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맞은 오빠부대를 몰고 다니는 몇 안 되는 클래식 스타 임동혁. 2001년 12월, 롱 티보 국제 콩쿠르 최연소 1위를 시작으로 퀸 엘리자베스, 쇼팽, 차이콥스키 등 세계 3대 콩쿠르 수상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며 ‘클래식 음악계의 오빠부대’를 양산했다. 그를 사랑하지만 소녀 팬들의 과도한 애정표현에 질려 그의 연주회를 섣불리 찾지 못하는 ‘성인 팬’이 있을 정도. 하지만 시간이 흘러 소녀 팬은 조금 점잖아졌고 그 역시 부쩍 성숙해진 모습이다. 리처드 용재오닐 등 여섯 명의 청년 음악가가 함께하는 실내악 프로젝트 ‘디토’의 공연과 그의 3집 앨범 홍보를 위해 귀국한 임동혁을 코엑스 야마하 홀에서 만났다.어디 황금손이 어떤지 좀 볼까. 인터뷰 중간 중간에 습관처럼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그의 손을 슬쩍 보았다. 가늘고 여리며 하얀 손. 말 그대로 섬섬옥수. 이 말을 여자한테만 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손은 건반 위를 자유자재로 미끄러지며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냈다. 손이 공기처럼 가벼워 보였다. ‘무아지경에 빠진 그의 손은 건반 위에서 날아다니는 듯 잘 보이지 않았다’는 어느 관객의 말이 새삼 실감나는 순간이다.그는 얼마 전 출시한 3집 앨범을 통해 바흐와 만났다. 이 앨범을 위해 그는 항상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던 우아하고 화려했던 쇼팽을 잠시 접고 바흐에 푹 파묻혔다. 그가 이번에 연주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모든 피아니스트들이 정복하고 싶어 하지만, 쉽게 도전하지 못하는 ‘에베레스트 산’과 같은 곡이다. 혹자는 이 곡을 가리켜 ‘공포’라 칭하고, 누군가는 ‘탁월한 불면증 치료제’라고 한다. 그만큼 연주하기 힘들고 아주 ‘기인(긴)’ 곡이다.이 곡을 연주해서인지, 어느덧 20대 중반이 되어서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좀 변한 모습이다. 10대 후반의 반항아적인 이미지를 벗고 음악 앞에 조금 더 진지해지고 겸손해진 느낌이랄까.“앨범을 통해 음악과 다시 친해지려 하는 중이죠. 4년 만에 내는 앨범이라 설레고 기대감 크고, 어려운 곡을 해내서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번 음반이 많이 팔렸으면 좋겠어요. 클래식은 음원 다운로드 시장이 크지 않잖아요.”순간, 임동혁도 음반 판매에 신경 쓰는구나 싶었다. “당연하죠. 유럽 무대에서 미국으로 옮기고 재출발하면서 10배 이상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동안의 내 모든 것을 바꾸고 좀 더 현실적이 됐다고나 할까. 예전에는 음악을 생계 수단으로 여기지 않았거든요. 이젠 조금 더 절박해지고, 조금 더 약아졌다고 생각해요. 마냥 순수하기엔 그동안의 마음고생이 컸기 때문이겠죠.”그에게 슬럼프는 2005년의 쇼팽 콩쿠르가 끝나고 찾아왔다. 그는 2003년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편파 판정에 불복해 수상을 거부하며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클래식계에 핫이슈를 몰고 온 바 있다. 그에게 서양인들의 편견은 받아들이기 힘든 난제였다. 그는 지금도 그때의 판정 불복에 대해 ‘당연한 일’이라고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그 후 그는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던 쇼팽 콩쿠르에서 3위를 수상했고, 2007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1위 없는 공동 4위를 수상하며 의심의 시선들을 모두 거둬냈다. 누가 보기에도 행복의 단꿈에 젖어 있었을 것만 같았던 바로 그 시기에 그는 슬럼프에 빠져 있었다.“쇼팽 콩쿠르가 끝나고 굉장히 자유로운 나날을 보냈던 거 같아요. 친구들과도 마음껏 어울리고 평소 해보고 싶은 걸 다 해봤죠. 그래서 연습을 못했어요. 활동 면에서 침체기에 빠진 거죠. 그 시기의 저는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모든 연주 제의를 거절하기 바빴어요.”쏟아지는 찬사와 갈채에 그는 좀 해이해졌었는지도 모른다. 황금손이라는 칭찬에 대해 의견을 구하자 그는 대답한다. “제가 재능을 타고난 것은 맞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어린 마음에 쉽게 되니까 노력을 안 하게 됐던 것 같아요. 이제 웃는 자는 결국 노력하는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됐죠.”그의 커리어를 성공으로 이끈 한 사람을 꼽자면, 단연 마르타 아르헤리치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임동혁을 후원했다. 그의 인상적인 연주를 지켜본 아르헤리치는 라 로크 당테롱 페스티벌, 베르비에 페스티벌 등에 임동혁을 초청했으며 EMI클래식의 ‘젊은 피아니스트’ 시리즈에 그를 적극 추천했다. 그녀의 추천으로 출시한 음반으로 임동혁은 ‘황금 디아파종 상’을 수상했고, 2집으로 프랑스의 ‘쇼크 상’을 수상하며 명실 공히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서의 발판을 마련했다.“아르헤리치와의 인연은 1999년에 페스티벌에 초대받으면서부터 시작됐어요. 사실상 그분에 의해 제 커리어가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죠. 서로 바쁘다 보니 연락을 하지 않은 지 4년 정도 됐어요. 참, 두 달 전 뉴욕 연주회 때 뵙긴 뵈었죠.”인생에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사람을 묻자, 부모님이라고 말하는 그. 그러다가도 여자 친구에게서 큰 영향을 받는단다. 여자 친구가 있느냐고 묻자, 너무 많다고도 한다. “원래 이 나이 때는 자주 바뀌는 거니까”라는 재치 있는 대답이 돌아온다. 실제로 그에겐 여자 친구들이 많다. 그럴 법도 한 것이, 그가 웃을 때 양 볼을 파고드는 ‘살인’ 보조개와 천진난만한 눈웃음은 상대를 무장해제하게 만든다. 디토를 하면서 좋은 점을 묻자 “평소에 남자 친구들이 별로 없었는데, 남자 친구들이 많이 생기고 함께 연주해서 좋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솔직함도 매력이다.디토의 멤버인 리처드 용재오닐에게서도 많은 걸 배운다. “용재오닐은 생활에서의 롤모델이죠. 그는 바른생활 사나이거든요. 친구들끼리 신나게 놀다가도 10시만 되면 집에 가요. 자기 관리에 철저한 모습을 본받고 싶어요. 전 친구들과 어울리며 술 마시는 걸 좋아하는데, 아마도 그것만 고치면 지금보다 더 크게 될 거예요.” 주량을 묻자 최근 소주에서 백세주로 바꿨고 5병 정도라고 어림잡아 이야기한다.“러시아, 독일 등 유럽에서 주로 활동하면서 미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죠. 세계의 중심으로 가고 싶었어요. 유럽에 너무 오래 있었고 그곳의 장점은 모두 흡수했다고 여겼기 때문이죠. 유럽에서의 슬럼프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동기부여가 필요하기도 했고요.”그의 뉴욕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는 현재 줄리아드에서 엠마누엘 액스를 사사하고 있다. “유럽의 편견에 넌더리가 났지만 미국에도 편견이 없진 않더군요. 워낙 유태인 사회가 크니까. 하지만 좀 더 공정했어요. 그 점이 마음에 들었죠.”원하던 미국 뉴욕에 왔지만 그가 견디기 힘든 게 생겼다. 혼자 있는 걸 싫어하는 것 이상으로 못 견뎌하는 그이기에 외로움은 최대의 적이 됐다. 그래서 혼자 있을 땐 주로 자는 편이지만 잠조차 오지 않을 땐 전화기를 붙들고 폰 북을 훑어내려 가며 통화를 시도해 본다. “꼭 제가 전화할 때만 친구들은 모두 바쁘더군요. 그러다 최후에 선택하는 게 바로 친형이죠.(웃음)”임동혁이 7세에 피아노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형이 시작해서’였다. 그의 친형인 피아니스트 임동민은 국제 청소년 쇼팽 콩쿠르에서 임동혁이 2위에 입상했을 때 1위를 거머쥐었을 정도로 실력파다. 두 사람은 처음에 형제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형인 임동민은 지금 임동혁이 거주하는 뉴욕의 같은 빌딩의 다른 층에서 지내는 중. 외로우면서 왜 형과 함께 살지 않느냐는 질문은 정해진 수순이다. “같이 살았을 때 서로 피아노 치는 소리 때문에 힘든 적이 있어요. 형은 음악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았고 난 음악 외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았죠. 지금은 따로 살기 때문에 신경 안 써도 돼서 좋아요. 우린 서로 자기만의 은신처가 필요한 것 같아요.”“지금 한국의 클래식 상황은 좀 힘들어요. 클래식은 따분하고 재미없다는 사람들의 고정관념과 편견은 한국 클래식의 한계를 만들어버리죠. 그런 고정관념이 뿌리내리기 전인 젊은이들에게 클래식을 알리자는 게 디토의 목적이에요. 바로 ‘클래식의 대중화’를 꿈꾸는 거죠.”그래도 임동혁은 정통 클래식 연주자로 남고 싶다. 그는 클래식과 대중화라는 논제에 ‘아직 이르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클래식 연주자들이 상업적으로 가는 것도 좋고 반대하지 않아요. 하지만 저에겐 시기상조라고 봐요. 제가 상업적인 클래식을 하는 그날은 아마도 두 가지 중 하나가 아닐까요. 이미 엄청나게 큰 업적을 세우거나 아니면 잘 안돼서 딴 쪽으로라도 탈출구를 찾아야 할 때. 아직까지 마르타 아르헤리치나 사라 장이 그런 앨범을 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으니까요.”글 김지연·사진 이승재 기자 jykim@moneyr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