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펀드는 진화한다
나은행 자산관리센터 박근훈 금융상품개발팀장은 최근 사모 투자 유치에 나섰다가 깜짝 놀랐다. 중국의 한 시중은행 부실 채권(NPL)에 투자하는 사모 펀드 참여를 자산관리센터 고객들에게 타진했더니 순식간에 29명인 정원을 넘어선 것. 박 팀장은 “중국 경제 상황이 여의치 않아 조심스러운 입장이었으나 현지에서 실사를 진행한 법무법인과 중국 은행까지 참여한다는 얘기에 고객들이 높은 관심을 보였다”며 “펀드와 주식시장이 큰 재미를 안겨주지 못하는 상황이 길어지면서 대안 투자처를 찾는 자산가들이 다시 늘고 있는 것 같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하나은행은 국내 프라이빗뱅크(PB) 및 웰스매니지먼트(WM)센터 가운데 처음으로 110억 원 규모의 중국 NPL 사모 펀드를 성공적으로 모집, 현지 투자를 진행 중이다.30명 미만으로 구성할 수 있는 사모 펀드는 총투자 규모에 따라 1인당 투자액에 편차가 있다. 하나은행의 중국 NPL의 경우 1인당 평균 투자액은 3억5000만 원 내외다.펀드 유형도 최근에는 가장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사모 주가연계증권(ELS)에서 중국 NPL, 중고 비행기 구매 등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는 추세다. 펀드가 고수익을 안겨 주던 지난해까지는 굳이 사모 펀드가 아니더라도 큰 고민 없이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었지만 부동산에 이어 주식까지 약세로 돌아서자 부자 고객들이 새로운 투자처를 찾아 사모 펀드 투자에 적극 나서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정 우리투자증권 PB상품 개발팀장은 “저금리와 펀드 수익률 하락으로 대안 투자 수단을 찾는 고객들이 부쩍 늘고 있다”며 “은행 금리 대비 2∼3배 수준이 통상적이나 일부 초과 수익 기대 심리를 갖고 있는 고객은 비상장사의 전환사채(CB)와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할인된 가격에 사들이는 등 리스크가 보다 큰 투자도 한다”고 말했다.최근 10억 원 이상을 운용하는 개인 큰손들이 가장 선호하는 투자처로는 사모 ELS가 꼽힌다. 10억 원 이상이면 고객이 원하는 포트폴리오로 상품 구성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직접 상품 구조를 설계해 증권사에 제의하기도 한다. 사모 ELS는 대부분 원금 보장형이라 손실 가능성이 낮고 설계 구조에 따라서는 주가가 하락하더라도 수익을 올릴 수 있어 투자 자금을 단기에 운용하기에 적합하다. 조기 상환 시 수익률도 은행 금리 대비 2배 수준을 넘어 일반 펀드에서 일시적으로 자금을 빼낸 큰손 투자자들에게 인기다. 실제 최근 ELS 상품 2000호를 돌파한 우리투자증권은 발행 ELS 가운데 75%가 조기 상환됐으며 평균 조기 상환 수익률은 11.77%를 기록했다.조원철 하나은행 WM센터 투자전략팀장은 “주식시장이 조정을 받은 3월부터 사모 ELS에 대한 선호가 다시 높아졌다”며 “턴어라운드 이후 펀드로 갈아타려는 고객 가운데 변동성 확대로 판단이 어려워지자 한 차례 더 ELS 상품으로 롤 오버한 뒤 시장을 관망하는 투자자들이 많다”고 전했다.거액 자산가들의 리스크 회피 성향이 강화되는 가운데 PB 고객들의 투자 패턴에도 변화 추세가 감지되고 있다. 해외 펀드에서 국내 펀드로, 장기 투자에서 단기 투자로, 간접 투자에서 직접 투자로 이동하는 경향이 강화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김주영 대우증권 WM센터 팀장은 “예전에는 비과세 혜택 때문에 해외 펀드에 주로 투자했지만 환차익에 대한 과세가 강화되고 변동성이 커지면서 해외 펀드를 줄이고 모멘텀 효과가 기대되는 국내 펀드 비중을 늘려가는 추세”라며 “특히 최근 국내 시장의 주가수익률(PER)이 크게 떨어져 저가 매력이 높아졌다는 판단에 따라 직접 투자에 나서는 고객들도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고객들의 대안 투자처에 대한 욕구가 다양화되면서 기업 인수·합병(M&A) 사모 펀드도 주목을 받고 있다. 리스크는 상대적으로 크지만 성공 시 큰 수익률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A은행 PB센터는 최근 M&A를 위해 자금이 필요한 B업체에 사모 형태로 투자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 중이다. 요란한 코스닥 상장사보다는 비상장이지만 사업 기반이 탄탄한 업체가 주요 타깃이다. 이 은행 관계자는 “M&A 성격상 딜이 종료되기 전에는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 없지만 고위험을 무릅쓰고 M&A 사모 펀드에 투자하려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귀띔했다. 또 일부에서는 중동 러시아 등 자원 부국 펀드에 투자하는 펀드 오브 펀즈 형태의 헤지 펀드도 준비하고 있다. 글로벌 증시 조정이 길어질 경우 거액 자산가들의 사모 펀드에 대한 수요가 더욱 늘어날 것이란 전망에서다.선박 부동산 등의 특별 자산에 투자하는 사모 특별 자산 펀드도 전년에 비해 큰 폭으로 늘고 있는 가운데 이색 펀드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자산운용협회에 따르면 6월 말 현재 올 들어 설정된 사모 특별 자산 펀드는 총 81개, 1조4044억 원 규모에 달한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27개(9369)에 비해 50% 이상 늘어난 규모다. 소수의 개인 및 기관투자가들로 구성된 사모 펀드는 이전에는 부동산 선박 등 투자 분야가 한정됐으나 최근에는 와인 농산물 고춧가루 비행기 등 이색 분야까지 전방위로 확대되고 있다. 유리자산운용은 최근 태국에서 170인 승용 보잉767-200 기종 중고 비행기를 사들였다. 구입가 180억 원 가운데 50%는 캐피털 회사가 투자하고 나머지는 지난 4월 90억 원 규모로 설정된 ‘유리스카이블루 사모특별자산1’ 펀드가 지원했다. 이 비행기는 리모델링을 거친 뒤 오는 8월 태국 항공사에 임대돼 태국과 중국 노선에 투입될 예정이다. 유리자산운용 관계자는 “동남아 관광객이 늘면서 항공기 수요도 급증하고 있어 투자를 결정했다”며 “연간 10.9%의 쿠폰을 3개월 단위로 지급하고 원금도 6개월 거치 후 분할 상환되기 때문에 투자자 입장에서는 안정적 수익과 함께 투자 자금을 조기에 회수할 수 있는 매력이 있다”고 설명했다.대신투신운용은 브로드웨이42번가 뮤지컬에 투자하는 뮤지컬 펀드를 선보였고, CJ투신운용은 CJ베리타스 사모SI지적재산권특별자산을 내놓았다. 미래에엣자산운용의 ‘마이 사모심마니장뇌삼 특별자산1’은 연 11%의 수익을 기대하고 있다. 선박 운임이 사상 최고 수준으로 급등하면서 선박에 투자하는 사모 펀드의 인기도 여전하다. 지난 5월에만 4개나 신설됐다. 철광석과 석탄 등을 실어 나르는 대형 운반선(18만 톤급 내외)의 하루 용선료는 6월 초 23만3988달러로 연초 대비 3배가 뛰었고 2004년에 비해서는 무려 800%가 급등했다. 글로벌 원자재 물동량 증가로 용선료 가격이 끝없이 오르고 있어 이를 겨냥한 선박 펀드의 인기도 식을 줄 모르고 있다.한정 우리투자증권 팀장은 “올 들어 펀드 주식시장의 변동성으로 PB 고객들의 기대 수익률 눈높이도 크게 낮아졌으나 사모 펀드 등이 대체 상품으로 수익률을 만회하면서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하려는 투자자가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김형호 기자 chsan@hankyung.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