로 나누어 군대를 편성했고 이 계급에서 클래시스는 국가 유사시에 소집되는 계급을 가리켰다. 로마의 문인 아울루스 겔리우스에 의하면 군대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최상의 클라시시(classici)로 불렀으니 클라시커스는 최고급의 상류층을 의미한다. 그러니 클래식은 고급스럽다는 뉘앙스가 짙다. 르네상스로 접어들자 그리스 로마의 문물 전반을 최상의 가치로 인정하게 되면서 고전은 곧 그리스, 로마문화를 뜻하게 됐다. 즉, 르네상스 사람들은 그리스 로마문화를 이상적인 인간 찬송의 문화로 새롭게 자각하면서 그 가치를 명백히 했던 것에서 클래식이 유래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네오클래식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빙켈만이다. 독일의 미술 사학자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를 배우고 1755년에 ‘그리스예술 모방론’을 저술했으며 고전주의사상의 앞선 연구로서 인정을 받으면서 주목 받은 인물이다. 로마에서 고대 유품과 각지의 유적 조사 연구를 바탕으로 1764년에는 그 유명한 ‘고대예술사’를 간행했으며, 특히 양식사(樣式史: style history)의 방법을 창시해 예술사학과 미학 연구에서 불멸의 치적을 남기고 괴테와, 레싱, 헤겔 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론가로서가 아니라 디자이너의 입장에서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로버트 애덤을 꼽아야 할 것이다. 고대 고전 건축에 깊은 인상을 가지고 1750년 이후 폼페이 헤르쿨라네움의 유적을 답사했고 1757년에는 크로아티아 해안 스플리트에 남은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궁전을 실측 조사하여 1763년에 그 성과를 발표한다. 역시 건축가였던 동생, 제임스와 런던에 건축 설계소를 열어 귀족을 대상으로 여러 고급 지대의 신·개축 등을 했으며 그 양식이 애덤 스타일로서 인기를 모아 영국 신고전주의를 대표하게 됐으며 전 유럽과 미국 프랑스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런던의 아이스 월스 주위의 사이온 하우스와 캔우드 하우스, 오스터리 파크 등의 저택, 스코틀랜드의 중세 성의 인테리어 등은 좋은 귀감으로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직접 가구도 디자인했다. 헤플와이트와 셰러턴 가구 디자인에도 클래식 해석의 진수를 보여주었다.프랑스의 루이 16세는 1774에서 1791년까지 재위했으나 네오클래식 스타일은 그보다 전인 루이 15세 시대에 움텄다. 당시 로마 아카데미에서 수학 중인 프랑스의 젊은 예술가들이 끊임없이 제기하는 충고와 폼페이 발굴이 결정적인 동기가 됐다. 후기 로코코 시대의 가구 디자인은 직선의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는데, 이를 퐁파두르 스타일이라고도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약 1760년부터 1793년까지 포함할 수 있다. 루이 16세가 처형된 이후에도 수년간 이어졌으며 나폴레옹의 집권으로 사실상 그 사조의 끝을 보게 된다. 조지 3세가 통치하던 영국은 로버트 애덤이 로마를 여행하고 돌아온 이후 클래식 스타일을 사용한 실내장식과 가구 디자인으로 인기를 얻고 있었으며 그랜드 투어라는 이름으로 이탈리아 투어 붐이 불고 있었다. 로코코를 퇴폐적인 취향으로 몰아붙이면서 로마에서 스케치한 건축들과 폼페이 유적으로부터의 모티브를 채용한 우아한 직선이 전체적인 시각 예술을 변모시키고 있었다.가구에서는 세련된 직선의 사용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영향이 결정적이었기에 ‘마리 앙투아네트 스타일’이라고 부르게 된다. 한편 에베니스트들은 책상이나 코모드 등에서 다리 기둥을 둥글게 하거나 비스듬하게 자르는 방식 등으로 직선에서 오는 경직에 균형을 주려고 했다. 이와 관련해 하프 돔의 형태로 반달 모양의 가구를 디자인했는데 이러한 형태는 영국의 애덤과 함께 네오클래식에서 폭넓게 응용했으며 프랑스의 코모드와 콘솔에서 자주 나타난다.동서를 막론하고 문예사조는 늘 고대의 모티브를 닮아야 할 전거(典據)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전의 어떤 시대에서도 사용한 적이 없는 여러 가지 이국적인 재료들과 숙련된 장인들의 기교와 회화적인 방법으로 그들은 재구성함으로서 창조적 이노베이션의 경지로 들어가고 있었다. 특별히 실내장식과 가구 분야에서는 이미 로코코 시대에 다양한 디자인을 직선으로 바꾸면서 늘어난 중산층의 요구와 활동적인 여성들의 주문에 대응하면서 발전을 거듭했다. 이제 우아한 직선은 유럽의 대세였으며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장식적인 모티브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데 그리스의 암포라, 꽃 줄, 주상, 여성의 두상, 트로피, 월계관 및 올리브, 종려나무와 포도나무 잎, 조각 등이 매우 폭넓게 응용됐다.이 시대에도 로코코와 비슷한 장식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마르케트리, 청동 아프리케 등은 루이 15세 때와 같은 방법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현 방식에서는 보다 정숙한 이미지로서 꽃 장식 마르크트리를 예로 들자면 루이 15세 때의 꽃무늬는 풍성한 꽃들이 자유롭게 표현 되는 것에 반해 루이 16세 때에는 꽃병도 작은 사이즈로 바뀌거나 로마적인 요소들로 꾸며진다. 한편 전 시대에 이어 시누아즈리 트렌드는 지속됐는데 그 가운데서도 옻칠은 더욱 왕성하게 사용됐다. 도자기에서와 가구에서 중국이나 일본적인 요소들이 장식적인 오물로나 프레임 속에서 표현되곤 했다. 가구의 데커레이션을 보면 특히 책상이나 코모드에서 전형적인 루이 16세 스타일의 특징을 볼 수 있다. 여자의 두상, 꽃을 모티브로 한 마르크트리, 현악기, 어린이 등이 도금 장식된 브론즈나 나무로 만들어진 마르크트리의 원형 또는 타원형 프레임 속 데커레이션은 전형적인 루이 16세 스타일이다. 또한 마르텡 같은 디자이너에 의해 세브르 자기 패널이 가구들에 아름답게 장식됐다. 가구재로서 마호가니는 프랑스에서도 선호하게 됐다.유럽 최고의 가문에서 황녀로 성장한 앙투아네트의 고급 취향은 동시대의 모든 문화와 예술에 영향을 끼쳤는데 이것이 오히려 혁명을 촉진하는 계기로 작용했기에 그녀는 슬픈 왕비로 역사에 남아 있다.헤리티지 소사이어티 대표. 앤티크 문화예술 아카데미 대표. 앤티크 문화예술기행, 유럽도자기 저자.영국 엡버시 스쿨, 옥스퍼드 튜토리얼 서비스 칼리지 오브 런던 졸업.©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