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해서웨이 주총은 5월 2일 보세임이란 고급 보석 가게에서 전야제를 시작으로 막을 올렸다. 전야제라고 해봐야 별것 없다. 칵테일 파티다. 그것도 긴 줄을 서서 1시간 남짓 기다려야 겨우 음식 몇 점과 칵테일 한 잔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도 한 주에 1억3000만 원이 넘는 주식을 가진 주주들은 즐거운 표정으로 줄을 선다. 전야제 장소는 발 디딜 틈이 없다. 임시 천막에도 주주들로 인산인해다. 그들은 무엇이 즐거운지 웃고 떠들어 댄다. 별다른 행사가 없는데도 같은 주주라는 것에 무한한 공감대와 동지애를 느끼는 행사가 전야제다.마침 올해는 전야제 직전 벅셔해서웨이의 1분기 실적이 발표됐다. 1분기 순익은 9억4000만 달러.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64% 줄었다. 미실현 파생상품 손실도 17억 달러에 달했다. 천하의 버핏이지만 경기 침체의 골을 피해가기는 어렵다는 방증이다.주주들로선 우울할 법도 하지만 실제는 아니다. 버핏이 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는다는 분위기다. “당장 팔 것도 아닌데 1분기 실적에 연연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에서부터 “버핏이 내일 주총에서 설명해 주겠지”까지. 시시콜콜 따지겠다는 게 아니라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는 반응이 주류다.오히려 이들이 염려하는 것은 버핏의 건강이다. 나이가 77세인만큼 매년 불안한 것은 사실이다. 버핏이 없는 벅셔해서웨이는 생각할 수도 없다는 게 대부분 주주들의 반응이다. “버핏이 죽는 순간이 벅셔해서웨이의 주식을 매도하는 시기”라는 주주도 상당수다.그러다 보니 매년 주총에서 최대 관심사항은 버핏이 은퇴하느냐 여부와 후계자가 누가 되느냐 여부다. 버핏도 이런 분위기를 감안해 매년 “죽을 때까지 은퇴는 없다”거나, “자신이 죽은 직후 최고경영자(CEO)나 최고운용책임자(CIO)를 즉시 선임할 준비를 갖춰 놓았다”고 주주들을 안심시킨다. 그래도 주주들은 버핏이 없다는 가정 자체를 싫어한다. 발 디딜 틈 없이 전야제 장소를 가득 채운 주주들로부터 ‘만수무강’을 기원 받는 버핏은 ‘버핏식 자본주의’의 ‘교주’였다.5월 3일 새벽 5시. 주총이 열리는 오마하 실내 체육관인 퀘스트센터의 문은 7시에 열리는데도 벌써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제법 쌀쌀한 날씨. 외투를 잔뜩 끼어 입은 주주들은 마냥 즐거운 표정이다. 버스들은 주주들을 실어 나르고.오전 6시 30분. 드디어 버핏이 주총장 바로 옆에 자리 잡은 전시장(오마하 컨벤션센터)에 모습을 나타냈다. 아직 일반 주주는 없고 기자들만 한 무리 가득하다. 전시장은 가이코(보험사), 데어리 퀸(아이스크림), 저스틴 브랜즈(가죽 신발), 네브래스카 퍼니처 마트(가구), 시스 캔디(사탕), 쇼 인더스트리(카펫) 등 소비재를 중심으로 한 벅셔해서웨이의 자회사 32개가 상품을 판매하는 곳. 상품 홍보도 하고 즉석에서 판매도 하는 자리다.버핏은 100여 명이 넘는 기자들을 대동하고 일일이 계열사 부스를 찾아 다녔다. 데어리 퀸 전시장에서는 아이스크림을 시식하고 자신이 즐기는 우크렐레(기타 모양의 하와이 현악기)를 연주하며 미국 포크송인 ‘당신은 나의 태양(You are my sunshine)’의 한 대목을 불러 흥을 북돋우기도 했다. 오전 7시. 주주들이 몰려오자 함께 어울려 사진을 찍고 각종 기념물 앞에서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이렇게 찍힌 사진은 외신들을 타고 전 세계 매체로 전해졌다. 그 뒤에는 벅셔해서웨이가 운영하는 자회사의 로고가 큼지막하게 찍혀 있음은 물론이다. 버핏이 ‘투자의 귀재’만이 아닌 76개의 자회사를 거느린 ‘거대 재벌’의 CEO임을 느끼는 순간이다.오전 8시 30분. 드디어 공식 주주총회가 시작됐다. 관례에 따라 1시간짜리 영상물이 상영됐다. 올해 제목은 ‘마지막 웃음(Last Laugh)’. 어째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주인공도 버핏이 아니다. 찰스 멍거 부회장이다. 멍거 부회장이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고 버핏 회장이 선거대책위원장,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이 기술담당 고문을 맡는다는 내용의 만화영화가 상영됐다.‘이거 버핏이 은퇴하는 것 아냐’는 생각이 드는 순간. 만화영화 속의 멍거 부회장은 지구 온난화 대책을 묻는 질문에 “모든 사람들이 ‘데어리 퀸(벅셔해서웨이 자회사)’의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추워져서)온난화는 저절로 해결된다”고 말해 주총장을 폭소로 몰아넣는다. 또 국민들이 재정적 곤란에 처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물음에 “아메리칸익스프레스(벅셔해서웨이 투자회사) 없이 집을 나서지 말라”고 익살을 떨었다. 결국은 벅셔해서웨이 자회사를 광고하는 동영상이다.동영상이 끝난 오전 9시 39시 30분. 단상에 멍거 부회장이 홀로 나타난다. 이어서 “버핏 회장이 벅셔해서웨이를 떠나기로 했으며 미모의 드라마 주인공인 수전 루치와 직업을 바꾸기로 계약을 했다”는 긴급 보도가 흘러 나왔다. 수전이 멍거 부회장 옆에 등장해 “신임 회장으로서 배당률을 높이겠다”고 공언하는 순간 버핏이 나타나 수전과의 계약서를 찢어 버린다. 그리곤 말한다. “나는 벅셔해서웨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주주들에게는 안도의 순간, 기자들에게는 버핏의 벅셔해서웨이에 대한 사랑이 진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익살스러운 연기를 통해 그 자신이 벅셔해서웨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킨 셈이다.이윽고 장장 6시간에 걸친 주주들과의 일문일답 시간. 한 주주가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버핏은 대뜸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시스캔디(벅셔해서웨이 자회사)의 사탕을 집어 들고 “바로 이것”이라고 답해 폭소를 자아냈다. 이윽고 코카콜라(벅셔해서웨이 투자회사)를 집어 들고 “이것도 비결”이라고 덧붙인다.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비결”이라는 설명이 곁들여졌지만 시스캔디와 코카콜라는 참석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농담을 통해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의 상품을 홍보한 것이다.따지고 보면 버핏은 ‘재벌 총수’다. 벅셔해서웨이가 100% 지분을 소유해 직접 경영하는 자회사만 76개에 달한다. 종업원 23만 명에 매출액 2731억 달러(작년 기준)다. 삼성전자(자회사 포함 980억 달러)의 3배에 육박한다. 보험사 신발회사 철도회사 캔디회사 건설회사 등 없는 게 없다. 완전 문어발이다.자회사 대부분은 실적이 좋다. 작년 순이익은 132억 달러로 전년보다 20%나 늘었다. 물론 특유의 변별력으로 좋은 기업을 사들인 것이 비결이다. 그리고 이런 그룹을 직접 이끌고 있는 CEO 버핏의 능력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는 주총 내내 상품을 홍보하면서 ‘경영의 귀재’ 버핏을 유감없이 보여줬다.6시간에 걸친 주주들과의 일문일답 시간은 말 그대로 ‘투자 토크쇼’다. 77세의 버핏과 84세의 멍거 부회장이 펼치는 토크쇼의 메뉴엔 없는 게 없다. 단골 질문은 역시 ‘투자의 비결’이다. 올 주총에서도 질문에 나선 80여 명 중 절반 가까이가 투자의 비법에 대해 물었다. “처음 투자에 나서게 된 계기가 무엇이냐” “초보자는 어떻게 어디에 투자해야 하느냐” “포트폴리오를 어떻게 가져가면 좋으냐”에서부터 “독일의 가족 기업을 인수할 의향은 있느냐” “아시아 증시에 투자할 의향은 없는가” 등등. 투자에 관한 모든 것이 질문으로 쏟아졌다.버핏과 멍거는 이런 질문에 특유의 위트와 농담을 섞어가면서 대답했다. 한국 증시에 대한 투자 경험 등 그동안의 경험도 곁들여졌다. 주주들로서는 두 노인네가 이끄는 ‘투맨 쇼’에 점점 더 몰입할 수밖에.이 중 올 주총에서 버핏이 힘줘 강조한 것은 역발상 투자. 버핏은 “위기는 기회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지난 1998년 ‘롱텀캐피털 사태’에서 보듯이 큰 위기에 큰 기회가 온다”며 “이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돈을 많이 벌 수 있는지 여부가 결정된다”고 답했다. 그는 특히 “큰 기회가 왔는데도 대부분 사람들은 기회인 줄도 모르고 흘려보내곤 한다”며 “매우 조그만 이슈에 대해서도 끈질기게 파고들어 열심히 노력하면 큰 기회를 발견하게 된다”고 소개했다.벅셔해서웨이가 작년 말 진출한 채권보증업의 경우도 위기를 기회로 활용한 대표적인 경우라고 버핏은 서슴없이 예로 들었다. 멍거는 “이 기회를 잡는 것은 흘러가는 시냇물에서 1주일에 한 번 작살로 물고기를 낚는 것만큼 순간”이라고 거들었다.버핏은 “상당수 시장 참가자들이 신용 위기가 정점을 지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들이 하는 일은 그저 지켜보는 것뿐”이라는 말도 했다. 모두가 기회다고 생각하며 달려드는 순간은 오히려 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지금은 한발 물러서 있다는 설명이다. 버핏은 주총 직전 “모든 사람이 공포에 빠질 때는 탐욕을 느껴야 하고 대부분 사람들이 탐욕에 빠졌을 때는 공포를 느껴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과 반대로 해야만 기회를 얻을 수 있고 그 기회에서 돈을 벌 수 있다는 얘기다.그렇다고 남들이 공포를 느낄 때 무턱대고 지르고 나서는 강심장은 없을 터. 문제는 어떻게 기회를 포착하고 어떻게 두둑한 배짱을 발휘하는지 여부다. 버핏은 그 비결로 공부를 꼽았다. “경제 움직임, 산업 움직임, 자기가 염두에 두고 있는 기업의 움직임을 알 수 있도록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는 것. 실제 버핏은 틈만 나면 개별 기업의 재무제표 읽는 것을 즐길 정도로 공부가 생활화돼 있다. 오죽했으면 멍거 부회장이 “버핏은 에버 러닝 머신(Ever Learning Machine)”이라고 했을까.결국 미리미리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에게 기회는 오고, 그 기회를 잡아 잘 활용하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얘기다. 어디서 많이 듣던 평범한 얘기다. 그렇지만 경기 침체로 침울하기 짝이 없는 시기에 버핏이 던진 ‘역발상 투자 전략’은 과연 ‘투자의 귀재’다운 화두였다.장장 6시간에 걸쳐 질문에 나선 주주들의 관심사는 참 다양하다. ‘어떻게 저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라는 의아심이 들 정도로 질문의 범위도 넓다. 투자 전략뿐만 아니라 숫제 인생 상담까지 하러 온 사람도 많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꼬마 주주들의 질문은 이랬다. “프로야구단인 시카고컵스를 인수할 생각은 없습니까”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을 어디에서 배워야 하나요” “벅셔해서웨이는 돈을 많이 벌면서 왜 배당을 하지 않나요” 등등.어른 주주들의 질문은 오히려 더 했다. “대통령이 된다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신을 믿습니까” “부부간 재산 관리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석탄 산업은 어떻게 될 것으로 보십니까”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재정적으로 독립시킬 수 있을까요” “코카콜라로 하여금 베이징 올림픽 후원을 철회하도록 하는 것에 어떻게 생각합니까” “석유가 고갈되면 어떡하지요” “대통령으로 누구를 지지합니까” 등등.하기는 세계 최고 부자의 생각에 대해 뭐 한 가지 궁금하지 않은 게 있을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질문의 범위가 너무 넓다. 이러다간 “이라크 전쟁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다음 러시아 대통령은 누가 되나요”라는 질문까지 나오지 않을까 싶다.버핏은 놀라운 기억력과 화술을 갖고 이들 질문에 답했다. 어떤 질문에 대해서도 그는 막힘이 없었다. 구체적인 숫자까지 들이대며 재미를 섞어 하는 대답은 정말 버핏은 ‘만물박사’요, ‘인생 컨설턴트’라는 느낌이 절로 들게 했다.이런 식이다. “프로야구단은 TV에 자주 나오는 만큼 인수해도 괜찮지요. 그러나 우리 세대는 글렀고, 질문자는 인수할 것 같네요.” “저는 신을 믿지 않습니다만, 신이 계신다면 좋은 사람을 많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부부간 다른 재산으로 보면 안 되죠. 따로 계산하지 말고 하나로 보는 게 맞습니다. 하긴 이혼하면 따로 계산해야 하지만….”그는 어린이 교육, 바람직한 부부관계에서부터 회사 내 관계 설정, 회사 운영 방법까지 답하는데 막힘이 없었다. 미리 준비한 답은 결코 아니었다. 아무 메모지도 없이 술술 대답하는 걸 보면 평소 그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이런 대답을 들으면서 버핏은 ‘투자의 귀재’이며 ‘경영의 귀재’이기도 하지만 수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많은 사람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는 ‘자상한 가르침의 귀재’라는 생각도 들었다.주총이 끝났지만 축제는 끝난 게 아니다. 버핏이 즐겨 찾는 ‘고라츠’라는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주주들과의 만찬이 이어졌다. 다음 날인 5월 4일도 마찬가지. 파장 분위기가 역력한 가운데 보세임 등에서 주주 세일 행사가 열렸다. 세계에서 단일 매장으론 가장 큰 보세임의 1년 매출 중 20%가 주총 기간에 일어난다니 과연 부자 주주들답다.점심 무렵이 막 지났을까. 주주들이 모여 카드게임을 하고 있는 자리에 버핏이 나타났다. 비어 있는 자리에 끼어 앉은 버핏은 스스럼없이 카드게임의 일종인 브리지 게임을 한다. 연신 코카콜라를 따라 마시고 옆의 주주에게 따라 주고 패를 갖고 장난을 치는 모습이 너무나 소박하다.바로 이것일까. 세계 최고 부자이지만 부자답지 않은 행동, 거대 재벌 총수지만 재산의 90%를 사회에 환원하는 행동, 세계 최고 투자의 고수지만 답답하리만큼 원칙을 지키는 행동, 주가가 세계 최고로 비싼 기업의 CEO이지만 뭐 하나 숨길 게 없다는 듯 모든 걸 털어놓는 행동, 그리고 주주를 진정한 동업자로 여기는 행동, 결국 버핏의 사람을 끌어 모으는 마력은 너무나 인간적인 최고 경영자의 모습이었다. 바로 ‘버핏식 자본주의’를 연구해 봐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