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후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잔. 박성민(41)의 아이스 캡슐(Ice Capsule) 시리즈를 본 첫인상은 딱 이런 느낌이었다. 무더운 날씨에 체감온도를 떨어뜨려 주는 그의 작품을 보며 임의로 ‘여름 화가’라는 별칭을 붙인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런 감성적인 느낌에 뒤이어 얼음 큐빅 안에 갇힌 딸기, 덩굴 식물 등을 바라보다 보면 자연스레 작업 방식을 따져 묻게 된다. 실물 같은 소재는 대상을 얼린 후 보고 그린 것일까.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그렸지만 사진인지 그림인지 분간되지 않을 정도로 감쪽같지는 않고 회화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챌 수 있다.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후 미술학원 강사와 미술학원 운영자로 8년 가까이 보낸 그는 33세에 홍익대 미술대 회화과에 편입, 다시 늦깎이 대학생이 돼 같은 학교에서 대학원까지 마쳤다. 신사임당미술대전 대상, 동아 미술상, 대한민국미술대전 대상 등에서 역량을 인정받고, 한국현대미술제(KCAF), 한국국제아트페어(KIAF) 등에서 미술 애호가들에게 선호되는 아이스 캡슐 시리즈는 대학 4학년 때인 2002년에 탄생해 이제는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작품이다.“전공을 살려서 그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잖아요. 미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서는 경우는 소수에 불과하고 전공과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죠. 그나마 미술의 끈과 연결된 것이 미대 입학을 위한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인데, 저도 대학 때부터 학원 강사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연스레 그쪽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러다가 ‘나이 들어서는 그림을 그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디자인은 회사에 취직을 하지 않으면 크게 효용이 닿지 않고 취미 생활로 즐길 수 없거든요.”막상 입학 합격증을 받고 나니 결혼을 해서 아이도 있는데, 늦은 나이에 다시 대학을 다니겠다는 것이 옳은 선택인지 잠시 갈등했던 것이 사실. 미대라는 특수성 때문에 그보다 나이가 많은 신입생도 있는 것을 보고 위안을 삼기도 했지만 10년 이상 터울이 지는 학생들과의 세대 차이는 생경하기 그지없었다. 공강 시간이면 당구장으로 직행했던 85학번과 PC방에서 스타크래프트를 하는 98학번들과는 갭이 있을 수밖에….“회화라고 하면 풍경화, 추상화를 그리는 작업이라고 생각했는데 수업에 들어가 보니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다르더군요. 그림을 그리겠다는 생각뿐이었지 캔버스 당기는 법도 몰라서 일일이 물어보며 배워야 했어요. 미대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경험도 있으니 나름대로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또 다른 세상이었던 거죠. 처음에는 갈피를 잡지 못했어요. 당시에는 추상과 비구상이 유행이어서 학생들도 대개 그런 작업을 했고 저도 덩달아 그런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제게는 추상화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더라고요. 남들이 시도하지 않은 소재로 나만의 개성이 담긴 것을 그려보자는 생각을 하던 중 얼음이 눈에 들어왔고, 아이스 캡슐의 초기작이 완성된 거죠. 그런데 졸업할 때 교수님이 제 그림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예전 작업이 더 좋은 것 같은데…’라고 하시더라고요.”박성민은 자신의 작품을 ‘극사실 기법을 바탕으로 한 비구상’이라고 규정한다. 특정 대상을 보고 사실주의 기법에 충실해 그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에는 실제로 얼음을 얼려서 그대로 보고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원하는 형태로 제대로 얼려질리 만무했고, 형태의 한계뿐만 아니라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하는 데에도 제약이 많았다. 작업실에 있는 얼음 사진, 딸기 사진, 식물 사진 등은 실제의 질감과 형태를 차용하기 위한 보조적 수단에 불과하고 화면에 완성된 모습은 그가 상상해 그린 이미지인 것이다. 초기의 아이스 캡슐 시리즈(그의 작품명은 모두 ‘Ice Capsule’이다)와 달리 몇 년 전부터 그림 속에 등장한 도자기 또한 마찬가지. 담백하고 소박한 조선백자, 청화백자, 철화백자 등은 실물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기존의 도자기를 참고해 고안한 문양을 그려 넣는 식으로 완성된다. 이쯤 되면 ‘사실주의 화가’라고 칭해지는 것에 반론을 제기하는 작가의 말에 수긍이 갈 것이다.“작업이라는 것은 작가와 관객과의 대화, 공감대가 형성되도록 말을 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얼음 속에서 뚫고 나오는 생명체처럼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에게만 고통이 크다고 생각하지만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살 수 있는 재벌이든 항상 웃고 유쾌해 보이는 코미디언이든 저마다 다른 짐을 지고 있게 마련이죠. 그렇지만 아이스 캡슐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림은 작가가 50% 완성하고 나머지 50%는 관객이 완성한다’는 평론가의 말처럼 미술은 주관적 판단에 근거해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굳이 내 작품이 이렇다고 설명하지 않고 목소리를 낮춰 말하고 호기심을 유발하는 것이 작가의 몫이죠. 그 다음은 보는 이의 몫이고요.”그의 그림을 보고 실물 같다는 생각은 들지언정 사진인지 회화인지 헷갈려서 가까이 다가가 확인하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정교하게 작업을 해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만 작가는 오히려 회화의 느낌을 살려 사진과 그림의 경계선쯤에 놓이도록 한다. 또한 작품의 배경은 증명사진을 찍을 때처럼 흰색으로 하는데, 어떤 사람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배경색인 만큼 자신의 이야기를 더 돋보이게 하고 싶어서라고 한다.“굳이 거창하게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단지 도자기에 그려진 문양이 예뻐서, 딸기가 좋아서 제 그림에 다가와도 상관없습니다. 1분이든 2분이든 화면을 바라보고 난 이들에게 좋은 여운을 남길 수 있다면 하는 생각입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면서 작업하는 현대 작가로서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둠, 암울, 절망 같은 감정보다는 제 그림을 보고 긍정의 힘을 읽어내고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죠. 산업 현장에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신기술을 개발하는 것도 아닌 작가가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은 문화적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일 테니까요.”7년여간 얼음을 고수하는 그를 보고 “얼음 색상을 한 번 바꿔보지”, “식물이나 과일 말고 사람이나 새도 한 번 넣어보지”, “아직도 얼음 그려”라고 말하는 이도 많다고 한다. 우선 얼음에 색상을 입히는 것은 그도 시도해 보았지만 느낌이 잘 표현되지 않아 본래의 고유 색상을 유지할 생각이라고 한다. 동물을 소재로 하는 것도 사실 미꾸라지를 넣고 그린 적이 있는데, 살아 있는 생물로 실험해 보니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영구 보류 상태다.얼음에 대한 그의 애착과 집착은 쉽사리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얼음만큼 다양하게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는 소재를 아직 찾지 못했는데,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단다. 요컨대 작가로서 그림을 그리는 동안 얼음과 내내 함께하겠다는 그의 다짐에 끊임없이 펼쳐질 아이스 캡슐 변주곡이 기대된다.글 정지현 미술전문 칼럼니스트·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