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징의 한국인 밀집 지역인 왕징 인근에 있는 ‘지우창’. 화랑들이 밀집한 곳으로 ‘798’과 함께 베이징의 예술구로 통한다. 지우창 입구에서 300m 이상을 들어가면 한국의 표화랑과 함께 표화랑이 운영하는 카페가 나온다. 그 옆에는 알루미늄으로 만든 빨간색의 비너스상이 서 있다. 높이만 3.5m다. 표화랑의 김유림 디렉터는 “얼마 전 중국 부자 한 명이 카페에서 차를 마시다 마음에 든다며 1억 원에 비너스상을 구매했다”며 “설치를 위해 집에 가보니 미술관을 해도 될 만큼 수많은 예술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전 세계 예술 시장에 중국 바람이 불고 있는 배경에는 이 같은 중국 부자들이 있다.상하이 번화가인 난징시루의 주광백화점. 버버리, 크리스찬디올 등 명품 코너가 자리 잡은 1층에 휴대전화 매장이 있다. 노키아의 베르투 매장이다. 4만6000위안(약 690만 원)의 가격표가 눈길을 끈다. 그 옆에 놓여 있는 휴대전화용 가죽 케이스는 5300위안(79만5000 원)에 팔리고 있다. 찾는 사람이 있느냐는 물음에 “많다”는 짧은 답이 돌아왔다.같은 층에 있는 LG생활건강의 ‘후’ 화장품 코너엔 40대 초반의 여성 3명이 6800위안(100만2000 원)짜리 한방 영양크림 ‘환유고’를 놓고 점원과 상담하고 있다. 환유고는 수입 관세 등의 이유로 한국보다 20% 정도 비싸게 팔리지만 한 달에 15개 정도가 나간다는 게 점원의 귀띔이다. 환유고가 한국 내 60여 개 ‘후’ 매장에서 월평균 5~6개 팔리는 것보다 2배 이상 더 팔리는 셈이다.대졸 초임이 월 3000위안(45만 원) 정도인 중국에서 이 같은 소비가 어떻게 가능할까. 사회과학원 통계를 보면 수긍이 간다. 명품을 살 수 있는 중국 인구가 전체 13억 명의 13%인 1억6000만 명에 달한다. 게다가 럭셔리 소비층이 40~70세의 중노년층인 외국과 달리 중국에서는 20~40세의 소수 부유층과 외국 기업에서 일하는 화이트칼라 및 민영 기업 대표 등이 주요 소비 계층이다.이들 가운데 금융자산이 100만 달러가 넘는 자산가만 30만 명이 넘는다(메릴린치 보고서). 지난해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2200달러로 세계 100위권 밖에 있지만 백만장자(금융자산 기준)가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많은 나라가 중국이다.올림픽 이후 중국의 소비 시장은 더욱 빠른 속도로 성장할 전망이다. 중국 정부가 경제의 성장 동력을 투자와 수출에서 소비로 다원화하는 성장 방식 전환이 올림픽을 계기로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올림픽을 앞두고 베이징에 5성급 호텔과 새로운 백화점들이 속속 문을 연 것은 중국 소비 증가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다.지난해 중국 경제 성장에서 소비 부문이 기여하는 공헌도는 7년 만에 처음으로 투자 부문 공헌도를 추월했다. 마이클 다이 중국은행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올해 수출과 투자 성장세는 줄어들 수 있지만 소비는 인플레이션 상승세를 넘어설 것”이라고 분석했다. 세계은행도 “내수에 의한 성장 모멘텀이 강세를 유지해 중국 경제가 급격하게 위축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올림픽 개막 직전인 지난 7월 중국의 소매 매출은 8629억 위안(129조4350억 원)에 달했다. 전년 동기보다 23.3% 늘어난 것으로 1996년 이후 가장 높은 증가세다. 5월 21.6%, 6월 23%에 이은 것으로 소비 증가세가 꾸준히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7월 소매 매출 가운데 화장품과 금은 보석류가 전년 동기에 비해 각각 31.8%, 43.6%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올림픽이 액정표시장치(LCD) TV를 포함한 평면 TV 판매의 촉매제가 될 것(시장조사 기관 아이서플라이)’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컨설팅 회사 AVC에 따르면 올해 중국의 LCD TV 판매는 작년보다 70% 증가한 1300만 대에 이를 전망이다. 중국의 전체 TV 판매 증가율이 7~8%에 그칠 것으로 예상되는 것에 비하면 폭발적인 성장이다. 이에 따라 전체 TV 시장에서 LCD TV가 차지하는 비중도 3분의 1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올림픽으로 더 좋은 화질을 추구하게 되면서 풀 HD(고화질) TV 수요가 크게 늘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 2위 가전 양판점인 쑤닝 관계자는 “풀HD TV가 사상 처음으로 하반기에 평면 TV 시장의 50%를 넘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 카메라처럼 TV 기능이 기본 사양으로 채택된 휴대전화가 연내 주류를 이룰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물론 최근 증시와 부동산 시장의 위축이 소비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상하이종합지수는 6000을 돌파한 지난 10월 이후 60% 이상 주저앉았고 부동산 거품도 꺼져 가고 있는 추세다. 퉁지대 스젠쉰 교수는 “중국 10대 부호 중 8명, 50대 부호 중 절반이 부동산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동산 가격 하락으로 중국 부호들의 자산도 크게 줄어들 수 있다는 설명이다.그렇다고 럭셔리 제품의 소비가 급격히 감소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중국에서는 럭셔리 제품이 최상위 부유층들만의 전유물은 아니기 때문이다.월급을 모두 써버리는 웨광쭈(月光族), 부모와 함께 살면서 명품 소비를 하는 방라오쭈(傍老族), 명품을 사기 위해 소득의 40% 이상을 쓰는 쿠거우쭈(苦購族·고통스럽게 구매하는 사람들)라는 말들이 생겨나고 있는 곳이 요즘의 중국이다.중국 남부 푸저우에 있는 한 백화점은 작년 11월 하루 동안 다른 손님은 받지 않고 VIP 고객만을 받는 이벤트를 열어 9시간 만에 1000만 위안(12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 백화점 연간 매출의 6%에 해당하는 실적이다.세계 최대 명품 업체 루이비통의 4대 고객군에 중국인이 들어간 데서 중국의 높아진 구매력을 확인할 수 있다. 중국을 몽블랑의 3대 소비국, 구찌의 5대 시장, 롤스로이스의 3위 시장으로 떠오르게 한 것도 이들이다.언스트 앤드 영은 “오는 2015년을 전후해 중국의 럭셔리 소비 인구는 2억5000만 명으로 늘어 세계 럭셔리 시장의 29%를 차지, 일본에 이어 2위 럭셔리 소비 대국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해외에서 중국인들의 씀씀이도 커지고 있다. “강한 위안화가 해외여행을 촉진하고 있다”고 중국국제여행서비스의 린강 부주임은 말한다. 위안화 강세가 중국인들을 해외시장의 큰손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최근 들어 위안화 가치의 빠른 상승에 중국 정부가 제동을 걸고 나섰지만 속도 조절일 뿐 상승이 대세라는 데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올림픽으로 국가 브랜드 이미지가 높아질 것으로 기대되면서 위안화 가치 상승을 부추길 것으로 관측된다. 중국 최대 은행인 공상은행은 최근 위안화 전망 보고서를 통해 올 연말 위안화 가치가 작년 말에 비해 11% 오른 달러당 6.49위안으로,2011년 말엔 5.61위안으로 치솟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는 올 초(달러당 7.30위안)부터 4년간 23%, 고정환율제를 폐지한 2005년 7월(달러당 8.28위안) 이후부터는 32% 상승하는 것이다.강 위안화는 이미 해외 소비 시장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도쿄 아키하바라역 앞에 있는 한국계 면세점 영산의 니시야마 부사장은 “최근 1~2년 사이 중국 관광객이 늘어 주고객이 한국인에서 중국인으로 바뀌었다”며 “중국 고객 중엔 100만 엔(900만 원)어치 이상을 사는 사람도 있어 1인당 구매 금액이 한국의 2~3배 수준”이라고 전했다. 중국인 여행객이 프랑스에서 쓰는 돈은 1인당 평균 3000달러로 미국인 여행객 1000달러의 세 배에 이른다. 중국인들의 해외 쇼핑 경비는 이미 2005년에 1인당 987달러를 기록, 세계 1위를 기록했다. 쇼핑뿐만 아니다. 지난해 두바이의 인공섬을 사고 독일의 한 공항을 인수하는 등 해외 부동산도 중국인의 영향권에 들어섰다.올림픽 이후 중국 경제의 경착륙 논란이 불거지고 있지만 중국인의 두툼해진 지갑이 중국 개혁·개방 30년 동안 형성돼 온 ‘중국= 생산, 미국= 소비’라는 세계 경제의 기본 구도까지 바꿔 놓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오광진 한국경제 국제부 기자 kj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