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오버 테너 임태경

“2008년에도 난 노래하는 사람입니다.”크로스오버 테너 임태경의 미니 홈피를 장식하고 있는 첫 문구. 임태경은 어떤 장르의 음악을 한다는 게 아니라, 그저 노래를 부른다고 한다. 굳이 장르를 나누지 않는 이유는 음악 자체가 그의 삶이기 때문이다. 음악은 세상과 그를 이어주는 매개체다. 그리고… 자유다.태경은 여성 팬이 많다. 특히 극성팬이 많기로 유명하다. 아이돌 스타도 아닌데, 웬 극성 여성팬? 처음엔 기자도 그렇게 생각했다. 고백하건대 그의 첫 번째 콘서트를 보러 가기 전까진 임태경은 그저 좀 ‘똑똑한 가수’라고 여겨졌다. 그리고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불의 검’에 나왔던 주인공 정도로만 기억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은 그의 콘서트가 막을 내림과 동시에 거침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곤 기자도 팬이 됐다.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호소력 짙은 목소리. 특히 여심을 뒤흔드는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는 음색은 그야말로 명품이라고 할만했다. 데뷔 6년 만에 벼르고 별러 가진 첫 콘서트가 열린 세종문화회관 안은 전국 각지와 멀리 해외에서까지 날아온 여성 팬들로 만석이었다. 귀에 익은 올드 팝이 울려 퍼질 때면 곳곳에서 “브라보”를 외치는 중년 남성 팬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노래가 끝날 때마다 기립 박수를 보냈다. 넓디넓은 세종문화회관 안을 임태경이 목소리 하나로 지휘하고 있었다.그리고 며칠 후, 강남의 한 와인 바에서 그를 만났다. 기자가 공연의 감동을 피력하려고 하는 순간, 그는 약간 상기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제 공연에 부족한 부분이 많았죠. 6년 만에 하는 첫 공연이라 많이 준비했는데, 생각대로 되지 않은 부분이 너무 많아 정말 안타까워요.” 그는 정말 걱정하는 눈치였다. “배려라는 단어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세종문화회관이 워낙 큰 공연장이라 2층과 3층에 있는 관객들까지 모두 배려하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어요. 다음 무대엔 대형 스크린을 설치해 제 표정 하나하나까지 다 보여드리고, 간이 무대를 설치해 구석에 있는 관객들도 제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할 생각이에요. 제 공연에 오신 모든 분들은 VIP니까요.”배려가 많은 사람은 걱정이 많다. 그의 말투 표정 몸짓에서 배려와 걱정이 혼재돼 뚝뚝 흘러나온다. 말투도 느릿느릿하다. 성격 급한 사람들은 중간에 치고 들어가기 십상이겠다. 그의 느린 말투는 오랜 외국 생활 때문이다. 고교 생활은 스위스에서, 대학 생활은 미국에서 했다. 그래서 영어와 프랑스어 모두 능통하다.그가 스위스로 유학을 떠나게 된 때는 고교 1학년 때. ‘정답’을 요구하는 한국의 교육이 맞지 않았다고 한다. ‘빈칸에 알맞은 말을 고르시오’라는 문제를 보고는 ‘됐다’고 생각했다. 주입식 틀에 박힌 교육에 환멸을 느낀 것이다. 그가 어려서부터 이같이 깨인 생각을 갖게 된 것은 공학도였던 아버지가 국제 공학 세미나에 데리고 다니면서 견문을 넓혀준 덕이었다. 결심을 굳히고는 5일 후 초고속으로 스위스 제네바의 ‘르호제(Le rosey)’라는 명문 사립학교에 입학했다. 개인 맞춤식 교육을 실시하던 학교에서는 학생이 하고 싶은 과목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줬다. 그는 그때 태권도를 비롯한 각종 운동과 성악을 연마했다. 현재도 그의 태권도 실력은 공인 4단이다.그는 어린 시절 품었던 ‘과학자’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미국 북동부 명문 공대인 WPI(Worcester Polytechnic Institute: 우스터 공학대학)에서 공학도의 길을 걷게 된다. 세계 굴지의 자동차 기업으로부터 연구직 제의까지 받은 그는 군대 문제로 신체검사를 받게 됐다. 그때 어린 시절 자신이 백혈병을 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큰 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었음에 감사하며 그는 자신에게 새로운 삶이 허락된 이유에 대해 고민하게 됐고, 그 고민 끝에 얻은 해답이 바로 ‘음악’이었다. “어려서 앓았던 병이 악성 빈혈인 줄만 알고 있었는데 백혈병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어머니가 일부러 제게 그 사실을 숨기셨던 거예요. 재치를 발휘하셨던 거죠. 그때 제가 큰 병을 무사히 털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음악의 힘’이란 걸 깨달았어요. 그 길로 다시 노래하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죠.”백혈병을 앓던 한 소년이 음악의 감동으로 병을 치유하고 그 감동을 모든 이들에게 전하고자 다시 무대에 선 것이다. 음악의 치유 능력, 그것은 놀라웠다. “팬 중에 자폐증에 걸린 소년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의 어머니에게서 한 통의 편지를 받았어요. 임태경의 음악을 듣고 아들이 좋아해서 병이 호전됐다는 것이었죠. 진심으로 기뻤어요. 그뿐만 아니라 나이 드신 분들이나 우울증에 걸리신 분들도 제 노래를 듣고 건강해져야겠다고 결심했다는 얘기를 들을 때 정말 보람을 느끼죠.”2002년 그는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위해 다시 한국을 찾았다. 새로 무언가를 시작하기엔 늦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솔로 앨범 발매와 수많은 국제 및 국내 무대와 뮤지컬 무대, 드라마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 등에 참여하며 음악과 관련된 모든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클래식과 뮤지컬은 물론 팝과 가요 등 모든 장르를 넘나들고 있다. 비지스, 스티비 원더 등의 음악을 ‘임태경 식’으로 부른 두 번째 앨범도 출시했다.“크로스오버를 선택한 것엔 가족의 영향이 컸어요. 공대 기계과 출신의 아버지와 가야금 병창으로 국악에 조예가 깊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성악가와 과학자라는 두 가지 꿈을 동시에 가졌죠. 클래식 음악을 전공했던 외가 식구들의 영향으로 네 살 때부터 노래를 불렀고 예원학교에 입학하며 실력도 인정받았어요. 그리고 한국 미국 유럽에 모두 살면서 다양한 문화를 겪어본 것도 크로스오버를 하는 데 도움이 많이 돼요. 예를 들어 ‘슬픔’이라는 주제를 줬을 때 우리나라는 ‘한’을 생각하지만 미국은 ‘구질구질함’, 유럽은 ‘애절함 간절함’을 떠올리죠. 저도 크로스오버를 통해 음악의 본질을 전달하면서 거기에 ‘한’이라는 정서를 접목해 보여줄 생각이에요.”그는 요즘 기부에 관해 골똘히 생각한다. 막연한 기부가 아니라 효율적으로 제대로 하는 계획적인 기부를 실천하고 싶다. 10년 후에는 기부 시스템을 재정립해 보고 싶기도 하다. 그 일환으로 지난해 8월부터 ‘순애보 나눔 콘서트’를 진행 중이다. 소극장에서 공연하면서 매달 기금을 마련해 왔다. 올해에는 그 규모를 더욱 확장해 누가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지 찾아내는 탐사단도 구성할 예정이다.“노래하는 순간이 제일 행복해요. 정확히 말하자면 노래를 하는 것보다 누군가에게 노래를 들려준다는 사실이 좋아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노래를 들려주고 싶거든요. 내 노래를 듣고 사람들이 좋아하고 행복해 하는 걸 보는 기쁨과 희열은 그 어떤 것에도 비할 수 없어요. 무대 위에서 내 노래를 경청하는 사람들의 눈빛을 보면 ‘아, 내 노래를 들어 주는구나’ 싶어서 행복해지죠. 그 행복해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보이는데, 거기에서 어떤 에너지가 나오는 듯해요. 서로 그 행복한 기를 공유하는 느낌이 좋아요”.임태경은 스타가 아닌 ‘노래 부르는 사람’으로서 관객과 마주하기를 소망하는 진정한 음악인이다. 그의 풍부한 감성은 팍팍한 삶에 지친 메마른 영혼을 어루만진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의 삶에 생명수 같은 쉼표 하나를 찍는다.장소협찬 베라짜노(02-517-3274)글 김지연·사진 이승재 기자 jykim@moneyr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