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나 강예나
만한 크기의 얼굴에 커다란 눈이 한가득이다. 몽마르트 언덕의 아멜리에 같은 동화적인 얼굴에 가느다란 몸, 길게 뻗은 팔과 다리. 서른을 넘긴 나이가 믿어지지 않는 외모는 발레리나 강예나의 트레이드마크다.외적인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ABT에 무용수로 있던 시절, 미국의 한 잡지는 그녀를 ‘가장 성실한 무용수’라며 칭찬했다. 기라성 같은 무용수들이 북적대는 세계 최고의 발레단인 ABT에서 그녀의 성실함은 별처럼 빛났다.강예나는 ‘ABT 최초의 한국인 발레리나’라는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이 또한 그녀의 용감한 도전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우리나라 유니버설 발레단의 미국 순회공연 중이었어요. 뉴욕에 머무를 때 하루를 쉬게 됐는데, 마침 할 일도 없고 해서 호텔에 놓인 전화번호부를 뒤적였죠.ABT의 전화번호만 달랑 들고 택시 운전사에게 주소지로 데려다 달라고 했어요. 가서 말했죠. 무례하지만 양해를 구하고, 나는 한국 유니버설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인데 테스트를 받고 싶다고요.”그녀가 지금 생각해도 당돌했다고 회상하는 행동 덕분에 그녀의 경력은 대도약했다. 이는 그녀가 평소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아는 주위 사람들에게는 더욱 놀라운 사건이었다.“ABT의 예술감독이었던 케빈 매킨지 앞에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5분을 물끄러미 보던 그가 그냥 나가버리는 거예요. 실망한 마음으로 춤을 이어가는데 5분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요. 매킨지 감독이 당시 ABT의 모든 강사진을 몰고 와 저를 지켜보라고 권하는 거였어요.”테스트가 끝나고 강예나는 함께 일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놀라운 기회를 담담히 받아들였다.하지만 기쁨도 잠시. 혈혈단신 뉴욕에 짐을 푼 그녀는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무릎 십자인대가 전후방 파열되는 큰 부상을 입었다. 장장 5시간 동안의 대수술이 진행됐고, 성공적인 수술 후에도 2년 가까이 재활 훈련에 몸을 맡겨야 했다.“원래 그 정도의 부상이라면 무용을 포기해야 하죠. 하지만 재활 훈련을 열심히 하며 희망을 놓지 않았어요. 목사이셨던 할아버지를 필두로 모든 가족이 기도에 기도를 거듭해 용기를 줬고요. 지금도 무릎이 아픈 건 고달프지만, 살짝 옥에 티가 있는 것도 제겐 좋은 자극제가 된답니다.”활짝 웃는 그녀의 얼굴 어디에서도 그늘을 찾아볼 수 없다. 절망의 문턱까지 이르렀을 때 그녀가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긍정의 힘’이었다.“해가 뜨기 직전이 가장 어둡잖아요.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곤 했어요. 생선에 소금을 치고 물을 얼려 얼음을 만들듯, 인간의 고통은 인간이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요. 빠져 나오려 안간힘을 쓸수록 빠져드니, 고통을 내 몫으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죠.” 그녀는 왼쪽 무릎을 만져보며, 아직도 자연적인 무릎과는 차이가 있지만 그 때문에 더 오만하지 않고 부지런하며 긴장을 놓지 않아 스스로에게 큰 득이 됐다며 위안을 삼아본다.“당시 정말 쉬는 날 없이 하루도 빼놓지 않고 발레에 ‘집착’했거든요. 쉬라고 하느님이 주신 것이라 생각해요. 덕분에 쉬면서 제3자 입장에서 발레를 보니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죠. 나아서 무용을 다시 하게 되면 즐기면서 하리라는 다짐도 했고요. 다치지 않고 가자마자 솔리스트를 했으면 제가 어떻게 출세했을지 모르지만 다 제 운명으로 받아들이려고 해요.” 그녀의 사전엔 미련이나 후회는 없다. 사랑할 때도 올인하는 편이라 이별 후에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항상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본능을 철저하게 믿는다. 그리고 노력은 재능과 상황을 능가한다는 명제를 늘 가슴속에 새긴다.“후배들에게 자신의 재능을 너무 믿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예술가에게 재능은 때로 독이 되죠. 외국에서 공부하면서 천부적인 신체와 재능을 갖춘 친구들을 봤지만, 대개 나태해지고 자만했어요. 오히려 한두 가지 단점을 지닌 친구들이 뼈를 깎듯 노력했고, 인내하고 이겨냈습니다. 결국 크게 되는 사람은 그들이죠. 보다 낫다고 오만하지 말고, 결점에 상심할 필요도 없는 겁니다.”외유내강. 여린 외모와는 딴판으로 그녀의 심장엔 굳은살이 단단하게 박인 듯 강한 모습이다. 그녀가 미국에서 힘들 때 보면서 마음을 다잡게 해준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TV 프로그램 ‘오프라윈프리 쇼’다.“오프라 윈프리를 존경해요. 방송을 통해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 자리 잡은 그녀를 보면서 많은 걸 느끼죠. 세계 많은 사람들의 꿈을 실현시키는 그녀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여걸이 아닌가 싶어요. 제 이야기도 작게나마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으면 해요.”천재는 90%가 노력으로 이뤄진다고 했던가. 그녀의 노력은 발레뿐만 아니라 자기 계발에서도 꾸준히 발견된다. 틈만 나면 책을 읽고 끊임없이 다른 분야에 노크한다.워낙 달변가로 소문이 난 터라, 얼마 전에는 한 케이블 채널에서 프로그램 진행자로 나서기도 했다. 패션에도 관심이 많아 패션쇼 무대에도 서고 화장품 광고 모델로도 얼굴을 알렸다. 그녀에게 이런 다양한 활동은 신선한 자극제가 된다.“발레는 평생 할 수 없는 거예요. 꽃다운 나이에 확 피고 지는 게 바로 발레리나의 숙명이죠. 전 이르지만 은퇴 시기를 고려하고 있어요. 예전엔 오직 발레만 생각했지만 지금은 춤만 잘 춘다고 그 사람 인생이 성공한다고 보지 않아요. 발레리나로서 더 크게 성공하고 싶은 욕심도 없고요. 여자로서의 인생을 풍성한 원으로 끝내고 싶어요.”강연이나 방송 등 오프 스테이지에서보다 많은 활동을 하고 싶다는 그녀. 마지막으로 한국 발레의 위상에 관해 묻자, 다시금 그 누구보다 열정적인 발레리나로 돌아간다.“한국 발레의 수준은 상당해요. 미국 ABT에서도 느꼈던 바죠. 단연코 아시아에서 최고예요. 아시아에서 발레에 이렇게 투자하는 나라는 드물죠. 특히 한국 유니버설 발레단의 브랜드 인지도는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는 수준입니다.” 천생 발레리나인 강예나. 그녀의 발자취가 한국 발레에 희망의 씨앗이 되길 바란다.1975년생.선화예술중고등학교 졸업, 영국 로열 발레스쿨, 워싱턴 키로프 아카데미 졸업.1994년 한국인 최초로 키로프발레단에 입단1994년 제 6회 파리 국제발레대회, 마사코 오야상 수상1994년 제2회 마야 플리세츠카야 발레대회, 입상1996년 유니버설발레단에 최연소 수석무용수 입단1996년 한국발레협회 신인상1998년 미국 아메리칸 발레시어터(ABT) 한국인 최초 입단2004년부터 유니버설발레단 재입단2005년 한국발레협회 프리마 발레리나상주요 출연작 :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라 바야데르’, ‘지젤’, ‘호두까기인형’, ‘심청’, ‘춘향’ 등 다수.In ABT: ‘오네긴, 말괄량이 길들이기: 존 그랑코’, ‘로미오와 줄리엣: 캐네스 맥밀란’, ‘장미의 정원: 안소니 튜더’ 외 다수.글 김지연 · 사진 이승재 기자 jykim@moneyro.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