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훈 재규어 랜드로버 코리아 대표
난해 글로벌 자동차 업계의 핫이슈는 제너럴모터스(GM), 포드로 대표되는 미국 자동차 메이커들의 불황 소식이다. GM과 포드의 추락으로 세계 자동차 시장의 지각변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자구책 마련 차원에서 포드가 영국 고급차 메이커인 재규어-랜드로버를 인도 자동차그룹 타타모터스에 23억 달러에 매각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영국 자동차 산업을 상징하는 재규어-랜드로버를 다른 나라도 아닌 인도 기업이 매입했다는 것은 글로벌 시장의 냉혹한 현실을 반영한다. 이에 따라 포드 계열로 묶여 있던 프리미어 오토모티브 그룹(PAG)은 지난 5월 1일자로 볼보와 재규어-랜드로버로 분리됐다.가장 ‘영국다운’ 자동차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재규어-랜드로버에 올해는 중요한 시기다. 빠른 속도로 성장 중인 국내 수입차 시장에서 확실한 자리를 잡아야 하는 와중에 타타모터스로 인수돼 그 어느 때보다 심기일전이 필요하다. 애초부터 볼보와는 마케팅, 애프터서비스 등 모든 업무가 분리돼 있어 계열 분리에 따른 어려움은 크지 않겠지만 어쨌든 조직 안정이 급선무다. 그렇다고 해서 안정에만 머무를 수는 없다. 공격적인 마케팅이 동시에 필요하다. 재규어-랜드로버가 초대 대표이사 사장으로 이동훈 전 PAG코리아 상무를 선임한 것도 두 가지를 모두 고려해서다.한양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후 LG전자 해외영업팀에서 근무한 이 사장이 수입차 시장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지난 1997년 BMW코리아에 입사하면서부터. 이후 그는 한독모터스, 쿠즈코퍼레이션, PAG코리아 등에서 근무했다. 이 때문에 그는 국내에서 몇 안 되는 유럽 차 전문가로 통한다. 유럽 자동차 강국인 영국(PAG), 독일(BMW), 이탈리아(쿠즈코퍼레이션-페라리 독점 수입 업체)의 차 판매를 모두 경험해 봤다.“독일 차가 퍼포먼스 등 자동차 본연에 충실하다고 한다면 이탈리아는 디자인이 포인트입니다. 이에 비해 영국 차는 겉으로 뚜렷하게 나타나는 특징은 없습니다. 현대미와 전통미를 적절하게 조화하는 것이 기본 콘셉트이기 때문에 타면 탈수록 매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그중에서도 재규어와 랜드로버는 영국 차의 아이덴티티를 가장 잘 표현하는 자동차 메이커로 유명하다. 최근 전 세계 자동차 시장의 트렌드가 다품종, 크로스오버로 변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이 두 모델은 시류와 타협하지 않고 각 브랜드의 고유 철학을 잘 지켜나가고 있다. 재규어, 랜드로버 모두 단일 라인업으로 구성돼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이 두 메이커가 트렌드에 비켜서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재규어, 랜드로버를 타 보면 고집스러운 영국 장인의 숨결이 느껴진다.가령 랜드로버는 1950년대부터 영국 여왕이 우방국을 방문할 때 꼭 타고 다니는 수행 차량으로 선택될 만큼 전통과 권위에 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브랜드다. 1999년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내한해 안동 하회마을을 방문했을 때도 랜드로버의 플래그십 모델인 레인지로버를 탔다.재규어, 랜드로버가 세계 자동차 역사에 기여한 공로도 크다. 최근 개발된 재규어 XF에는 보행자와 충돌할 때 보닛의 높이가 자동으로 높아지도록 하는 보행자 접촉 감지 시스템이 장착됐다. 0.03초 만에 보닛을 13cm가량 들어 엔진에 보행자의 머리가 닿는 것을 방지하는 시스템으로 머리 부상을 4분의 1 수준으로 줄일 수 있다.최근 수입되고 있는 거의 모든 스포츠유틸리티 차량(SUV)에 장착된 내리막길 제어장치(HDC)는 랜드로버가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이 밖에 랜드로버는 주행 지형에 맞게 차량을 작동할 수 있는 전자동 지형 반응 시스템도 처음 개발했다.“최근 자동차 시장을 놓고 보면 재규어도 SUV를 만드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재규어는 아직까지 세단을 고집합니다. ‘틈새 프리미엄’을 추구하기 때문이죠. 우리는 프리미엄 자동차에도 대중차와 마니아층이 확실한 차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BMW, 메르세데스벤츠, 아우디가 추구하는 것이 대중적인 요소를 기반으로 한 프리미엄 자동차라면 재규어는 마니아층이 확실한 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립자 윌리엄 라이온스 경의 이름에서 유래한 ‘라이온스 라인’을 아직까지 고수하고 있는데, 이것은 네 개의 헤드라이트와 보닛의 곡선을 연결하는 선을 의미합니다. 간결미보다는 섬세한 곡선미가 재규어의 디자인 철학입니다. 이 때문에 고객 중 상당수가 디자이너, 건축가 등 전문직 종사자로 구성돼 있습니다.”재규어, 랜드로버라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고급스러움’이다. 하지만 이는 되레 판매에 발목을 잡는 부분이기도 하다. 고객들이 선뜻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힘든 부분도 ‘너무 고급스럽다’, ‘너무 화려하다’는 이유에서다. 왠지 실용성과는 거리가 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고객들이 아직도 꽤 되더군요. 물론 고급스러움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재규어, 랜드로버는 실용성도 많이 갖춘 차입니다. 디젤 모델의 연비가 동급 최고 수준입니다. 이 때문에 재규어 XJ만 해도 디젤 판매량이 전체의 60%를 넘습니다.”최근 재규어는 새로운 변신을 준비 중이다. 지금까지 곡선을 기반으로 한 전통미에 충실했다면 앞으로는 날렵함으로 대표되는 현대적인 재규어를 선보이는데 더욱 역점을 둘 생각이다. 지난해 제네바모터쇼에서 콘셉트카로 첫선을 보였고 올 하반기 전 세계 출시된 XF 시리즈에서 달라진 재규어를 엿볼 수 있다. 관련 업계에서는 XF를 재규어의 중흥을 이끌 선두주자로 꼽는다. 그만큼 거는 기대가 크다. 각국 지사로부터 들려오는 판매 실적도 예상치를 훌쩍 뛰어넘는다. 원형식 변속 레버인 ‘재규어 드라이브 셀렉터’와 손끝으로 터치만 해도 콘솔 라이트나 내부 개폐 장치를 작동할 수 있는 재규어 센서 등도 XF에 처음으로 시도됐다. “2~3년 전만 해도 재규어, 랜드로버의 판매 대수는 연간 300~400대를 넘지 않았는데 지속적인 브랜드 마케팅 결과 지난해에는 1200대 정도를 판매했습니다. 성장률만 놓고 보면 타 브랜드보다 훨씬 높습니다. 이에 따라 올해는 판매 목표 대수를 1500대로 잡았습니다. 지금과 같은 속도로 보면 목표 달성에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랜드로버에 대한 마케팅도 대폭 확충할 계획이다.“랜드로버를 타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차라고 생각하면 무조건 빠르고 편안하게 달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랜드로버를 타 본 뒤로는 차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꾸게 됐습니다. 바로 안전 때문이죠. 지난해 영국 런던 이스트너 캐슬에 있는 익스피어리언스센터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랜드로버를 타고 오프로드를 다니는 코스인데 진흙으로 된 내리막길을 15분가량 타고 내려갈 때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덕분에 내리막길 제어 장치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됐습니다.”브랜드 마케팅과 함께 이 사장은 판매망 확충에서 역점을 기울일 생각이다. 현재 광주 딜러숍 체결을 협의 중이며 일산 인천 강원 등지에 매장을 세우는 것도 조심스럽게 검토하고 있다.대주주가 타타모터스로 바뀐 이후의 변화에 대해 그는 “자금력이 든든한 타타가 대주주로 나섰기 때문에 신차 개발 등에 있어서 더욱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며 “상용차, 저가 차량을 주로 만드는 타타의 인수로 재규어, 랜드로버 고유 가치가 흔들리지 않겠느냐는 우려도 있지만 실제 본사 회의에 가보면 이 같은 분위기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인터뷰 도중 이 사장은 기자에게 오프로드 10계명을 아는지 물었다.“SUV는 차체가 크고 투박해 접근만으로도 다른 운전자들에게 위협을 줄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몇 가지 원칙을 반드시 준수해야 합니다. 간략하게 10계명을 설명하면 어떤 경우에도 선두 차량을 추월하지 말아야 하고 일렬 주행 시 차로를 지키며 안전 속도 등의 안전 규정도 준수해야 합니다. 절대 과속해서는 안 되고 전조등은 반드시 켜야 합니다. 또 가장 중요한 것이 환경 보존입니다. 자연 속에서 묘미를 느끼는 것이 오프로드 주행의 키워드인 셈이죠. 전 경영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절대 무리하지 않고 남과 동행하는 것은 기본이죠. 여기서 말하는 ‘남’이라는 개념에는 고객 직원 딜러가 모두 포함돼 있습니다.”재규어와 랜드로버는 영국 차의 아이덴티티를 가장 잘 표현하는 자동차 메이커로 유명하다. 이 두 모델은 각 브랜드의 고유 철학을 잘 지켜나가고 있다.재규어 랜드로버 코리아 대표한양대 기계공학과 졸업LG전자 해외영업팀페라리 마세라티 국내 수입 총괄이사한독모터스 영업마케팅 총괄이사글 송창섭·사진 이승재 기자 realsong@moneyro.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