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 8일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이 열린 냐오차오(올림픽 주경기장). 마지막 성화 주자로 등장한 중국 체조 금메달리스트 리닝(45)이 하늘 위로 솟구쳐 올랐다.이미 성공한 기업가인 리닝의 부(富)도 하늘 높이 올라갔다. 홍콩 증시에 상장한 그의 이름을 딴 회사 리닝의 주가가 개막일부터 3거래일 연속 올라 이 기간에만 리닝이 보유한 주식 가치가 2억 홍콩달러(266억 원) 늘어난 것.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에서 47억2000만 홍콩달러(6282억 원)의 자산을 보유한 기업가로 떠오른 리닝의 목표는 2018년까지 세계 5대 체육 용품사를 일구는 것.리닝은 1982년 세계 체조 월드컵에서 6관왕, 1984년 LA올림픽 때 남자 체조 부문 3관왕 등 국내외 체조 대회에서 모두 106개의 금메달을 따낸 전설적인 선수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발목 부상으로 금메달을 놓치자 19년의 선수 생활을 접고 이듬해 체육 용품 업체 리닝을 창업했다. 첫 사업 품목인 신발부터 ‘리닝’ 브랜드를 달았다. 대부분의 중국 신발 업체들이 얼굴(브랜드) 없는 사업을 하는 것과 대조적이었다. 여기에다 유럽의 디자이너를 고용해 신발을 디자인했고 브랜드를 알리는 데 돈을 쏟아 부었다. 2004년 6월에는 중국 체육 용품 업체로는 처음 홍콩 증시에 상장, 리닝 회장은 중국 100대 갑부 반열에 들었다.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인 알리바바닷컴의 창업자 마윈(44) 회장은 ‘중국의 이베이’를 만든 기업인으로 불린다.키 160cm에 ‘ET(외계인)’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1999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 전자상거래 포럼을 통해 중국 시장에 적합한 전자상거래 사이트 아이디어를 얻고 알리바바를 창업했다.마 회장은 이제 또 다른 도전을 하고 있다. 계열 회사인 타오바오닷컴을 중국 최대 온라인 쇼핑몰 업체를 넘어 세계 최대 유통 업체로 키우겠다고 공언 한 것. 타오바오닷컴에 향후 5년간 20억 위안(3000억 원)을 추가 투자해 이베이와 아마존을 추월하고 10년 내 월마트를 넘어서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마 회장은 “중국의 인터넷 인구가 5억∼6억 명에 이르게 될 수년 뒤엔 매일 1억∼2억 명이 타오바오닷컴에서 물건을 사도록 하겠다”며 “세계 어느 쇼핑센터도 이 정도 규모의 거래를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류촨즈(64) 레노버홀딩스 회장은 중국을 대표하는 1세대 기업인이다. 중국 최대 컴퓨터 업체 롄샹(영문명 lenovo)의 지주회사인 레노버홀딩스를 이끄는 그는 개혁·개방의 물결을 타고 글로벌 기업을 일군 기업인으로 평가받는다. 예전의 영문 회사명 레전드(legend)는 그에게 딱 맞는 말이다. 중국 IT 역사의 ‘전설’로 통하는 그는 1968년 시안군사전신공정학원을 졸업한 뒤 청두의 연구소에 배치됐지만 수개월 뒤 문화혁명에 휩쓸려 허난성의 농장에서 일하게 된다. 하지만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내건 이듬해인 1979년 중국과학원 컴퓨터기술연구소로 발령받으면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군사 예산을 삭감한 중국은 젊은 과학자들에게 알아서 살길을 찾으라고 권했고 그는 연구소 경비 초소로 쓰였던 23㎡(7평)짜리 벽돌 건물에서 10명의 동료와 함께 창업했다.1990년 독자 브랜드 PC를 내놓은 그는 버튼 하나로 인터넷을 할 수 있는 PC를 만들어 내수 점유율을 30% 가까이 끌어올리는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이후 그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다. 외국 회사들의 공세가 강화되면서 점유율이 하락하게 된 것. 게다가 부동산 휴대전화 등으로 2000년 이후 본격화한 사업 다각화가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는 PC에 다시 집중하기로 하고 해외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2005년 무려 17억5000만 달러를 들여 IBM PC 사업을 인수하면서 그가 얻은 건 세계 10위에서 3위 PC 업체로 커진 덩치뿐만이 아니다. “IBM은 토끼고, 레노버는 그 토끼 등에 탄 거북이죠.” 류 회장은 IBM을 통해 기술력, 브랜드, 국제화된 역량 있는 팀, 국제적인 배급망을 얻게 됐다고 말한다. 뉴욕으로 본사를 이전하고 최고경영자(CEO)에 IBM맨을 앉힌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류 회장은 이제 또 다른 도전에 나서고 있다. 레노버홀딩스 산하의 훙이투자와 벤처캐피털인 롄샹투자를 2010년까지 중국의 3대 투자 기업으로 키우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오토바이로 시작해 자동차 업체를 일군 중국 최대 오토바이 제조업체 리판의 인밍산(70) 회장 역시 류 회장처럼 끊임없이 도전하는 기업인이다. 그가 대학 영어 강사와 출판사 편집담당을 하다 친지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오토바이 제조업체를 창업한 게 54세이던 지난 1992년. 그는 20만 위안(약 3000만 원)으로 시작한 지 10여 년 만에 기업 인수 등을 통해 17억 위안(약 2550억 원)의 자산을 가진 기업을 키워냈다. 그래도 그는 늘 부족하다고 얘기한다. 그래서 택한 길이 ‘혼다 성장 전략 따라 하기’다. 오토바이로 출발해 자동차 제조업체로 우뚝 선 혼다의 길을 걷겠다는 것이다. 65세이던 지난 2003년 자동차 제조업에 뛰어든 게 그런 이유에서다. 기술 중시도 혼다를 닮았다. 인 회장은 그러나 중국 자동차 업계는 제3의 길을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1의 길은 외국 회사와의 합작이었지만 선진 기술을 이전받는 데 실패했고 제2의 길은 지리자동차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 기술 개발을 고집하는데, 이보다는 네트워크로 기술력을 높이는 제3의 길이 낫다는 것이다. 리판은 상하이통지대 등 국내 대학은 물론 영국의 D&P와 미국의 MSC 등 관련 업체들과 연계해 자동차 제조 기술을 확보하고 있다. “나는 영원한 18세”라고 입버릇처럼 얘기하는 인 회장은 2003년 1월 민영 기업인으로는 처음으로 정치 기구인 충칭시의 정협 부주석에 올라 민영 기업의 대변자 역할도 하고 있다.중국에서 성공한 기업인 중에는 해귀파(海歸派·해외 유학 후 귀국한 인력)들도 적지 않다. 덩중한(40) 중싱웨이전자 회장이 대표적이다. 중국 언론은 “실리콘이 없던 중국의 실리콘밸리 중관춘에서 반도체를 만든 기술 혁신가”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미국 유학파인 덩 회장은 IBM의 반도체설계연구원으로 발명창조상을 받는 등 실리콘밸리에서 잔뼈가 굵었다. 그가 1999년 가을 HP 등에서 일하던 중국인 친구들과 함께 귀국, 중싱웨이전자를 창업한 건 중국 정부의 설득이 주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4시간 만에 회사 설립 절차가 끝났고 사업 아이템인 멀티미디어 칩은 국책연구사업으로 지원을 받아 개발됐다.PC 휴대전화의 영상신호처리 등에 사용되는 이 회사의 멀티미디어 칩은 2001년 양산된 이후 세계 시장에 3000만 개 이상 팔렸다. 시장점유율이 60%로 세계 1위다. 2005년 11월 나스닥에 상장하면서 새삼 주목을 받았다. 버클리대에서 물리학 석사, 전자공학 박사, 경제관리 석사 등 3개 학위를 받은 그는 실리콘밸리는 물론 베이징대와 칭화대를 다니며 인재 구하기에 열심이다.중국 역시 낮은 학력으로 맨땅에서 부를 일군 기업인들도 있다. 궈메이의 황광위(39) 회장은 중국 최대 가전 유통 업체를 일군 젊은 사업가다. 2004년 포브스 선정 2위, 유로머니 선정 1위의 중국 갑부에 올랐다. 궈메이를 홍콩 증시에 우회상장하면서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다. 중국 남부 광둥성 시골 출신인 그의 기업가 인생은 19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돈이 없어 고등학교를 중퇴한 그는 형과 함께 4000위안(약 50만 원)을 가지고 네이멍구에서 옷 장사를 했다.이듬해 베이징에서 3만 위안(450만 원)을 빌려 구한 점포에서 가전제품을 팔기 시작한 그는 주경야독하며 전국에 700여 개의 체인 점포를 가진 대형 유통 업체로 키워냈다. 1997년에는 펑룬투자를 설립해 부동산에도 뛰어들어 큰돈을 만졌다. 신문에 빼곡히 가격 표시를 한 광고를 업계 처음으로 시도하기도 했다. 제조업체에 가격 경쟁을 붙이고 갖가지 마케팅 비용을 요구해 국내외 제조업체들과 마찰을 빚는 그를 업계에서는 ‘독종’으로 부르기도 한다.오광진 한국경제신문 국제부 기자 kj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