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조선의 목동자상
련꽃 피는 언덕에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으며 흥얼거리는 사월, 교정에 햇살이 눈부시다. 캠퍼스의 봄은 봄이고 나는 여수 흥국사(興國寺)에 갔다. 흥국사에는 조선 후기에 건축된 기품 있는 대웅전과 아름다운 조선 목동자상이 있다. 흥국사 목동자상은 조각의 솜씨도 우수하거니와 그 위에 칠해진 색깔이 세월에 바래고 때 묻어 깊이 있는 조선 색감을 보여준다. 조각상을 언뜻 보면 붉고 푸른 무당집 색깔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냥 붉은색이 아니라 채도가 선명한 다홍으로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여기에 진한 초록과 비단 바탕 같은 차분한 흰색, 푸른빛이 상큼하고 짙은 쪽색이 어우러진 조선색의 향연이다. 여수에서, 순천에서, 광양에서 온 보살들과 할머니들이 떨어지는 벚꽃 그늘 아래에서 봄날을 즐기고 있다. 흥국사 입구 여천공단 산업도로 거대한 화물 자동차들의 굉음에 봄날이 천천히 간다.흥국사는 고려 명종 25년(1195) 보조국사 지눌이 창건했다. 흥국사는 이후 임진왜란 당시 승군의 중심지이기도 하여 의승수군(義僧水軍)의 역할을 담당했다. 절의 이름부터가 흥국사, 즉 나라를 융성하게 하겠다는 의미이니 그 비장함을 잘 엿볼 수 있다. ‘흥국사사적기’에 의하면 승군은 1592년 임진란이 발발하자 700여 명으로 조직해 군사 작전 수행, 조선 및 전함 수리, 지역 경계 근무 등 일반적인 군사 업무에서부터 종이 만들기와 짚신 삼기 등 잡다한 일상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다가 전쟁이 끝난 후 1812년까지 지속됐다고 한다.흥국사의 뒷산인 영취산 너머 여수가 지척인데, 여수는 조선 성종 10년(1479)에 오늘의 해군사령부라고 할 수 있는 전라좌도수군절도영이 설치돼 고종 32년(1895)에 폐영될 때까지 약 400여 년간을 조선 수군의 본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충무공 이순신이 충청 전라 경상도의 삼도수군통제사를 겸임하면서 여수는 삼도수군통제영이 됐다. 이순신 장군의 영향은 현재 흥국사 소장 이순신 장군의 친필 대형 현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지리적 관련으로 흥국사는 전라도나 경상도 어느 절에서도 볼 수 없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절을 지키려는 독특한 건물 진입 구조를 가지고 있다.흥국사도 대부분의 조선 사찰처럼 일주문을 거쳐 계곡을 따라 진입하다 보면 명당수의 작은 시내를 건너고 천왕문을 마주한다. 천왕문 안에는 사천왕이 우람하게 자리하고 있는데 표정이 한결같이 험상궂고 손에는 무시무시한 칼과 검, 그리고 서역의 악기를 들고 있다. 퉁방울의 부리부리한 눈알과 곱슬곱슬한 턱수염, 그리고 진한 구레나룻과 각진 턱, 우람한 체구는 영락없이 서역 사람이고 여기에 치렁치렁한 갑옷과 도깨비 귀면상의 장신구 등이 이국적 느낌뿐만 아니라 이질감마저 느끼게 한다.이런 느낌은 나만의 학문적 호기심으로 보아서일까. 절에 들어서는 보살들은 연신 허리를 굽히며 치성을 드린다. 행여 사천왕께서 노여워 하셔서 화가 미칠까 두려워 진작에 몸을 숙이든가, 아니면 익숙하게 해 왔던 것처럼 사천왕문의 통과의례일까.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어느 절이나 할 것 없이 똑같은 이국적 사천왕상을 보면서 무의식속에 싹튼 관념의 세계가 사람들로 하여금 평범하게 인식하게 하여 자연스럽게 숭배하게 하니 관념이 새삼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즉, 사천왕상은 당연히 저런 무섭고 부리부리한 용모여야 된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왜 사천왕상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의 얼굴과 내용으로 만들지 못할까. 언제까지 조선시대,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서 고려, 통일신라, 삼국시대에 불교가 이 땅에 전파된 때를 곱씹어서 기억하고 유지해야 할까. 새삼 생각해 본다.천왕문을 지나면 정면에 성채같이 떡 버티고 있는 누각이 있다. 봉황루라고 쓴 대자 현판이 건물을 압도한다. 마치 여수 진남관의 현판 글씨처럼 우람하게 커서 조선 수군 무인의 위용을 보는 듯하다. 이 봉황루는 조선 후기 건물로 아래 기둥 사이에 판문을 두고 축대를 쌓아 2층을 올려 건축했는데 아래서 보면 2층이고 건물 옆 계단을 거슬러 오르면 1층인 전형적인 산지 누각이다. 보통 조선의 전통 사찰은 누각이 대웅전을 마주하며 요사를 좌우에 두고 가운데 반듯한 마당을 두어 부족한 절집 공간을 확장하고 기운을 응집하는 기능적인 건축물이다. 그런데 흥국사는 누각을 지나도 대웅전이 보이지 않고 다시 계단과 법왕문을 통과해야 비로소 절의 본영역인 대웅전 공간에 맞닿게 설계돼 있다. 한마디로 다른 사찰에서 못 보던 건축 형식이다. 여기에는 아픈 전쟁의 역사가 간직돼 있다. 흥국사는 창건 이후 임진왜란 중 왜적에게 절이 소실되고, 더 거슬러 올라가 몽고군에 의해 완전히 폐허가 된 전례 때문에 의도적으로 적의 공격으로부터 절을 방어하기 위한 전략적 의지가 숨어 있다. 그래서 흥국사 주변의 지형은 부드럽고 완만한데 비해 절의 느낌은 웅장한 기상이 배어나오는가 보다.무사전목동자상,인왕상과 시왕상,그리고 동자상이 작은전각 안에 가득하다. 알록달록 조선색의 향연이다.봉황루를 좌우로 돌아 작은 마당을 거쳐 법왕문 계단을 오르면 비로소 흥국사 대웅전이 당당하게 자리한다. 팔작지붕의 날렵한 곡선이 봉황이 나는 듯 가볍고 좌우에 벌려 있는 고색의 요사에서 세월의 깊이를 보인다. 대웅전 용마루 위에 부처님 머리의 육계같이 불룩 튀어나와 아담하게 자리 잡은 영취산 봉우리가 정답다. 대웅전이 자리한 영취산은 서쪽으로 두 가닥 물줄기가 흥국사를 감싸 안고 흘러내려 일주문 밖 낮은 저수지로 모여 바다로 흘러간다. 여기에 대웅전을 중심으로 뺑 돌려 자리한 부드러운 산세는 연꽃 봉오리처럼 따뜻하다. 봄 산의 연둣빛 수목과 불타는 진달래꽃의 화사함이 흥국사를 빛나게 한다.대웅전 외관은 고색의 단청으로 퇴락해 가고 있지만 내부는 화려한 장엄과 ‘영산회상도’ 같은 후불탱화와 ‘수월백의관음도’ 등의 보물급 불화가 가득하다. 용과 봉이 나는 불단 장식과 화려한 천장 우물반자 단청 등 그야말로 색 천지다. 조선 색이 모두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의 전통 색감은 화려한 순색을 좋아하고 깊이 있는 단순함을 사랑했다. 조선은 잔재주의 장식과 가벼운 채도는 ‘채신머리없다’고 멀리했고 점잖은 체면에도 색감은 강렬한 것을 즐겼다. 대표적인 조선 색이 바로 한복의 배색이며 규방의 보자기나 베개 마구리, 그리고 여인들의 장신구 및 궁궐과 사찰의 단청이다. 하지만 단청은 엄밀히 따지면 그 원형이 인도색이다. 단청의 문양도 뿌리가 인도여서 고대 인도로부터 불교가 전파되는 실크로드선상의 불교 유적에서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전래되고 있다. 오죽하면 네팔이나 티베트의 히말라야 고산의 라마 사원에 보이는 문양과 색채가 한국의 전통 사찰의 문양과 색감과 아주 흡사하고 심지어는 똑 같기까지 하니 인도 불교 색채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흥국사 무사전(無私殿)은 일반적으로 명부전에 해당하는 전각으로 대웅전 옆 사대부가의 건넌방처럼 가깝게 처마를 붙이고 있다. 무사전은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죽은 이의 넋을 인도해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기능을 하는 전각이다.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신 곳이므로 지장전이라고도 하며 지옥의 심판관 시왕을 모시는 곳이므로 시왕전(十王殿), 혹은 저승과 이승을 연결하는 전각이므로 쌍세전(雙世殿)이라고도 한다. 시왕은 망자의 생전 잘잘못을 따지고 벌하는 곳이니 산 자에게는 얼마나 무서운 곳일까. 그런데 이 무서운 무사전에 흥국사의 보물단지라고 할 수 있는 조선의 아름다운 목동자상이 있다. 목동자상은 글자 그대로 나무로 깎은 동자상이다. 목동자상은 여느 절 대웅전이나 명부전 등 불단을 장식하는 장엄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 가운데 흥국사 무사전(無私殿) 목동자상은 전형적인 조선 후기 목동자상이다. 앳된 용모에 눈매가 가늘고 길게 뽑아져 상서로운 느낌이 들뿐더러, 당채의 주홍색 상의, 청록색 바지와 어우러진 복색은 보고 또 보아도 기품이 있다. 조각상은 작지만 미감은 결코 작지 않다. 여기에다 지장보살상 옆에 시립한 승상의 기품도 고고하려니와 시왕의 준엄한 표정에서 미감의 심상치 않음을 본다. 말 그대로 무사(無私) 즉, 사사로움이 없이 엄격한 공정함만이 있다.조선의 사찰 목조각은 구수하면서도 따뜻하다. 색감도 순수하다. 대웅전에서 가끔 볼 수 있는 법고를 등에 이고 있는 당사자(唐獅子)의 어설픈 표정과 익살스러운 몸통의 해학적 미감, 깊고 품위 있는 조선 색감이 모두 그렇다. 여기에 업경대(명경대 : 저승의 입구에 있다는 거울)나 닫집 위를 장식하는 용과 봉황,그리고 학을 타고 날아다니는 동자상과 천장을 장식하는 모란 조각 등에서 보이는 조형성과 색감은 모두 ‘조선 것’이라고 표시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만큼 전형적인 조선색이 뚜렷하다.누운 김에 발 뻗는다고 여수까지 와서 싱싱한 봄 도다리 맛을 보지 않으면 내려온 보람이 없겠지. 항구의 횟집에 갔다. 봄 생선들이 수조 가득 넘치고 커다란 플라스틱 그릇에 개불이며 소라 문어가 가득이다. 시키기도 전에 먹음직스러워 입 안 가득 군침이 돈다. 적당히 흥정을 하고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아따 참말로 잘 해 부렀어 잉’으로부터 ‘거시기 뭐드냐? 고것이 긍께 그랬지라…’까지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가 이곳저곳에서 독한 소주와 섞여 마구 날아다닌다. “봄에는 향긋한 개불의 달착지근한 이 맛이 일품이지라…”라면서 인심 좋게 생긴 풍채 좋은 주인아주머니가 모둠 안주를 내민다. 개불은 보기에는 꼭 커다란 지렁이처럼 징그럽지만 초장을 찍어 한 입 씹으면 쫄깃한 육질에 아줌마 말대로 달착지근한 맛이 혀끝에 묘하다. “아줌마! 해삼이나 전복은 없나요?” 소리가 입에서 절로 튀어나온다. 어느덧 한 잔 두 잔 잔 수가 늘어나자 우럭탕이 나온다. “우리 집 아저씨가 잡은 것”이라고 단단히 생색을 내며 끓인 비릿한 우럭탕에 향긋한 쑥갓향이 막 번진다. 이것저것 젓가락이 옮겨지다가 우럭 대가리에 붙은 볼때기 살에 눈이 갔다. 볼 살이라고 해 보았자 일회용 콘택트렌즈 만큼 밖에 안 되지만 작은 살점이 씹히는 맛은 순간 황홀했다. “헐! 이렇게 맛있는 살코기가 여기 있다니….” 다시 반대편 볼때기를 살폈다. 난 기름진 뱃살보다 쫄깃한 볼 살이 좋다. 아니 게으른 뱃살보다 부지런한 볼 살이 더 좋다. 하하거리며 맛있는 저녁을 하고 나오니 항구의 불빛이 바닷물에 아른거린다. 횟집 밖 수족관에 한눈팔고 빈둥대다 그물에 걸려 항구까지 올라온 도다리가 두 눈을 한쪽으로 몰아붙인 채 물속에서 비뚤어진 입만 뻥긋댄다. 내가 한참을 뚫어져라 쳐다보아도 그놈은 아랑곳하지 않고 눈 한 번 꿈쩍 않는다. “햐! 요놈 쑥국 끓이면 맛있겠는데….” 나도 모르게 헛소리가 나왔다.©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