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부자들의 별장지
본 나가노에 있는 산중 마을 가루이자와(輕井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일본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여행객이라면 가루이자와는 익히 들어봤을 것이다. 19세기 말께 도쿄에 거주하던 유럽의 선교사들이 별장을 짓고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개발된 가루이자와는 일본인들에게 휴양의 개념을 처음 인식시켜 준 문화적 사건의 시발점이라고 할 만하다. 나가노 현이라고 하면 첩첩산중의 험난한 지역이라고 생각되지만 가루이자와는 나가노 현의 초입에 있어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산세는 나가노의 그것과 닮아 있어 50분 만에 별세계의 장관이 그림같이 펼쳐진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나가노 현 남동부의 아사마산 기슭 고원지대의 조신에스 국립공원 안에 있다. 가루이자와의 중심축이 되는 아사마산은 해발 1500m에 이르는 고산으로 이 지역을 모른 채 방문한 여행객이라면 그 위용만을 보고 ‘후지산’이라고 말해 버릴지도 모른다. 필자 역시 아사마산과 정면으로 맞닥뜨린 순간 절로 “후지산이다”라고 말해버렸을 정도니까. 아니나 다를까. 필자의 감탄사를 기다렸다는 듯 택시 운전사의 웃음보가 터진다.가루이자와 지역은 도쿄에서 신칸센으로 채 1시간도 걸리지 않아 언제든 가벼운 마음으로 나설 수 있어 일본인들에게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는가 보다. 어쨌든 이곳은 시나노 철도와 국도 및 고속도로의 정비가 너무 발달돼 있어 누구라도 쉽게 찾아올 수 있다. 게다가 이곳은 일본 정·재계를 비롯해 최상류층의 별장이 경쟁적으로 들어서 있다. 가루이자와에 별장을 갖고 있다는 것은 곧 부의 상징이다. 여름 한낮의 온도가 평균 섭씨 25도를 넘지 않고 일본에 녹아 있는 서양 문화의 효시 같은 이국적인 풍경, 대자연의 파노라마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조용한 산기슭에 자리 잡은 가루이자와의 서늘한 여름 여행을 시작해 본다.도쿄역에서 출발하는 신칸센을 탄 지 고작 50여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가루이자와역에 도착했다. 가루이자와는 크게 중앙의 규(舊)가루이자와를 중심으로 기타(北)가루이자와, 나카(中)가루이자와 미나미(南)가루이자와로 구분되는데 지역에 따라 관광할 대상도 조금씩 달라진다. 선교사들에 의해 이국적인 풍경을 갖게 된 규가루이자와 지역이 아무래도 관광객이 많이 몰린다. 그 이유는 ‘규가루긴자’라고 불리는 소박한 동네에 몇 백 개에 달하는 부티크 숍과 고급 레스토랑, 자연 속의 산책로가 한데 어우러져 고풍스러우면서도 이국적 향기를 물씬 풍기기 때문이다. 신칸센이 관통하는 가루이자와 역(남쪽)에는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명품 아울렛 매장이 들어서 있는데 과연 부촌 마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로 동과 서로 구분돼 최대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신칸센을 타고 여기까지 와서 누가 아울렛을 이용할까라는 생각을 했는데 일본에서도 최고의 매출을 자랑한다고 한다. 명품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의 습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주위를 살펴보니 일반 아울렛과는 사뭇 다르게 고가의 매장들이 즐비해 있는 것을 눈치 챘다. 역시 부촌마을다운 곳이다.사실, 가루이자와라는 지역에 연고도 없는 필자가 굳이 비싼 신칸센을 타고 이곳까지 오게 된 가장 이유는 다름 아닌 ‘호시노야’라고 하는 모던 스타일의 료칸에서 투숙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의 전통 료칸이 현대적인 감성을 받아들였다면 어떤 느낌일까’라는 단 하나의 상상으로 탄생한 호시노야. 서양의 문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일본 그대로의 전통 양식과 문화적 특성인 담긴 생각만을 담아 료칸이라는 문화적 공간을 재해석한 곳이 바로 호시노야다. 이곳을 흐르는 유가와(湯川) 강가에 수놓은 듯한 자태를 뽐내며 전혀 새로운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는 일본 최고의 료칸 리조트다. 문화와 전통을 고수하되 현대인들의 편의와 스타일을 반영한 료칸의 선두주자로서 2005년 미국의 골드만삭스와 함께 추진 중인 료칸 재생 사업으로 완성한 첫 번째 프로젝트의 주인공이다.일본의 동양적 사고 위에 서양의 라이프스타일을 접목한 호시노야는 관문부터 남달랐다. 숙박 시설과 리셉션인 완전 분리돼 있어 차량은 호시노야로 들어갈 수 없고 따로 분리돼 있는 리셉션까지만 당도할 수 있다. 잠시 이곳에서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을 때쯤 전통 의복 차림의 스태프가 ‘야구라’라고 하는 몽환적인 소리를 내는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오직 한 명의 고객을 위한 서비스 차원에서 말이다. 들릴 듯 말 듯한 저음과 고음의 적절한 원시적인 음색이 이내 지쳐 있고 들떠 있던 내 심신을 편안히 가라앉혀 주었다.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을 때 스태프는 조그만 전용 차량으로 본연의 호시노야로 안내한다.그런데 가는 길이 매우 구불구불하다. 분명 직선으로 만들어도 될 길을 구불구불하게 만들어 시간이 지체된다. 이유를 물어보니 일본에서 성을 만들 때는 외세의 침략을 대비해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기 위한 방법으로 모든 길을 직선으로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을 모티브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호시노야의 모든 길은 산길과 같은 구부렁길이다.호시노야 본관은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했다. 전체적으로 전통을 표방하면서 거기에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완성했다고나 할까. 전통과 현대를 절묘하게 조화한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넘어 익살스러움이 느껴졌다. ‘미즈나미(강가) 객실’에서 흐르는 강가를 바라보고 있으면 석양 무렵 뱃사공들이 나타나 강가에 하나하나 호롱불을 놓는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호시노야의 모든 객실에는 TV가 없다. 감히 모든 숙박객의 생각을 한 획으로 치부해 버리는 건방진 처사라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메인 건물에 마련된 라이브러리 공간을 확인하는 순간 모든 의심은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그렇다. 가루이자와 즉, 호시노야는 심신과 영혼을 다스리러 온 곳이지 종일 끼고 사는 TV를 보러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다. 짧은 하루 동안이라도 세상사의 인연을 잊고 자연에 동화된 채 심신을 다스려 자연과 소통하라는 호시노야의 동양적 철학에 다시 한 번 획일화된 내 사고방식에 충격을 주는 듯했다.호시노야는 원래 1904년에 만들어진 온천장으로 103년에 걸쳐 4대 째 운영 중인 온천장이고 운영을 맡은 호시노 일가는 이 마을의 유지였다. 온천수는 알칼리성으로 류머티즘과 관절염, 그리고 피부에 효능이 있는 맑고 투명한 온천수로 예부터 치유 목적으로도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호시노야가 제아무리 료칸의 틀을 벗어던진 미래지향적인 스타일이라고 해도 료칸이라는 기본 모토는 버릴 수 없는 법이다. 전통과 현대를 어루만지는 료칸답게 온천 역시 필자의 기대감을 저버리지 않았다. 전통적인 온천장인 톰보노유는 기본에 충실한 온천장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고즈넉하고 아늑한 느낌인 반면, 유가와 강가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메디테이션 배스’라는 명상 온천장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독특한 느낌의 온천장으로 기억된다. 흡사 ‘야구라’에 가까운 원색의 멜로디는 온천수에 몸을 담가야지만 그 음색을 느낄 수 있고 몽환적인 멜로디와 사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연 채광, 그리고 야구라 이외의 소음 단절인 ‘무음’은 초현실적인 감각을 느끼기에 충분한 장소였다. 거기서 좀 더 어둠을 따라 들어가면 또 다른 명상의 공간이 나오는데 한 줄기의 빛과 무음, 그리고 내가 혼연일체가 되어 자아를 찾아가는 명상을 즐겨보라는 메시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온천장이었다.가루이자와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바로 일본 채플 결혼식의 거장 ‘브레스톤 코트’다. 하룻밤 머무른 호시노야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는 곳에 있는 이곳은 오래된 역사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한 고풍스럽고 아늑한 분위기로 뒤덮여 있어 단아하고 정갈한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1888년에 만들어진 채광에 발하는 성당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운 이곳은 전통 혼례를 하거나 일본에서 유행 중인 채플 결혼식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는 듯하다. 연간 4000쌍 이상이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특히 스톤 채플(Stone Chapel)이라고 불리는 공간은 웅장하고 화려한 디자인으로 보는 이의 머리까지 숙연하게 만든다. 돌(Stone)과 돌 사이에 유리를 배치해 점차 환해지는 빛은 신랑 신부의 교감을 의미하고 아치 모양의 천장의 돌 끝에서는 채광이 자연스레 들어와 시작하는 이들의 앞날을 축복해 주는 듯하다. 채플 결혼식인 만큼 한국과는 다르게 소수의 친인척만 참석하는 소박한 모습의 결혼식이 참 색다르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 채플 성당 옆 목사의 집 1층에는 지난 80년 동안 이 교회에서 함께한 신랑 신부와 그의 가족들 사진이 담겨 있는 것을 그대로 전시해 놓아 오랜 세월의 행복감이 무심코 방문한 나에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져오는 듯하다.또한 결혼을 마치고 각자의 터전으로 돌아가 그들이 매년 성장하는 자신들과 그들의 아이를 데리고 와 추억을 만든다. 결국 추억은 또 다른 추억을 낳는 법이다. 나이가 들어 가족과 함께 이 공간을 다시 찾는다고 생각해 보자. 브레스톤 코트라는 공간의 위대함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결혼식의 짧은 순간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인연의 굴레를 끊임없이 제공함으로써 세대를 아우르는 성당 서비스는 순간을 영원처럼 간직하는 일본인의 섬세함 그 자체다. 3박 4일 동안의 서늘한 여름의 가루이자와를 느끼고 돌아서는데 호시노야의 총지배인이 잠시 나를 붙잡고 슬며시 물어본다. “가루이자와, 참 시원하죠?” 지배인의 말 속에 담겨 있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본다.글·사진 전광용 여행 칼럼니스트·이오스 여행사(www.ios.co.kr) 대표©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