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캔버스 삼아 작업하는 이목을
가 이목을(47) 씨가 돌아왔다. 어느 날 갑자기 “내년에 뉴욕에 간다”고 했던 그는 2005년 2월 떠났고 2년여 만인 지난해 돌아왔다.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본다면 뉴욕행은 ‘여유로운 외유’로 비춰지기 십상이다. 10대 아이돌 그룹처럼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골수팬을 거느리고 있고 그림이 완성되기만을 기다리는 구매 희망자가 끊이지 않는 등 이미 상당한 유명세를 얻은 작가이니 말이다. 그러나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는 ‘사재를 털어 독립운동하러 간 것’이라고 한다. 영화인들이 스크린 쿼터제를 주장하며 우리 영화 지키기에 사활을 거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의 정서와 감성이 담긴 영화보다 할리우드 영화를 많이 접하다 보면 고유문화의 색이 엷어지고 점차 미국식 사고와 문화로 빠져들듯 미술도 마찬가지다. 크게 보면 현대 미술이라고 총칭되지만 작가의 성장 환경과 배경은 각각의 작품에 고스란히 묻어나게 된다. 물론 세계적인 아트페어나 비엔날레 등을 통해 선보이긴 해도 우리 문화를 화폭에 구현하는 작가들의 해외에서의 입지는 한없이 작은 것이 사실이다.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그들에게 선보이고 교류하고 싶었단다.한편 2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보면 ‘무모하지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해외 레지던스 프로그램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현지 갤러리와 친분도 전혀 없는 상태에서 그야말로 ‘나, 이목을’ 하나만 믿고 감행한 것 아닌가. 영어 한마디 못하면서 1년여에 걸쳐 비자를 발급받았고 통역자를 동반해 맨해튼 일대의 갤러리를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보여주기를 수개월. 결국 첼시에 있는 화랑의 전속 작가가 됐다.“한국에 떠 있는 달과 미국에 떠 있는 달이 같은 건데, 밤이면 방문을 열고 나가지 못하겠는 거예요. 말이 통하는 사람도 없고 자칫하면 고립되는 거죠. 이왕 온 거 화끈하게 살고 가자고 다짐하고는 열심히 돌아다녔습니다. 제대로 보고 느껴야 그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작품을 내보이는 방법을 취할 수 있지 않겠어요. 어떤 사람들은 뉴욕에 다녀와서 뭐가 바뀌었냐고도 하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배우러, 변하러 간 것이 아니라 경험하기 위해 간 것입니다.”‘집 한 채 팔아서 깔끔하게 쓰고 온’ 뉴욕행 결과는 현재 득도 실도 아니다. 현지에서 그의 존재나 작품성을 확실히 알리고 주류 계층에 편입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립투사들이 끊임없이 독립 운동을 추진해 결국 우리나라 광복의 밑거름이 되었듯 일단 도화선은 깔아 놓고 온 셈이다. 언제 불이 붙느냐는 시간문제다.어찌 됐든 한동안 볼 수 없었던 그의 정감어린 그림을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은 반가운 일임에 틀림없다. 되에 담긴 밤과 대추가 후드득 떨어질 것 같고, 디딤돌 위 고무신이 그대로 옮겨진 듯한 한국적 소재의 사실적 묘사는 변함없는 감흥을 준다. 동네 할머니에게 얻은 다리 벌어진 교자상, 버려진 낡은 소반, 헌 도마 등 나무를 캔버스 삼아 그리는 것이 작품 특징이다. 굳이 이전과의 차이점을 꼽는다면 최근에는 나무를 이어 붙여 작가의 의도대로 디자인한 상자를 사용해 좀 더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시도를 한다는 것. 소재도 기존의 늙은 호박, 감, 대추 등 아련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것 대신 보편적 감성을 나타낼 수 있는 사과를 주로 다룬다. 그렇지만 그림 속에 동양 철학적 사고가 담겨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1차적으로는 무위자연처럼 화면에 대상을 그냥 던져 놓습니다. 2차적인 것은 이면에 숨어 있죠. 제 그림을 유심히 보면 채움과 비움이 공존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불교적으로는 공(空), 유교적으로는 허(虛), 동양화에서는 여백이라고 말하지만 용어만 다를 뿐 그 의미는 똑같죠. 있음과 없음, 남과 여, 음과 양, 이런 모든 것들은 유기적인 요소입니다. 서로 교감을 주고받으면서 나아가는 겁니다. 이런 의미가 담긴 작품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또 하나의 유기체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죠. 침대 머리맡에 붉은 등이 없어도 섹스는 가능하지만 좀 더 그럴듯한 분위기 속에서 더 큰 쾌감을 느끼게 되지 않나요. 예술의 역할이 그런 겁니다. 일상의 한 부분으로서 빡빡한 인생을 부드럽고 원활하게 만들어주는 소통의 창구 같은…. 그러려면 제품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작품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그의 말마따나 예술이라는 것은 인생의 양념 같은 것이라서 생존을 위한 기본 욕구가 충족되고 난 후에야 돌아볼 여유를 얻게 된다. 전업 작가의 길을 걷기 어려운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기본 생계를 위한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는 것도 아니고 평생 자신의 작업이 인정받을 수 있는지 여부도 모르는 상태에서 붓만 손에 쥐고 있을 수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게다가 그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부친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경제적 지원은 꿈도 꿀 수 없는 처지였다. 당장 중학교 입학금조차 조달할 수 없을 정도로 기울어진 가정 형편에 그의 생활도 180도 뒤바뀌었다. 근로 장학생으로 학교를 다니며 늘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끼니도 제대로 챙겨먹을 수 없을 만큼 어려웠고 물감과 스케치북을 구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지만 항상 그림을 그렸다.“어렸을 때 하늘을 본 기억이 없어요. 하늘을 보면 얻을 수 있는 게 없잖아요. 평상시에는 땅만 보고 다니면서 병도 줍고 고철도 줍곤 했지요.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그림을 한 걸 보면 운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무당이 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타고나듯 저도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그는 화가지만 혼자서 집도 지을 수 있다. 지금까지 자그마치 86종류의 아르바이트를 해보았고, 그 가운데 미장공 벽돌공 보일러공으로도 일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경북 청도의 산속에 있던 작업실도 그가 만든 것이고, 뉴욕에서 돌아온 후에는 칠곡 나환자촌에 있는 폐교를 수리해 쓰기도 했다. 지난해 서울로 입성해 여러 곳을 전전하다 정착한 홍지동의 현재 작업실도 그의 솜씨다. 빌라의 반지하 공간을 그럴듯하게 바꾸어 놓았는데, 하수관이 천장에 있어서 이따금씩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 좌르르 좌르르 하며 똥물도 내려가고 설거지한 물도 내려가는 등 다양한 하수가 지나간다. 지저분하고 거슬린다는 사람도 있지만 그는 “우리 집은 시냇물이 하늘에서 흐른다”며 시인 같은 한마디로 일축해 버린다.“예술은 현재보다 조금 앞서서 미래를 살아가는 일이에요. 대중들의 시각이나 사고방식과 다를 바 없으면 창작이 불가능합니다. 천재 화가가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하고 사후에야 재평가를 받게 되는 것도 시대를 너무 앞서갔기 때문이에요. 내가 이 삶을 살기로 했으면 어려운 현실도 받아들여야죠. 이왕지사 힘든 것을 알고 시작한 거니까요.”1년에 60점 정도를 그린다는 화가 이목을. 공급에 비해 수요가 많기 때문에 그가 마음만 먹으면 훨씬 더 많은 작품을 팔 수도 있다. 그렇지만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에서 찍어내는 듯한 제품이 아닌 화면의 여백을 통해 보는 이들과 교감을 나누는 그런 작품을 만들고 싶기에 다작을 자제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그림을 접하면 남에게는 말 못한 속내와 고민을 털어놓고 싶은 생각이 든다.글 정지현 미술전문 칼럼니스트·사진 이승재 기자©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