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여행을 가지 않으면 안 되는 듯한 시대였죠. 저 역시 방학 때 유럽 여행을 갔는데, 미대생이라는 이유로 유명 미술관은 모조리 찾아다녔습니다. 40일 동안 그렇게 다니다 보니 나중에는 왜 이런 의무감을 가지고 봐야 하는지 모르겠고 미술관 입구만 봐도 토할 것 같더라고요. 마지막 일정이 파리였는데, 아무리 그래도 루브르를 가보지 않을 수는 없지 않겠어요? 방탄유리를 씌운 어떤 그림에 유독 사람들이 잔뜩 몰려서 보더군요. 다빈치의 ‘모나리자’였어요. 명작이긴 하지만 박물관에는 그것 말고도 좋은 작품이 얼마든지 있는데 왜 사람들은 이것에만 열광할까? 예술성과 인지도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은 것은 아닌가? 만약 유명한 것 자체로도 예술성을 인정받는다면 코카콜라 또한 예술 작품 못지않다는 생각이 들었죠.”콜라 병을 활용한 작업을 한 까닭에 ‘코카콜라 보이’라는 애칭을 가진 박진우. 1973년 생으로 서울대에서 금속공예를 전공한 그는 장신구를 만들 때에도 원석 대신 코카콜라 병을 깨서 사용하기도 했고 1999년 ‘세기말’을 주제로 한 사진 작품으로 첫 번째 개인전을 열 때에도 코카콜라 병은 어김없이 등장했다. 예술이란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으로 대중과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에게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데 비교적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공예는 적합하지 않았다. 예컨대 사진은 셔터를 마구 눌러대며 느낌과 이미지를 재빨리 포착해 표현해 낼 수 있지만, 공예는 작품에 따라 하나를 완성하는데 몇 주에서 몇 개월이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쏟아내고 싶은데, 공예로는 수다 떨기가 불가능하다는 것. 그래서 영국왕립예술대학(Royal College of Art)에서 제품 디자인을 공부한 후 삼성전자에 디자이너로 입사했다. 그렇지만 샐러리맨 생활은 2년 만에 마감하고 말았다. 넘쳐나는 아이디어를 공산품 디자인에 눌러 담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자신의 영문 이니셜을 딴 ‘ZNP 크리에이티브’라는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예술적 끼를 발산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 팝 아티스트, 비주얼 아티스트, 디자이너 가운데 어떤 것도 그를 지칭하기에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뭐라 불러도 상관없다는 그의 말처럼 사실 어느 범주에 속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역동적인 발상을 하되 그 안에는 재미난 상상과 유머가 담겨있을 것.’ 그의 지향점을 굳이 말하자면 이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책상 위에 가볍게 턱을 괴어 보는 것만으로도 세계가 다르게 보인다. 사물을 보고 느끼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 이처럼 수없이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는 방법을 일상의 물건이나 커뮤니케이션에 의식적으로 반영해 가는 것이 바로 디자인이다”라는 디자이너 하라 켄야의 말처럼 주변의 소소한 것들을 기발한 아이디어로 재탄생시키는 것이 박진우 씨의 작품. 이런 까닭에 그의 작업은 갤러리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길거리에서, 인테리어 소품 숍에서, 어느 카페에서 발견했을 수 있다. 우선 지난겨울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광화문 흥국생명 빌딩 앞에 놓여 있었던 금속으로 만든 트리 장식을 기억하는가. 반짝이 조명으로 만든 전형적인 트리와 달리 눈 결정체 모양의 태엽, 깡통 로봇 등을 장식해 만든 일명 ‘크리스마스 팩토리’.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이 작품은 이 세상 어딘가에 크리스마스를 만들어내는 공장이 있지 않을까 하는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위트 있는 독창성을 인정받아 세계적으로 판매되고 있는 ‘5분 양초(5minute candles)’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힌다. 흔히 보는 성냥처럼 생겼는데 그 안에는 딱 5분간 타는 양초가 들어있는 제품으로 2001년 RCA 재학 중 첫 번째 과제로 만든 것이다. 우연히 길을 가다 카페 안에 걸린 조명등 때문에 문을 열고 들어서게 할 만큼 매력적인 ‘스파게티 샹들리에’. 둥근 철제 프레임 위에 오렌지색 전선이 스파게티 면발처럼 늘어뜨려진 끝에 알전구가 달려 있는 이 작품은 청계천에 재료를 사러 갔다가 떠올린 아이디어다.“이 전선이 원래 공사장에서 사용하는 것인데 돌돌 감겨 있는 모습이 무척 예쁘더라고요.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디자인을 디자이너가 끝내는 게 아니라는 점이죠. 프레임과 전선을 분리해 담아 판매하니까 임의로 모양을 낼 수 있어요. 어떤 집에 어떤 사람이 걸어 놓느냐에 따라 형태가 달라지므로 ‘미완의 디자인(Unfinished Design)’이랄 수 있습니다.”전선이 축축 늘어진 탓에 무심하게 만들어진 듯한 ‘스파게티 샹들리에’.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고 잔뜩 멋을 부린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끈다.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디자이너와 작업을 소개한 책자에 실린 그의 작품을 보고 유명 디자인 잡지 ‘프레임(Frame)’의 편집장은 “둔감증에 걸린 디자인 전문가들이 ‘와우’하고 탄성 짓게 할 작품”으로 이 제품을 꼽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메종 앤드 오브제’에 전시돼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으며 파리 퐁피두센터에도 설치될 예정이라고 한다.유머와 풍자를 제대로 담아낸 것으로 치자면 인사동 쌈지길에서 전시됐던 ‘페이크 백(Fake Bag)’도 빼놓을 수 없다. 지하철에 나란히 앉아 있는 7명의 여자 중 다섯 명이 들고 있는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 웃음을 사기도 했던 루이뷔통 스피디 백은 소위 ‘짝퉁’이 가장 많은 제품. 모조품 루이뷔통 가방 위에 아예 ‘가짜(Fake)’라고 큼지막하게 써 놓음으로써 허를 찌르는 아이디어로 보는 순간 실소를 금할 수 없게 된다.“우리는 커 온 환경 자체가 심각하지 않았나 싶어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영국에서 생활하면서 깨달았죠. 우연히 TV를 보는데 우리나라 시사 토론 같은 프로그램에서 보수당과 노동당 정치인들이 서로 농담하면서 재미있게 진행을 하더라고요.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잖아요. 패션 디자이너 폴 스미스가 점잖은 스타일의 의상 안감에 튀는 색상이나 패턴의 원단을 쓰는 것처럼 그들의 생활에는 유머, 위트 등이 묻어납니다. 흐린 날이 많은 날씨 때문에 그 우울함을 떨쳐버리기 위한 방편이었을지 모르지만 제게는 인상적이었어요. 저를 보고 실용성과 유머를 결합한 작가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디자인은 클라이언트가 해달라는 대로 하는 용역회사가 아니잖아요. 새로운 작업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창의적인 것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언뜻 보기에 말도 안 되는 걸 만들어 놓고, 사람들에게 이게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설득하는 것이 관건이죠.” 얼마 전에는 각각의 사안에 따라 헤쳐 모이기를 반복하는 프로젝트 팀 FAST(Fantastic Artistic Seoul Team)를 결성하기도 했다. 아티스트 디자이너 사운드 일러스트 패션 등 예술계 전반을 아우르는 이들이 모인 문화 집단의 명칭에 ‘서울’을 넣어 서울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을 강조한 이유는 뉴욕 파리 런던뿐만 아니라 서울도 문화적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기 때문이란다.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하지 않아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처럼 서울 또한 좋은 자질을 가지고 있으면서 제대로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는 도시가 아닌가.“외국에서 도쿄는 이미 유명하고, 최근 서울이 ‘핫 시티’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가 고유의 문화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그런 것은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듯해요. 낡고 오래된 것은 치워버려야 하는 대상일까요. 스페인은 약간 촌스러운 부분이 있긴 해도 그것이 그곳의 특징이거든요. 요즘 우리는 ‘디자인 도시’ 운운하며 공공 디자인을 공모하고, 동대문 운동장 자리에는 유명 건축가가 설계한 디자인센터가 들어서는 등 변화를 꾀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디자인이 우리 생활에 좀 더 깊숙이 자리하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잘못하면 디자인이 우리나라를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학교보다 MTV에서 배운 것이 더 많다는 박진우는 조명, 가구, 그래픽, 인테리어, 비주얼 아트 등 다양한 장르에서 유머러스, 실용성, 독창성, 참신성을 아낌없이 나타내 보이고 있다. 프랑스와 미국의 디자인 에이전시와 계약한 그가 디자인한 제품을 한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판매하며 여러 기업들과 공동 작업을 하기도 한다. 최근에 개관한 인터뷰 갤러리룸 ‘one’에 가면 그의 대표적인 작품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올 여름부터는 갤러리아 백화점의 공간 디자인을 맡아 진행할 예정이다.글 정지현 미술전문 칼럼니스트·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