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고단의 봄바람
천은사는 지리산 품에 안긴 화엄사 쌍계사 연곡사 칠불암등 많은 사찰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천은사는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덕운선사(德雲禪師)와 인도에서 건너온 승려 스루가 창건했고, 경내에 이슬처럼 맑고 찬 샘이 있어 이름을 감로사(甘露寺)라고 했다. 천은사라고 이름을 고친 것은 임진왜란으로 절이 불타 없어지자 다시 지을 때였다. 당시 샘에 커다란 구렁이가 나타나 불길하다고 해서 잡아 죽였더니 그 후 샘이 마르고 물이 솟아나지 않아 ‘샘이 숨었다’는 의미에서 천은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 의미로는 샘은 곳 생명의 근원이자 삶의 지표로, 절이 위치한 이곳에 생명과도 같은 좋은 샘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곧 명당(明堂)에 명수(明水)가 있다는 것이다.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조선 후기 1775 (영조49)년 대화재로 건물이 모두 불타 없어지고 그 후 새로 복원된 것이어서 이렇다 하게 건물의 가치를 부여할 만큼 역사적인 의미나 건축학적인 새로움은 없다. 국가 지정 문화재로 대웅전 격인 극락보전 아미타 후불탱화가 보물로 지정됐을 뿐이다. 하지만 천은사에는 한국의 불교가 인도에서부터 중국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인도 불교 문화의 원형을 보여주는 사상적 뿌리가 있다. 극락보전 옆 첨성각(瞻星閣)이 그것이다. 부처님이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고행할 때 새벽의 별빛을 보고 큰 깨달음을 이뤘다고 한다. 즉, 부처님처럼 열심히 정진하여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철학을 담은 건물이다. 이러한 전각은 승주 선암사 대복전 옆 요사의 당호도 첨성각에서도 그 염원의 뿌리를 읽을 수 있다. 첨성각은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寮舍)다. 이 첨성각도 물론 18세기 이후 지어진 건물로 고풍스러운 맛은 없지만 당호를 첨성각이라고 한 것을 보면 멀고 먼 통일신라 이후 인도로부터 처음 전래된 불교의 흔적을 읽을 수 있어 흥미롭다. 당시의 인도는 그야말로 상상도 못할 먼 곳이었다. 요즘도 인도를 가려면 쉽게 다녀올 거리가 아닌데 그때야 얼마나 먼 세상이었을까. 다른 이야기이지만 신라 승려 혜초가 당나라에 유학하여 멀리 천축국(天竺國), 즉 인도를 거쳐 서역에까지 이르는 대장정을 하였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그 먼 인도에서 불법을 받아 신라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고난과 험로가 있었지만 부처님의 깨달음을 전하기 위한 승려들의 열망은 막을 수 없었다.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사찰의 창건 설화에는 인도와 관련이 많이 담겨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으로 해남 달마산 미황사의 누런 소 이야기와 화엄사 연기조사의 설화같은 것이 있다. 연기조사는 인도 승려로, 백제 성왕 때에 몸은 거북인데 얼굴은 용이고 날개가 달린 연()이라는 상상의 동물을 타고 화엄사 뒤 황전에 와서 터를 잡았다는 전설이 있다. 마치 티베트의 라마교 승려 체(Che)가 험준한 히말라야를 날아서 넘어와 네팔에 불법을 전해 지금도 히말라야 고산의 마을 이름 중 남체, 팡부체, 딩보체와 같이 ‘체’로 끝나는 곳에는 라마교 사원이 번성한 것과 마찬가지다. 모두 인도에서 왔다는 이야기의 다른 표현이다. 문화의 전파 현상을 보면 문화 원형은 오랜 세월이 가면 최초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소멸하고 엉뚱하게 원형지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가장 잘 보존 된다. 기독교 문화의 발상지는 이미 그 세력이 약화됐고 불교 문화의 원형지 인도에서는 이미 불교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뿐만 아니라 유교의 발상지인 중국에서 유교는 사라진 지 오래지만 한국에서는 아직도 유교 경전인 논어와 맹자를 학교에서 꾸준히 가르치고 있다. 자본주의 시대지만 아직도 우리네 정서 근본에는 유교적 관념이 뿌리 깊다. 이는 1970년대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민 간 당시의 문화 지도층 인사들이 지금도 고국의 문화의 향수를 잊지 못해 서울에서는 보기 어려운 1970년대풍의 인테리어와 서체 간판을 LA에서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즉, 문화를 받아들인 쪽에서는 그 원형을 간직하려는 강렬한 욕망이 있다. 백제 문화가 망하고 백제의 문화 원형이 고스란히 일본 나라(奈良)에 남아 있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한국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중화문화권의 영향을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것 같지만 실은 중국을 넘어 멀리 인도와 서역 문화의 영향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다. 불교 문화의 전파 경로인 실크로드와 해상로를 따라 유입한 서역의 풍습과 언어가 그것이다. 한국의 대부분 사찰에 가면 사천왕상이 있는데 그 상호의 험상궂음은 한국인의 풍모가 아니라 서역의 힘센 장수의 못된 얼굴이고, 대웅전의 후불탱화나 나한전의 나한상을 자세히 보면 도상의 배치나 상호가 중앙아시아계와 인도계 얼굴이 지배적이다. 심지어는 손에 들고 있는 악기와 물건들이 불교가 전래된 당시의 물건들 모습을 아직도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다. 여기에 아침저녁으로 암송하는 예불문에 범어 다라니경이 들어 있고 단청 사이사이에 쓰인 뜻 모를 범어를 아직도 고수하고 있다. 실크로드의 한가운데인 네팔과 티베트의 고산에도 한국 단청의 배색과 문양이 고스란히 존재한다는 데에서 문화의 뿌리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조선은 유교의 절제와 단순을 강조한 통치 미학의 결과로 절집의 외형이 보다 한국적으로 변했을 뿐 인도의 영향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천은사 극락보전 안에 그려진 천장의 모란과 학, 그리고 형형색색의 단청 사이로 보이는 범어의 도상은 보면 볼수록 이곳이 인도인지 중국인지 티베트인지 한국인지 헛갈린다. 그만큼 문화의 원형 보존은 생명력이 강하다. 천은사는 전형적인 백제계 산지 선종 사찰이다. 절의 진입은 무지개가 드리워진 듯 아름다운 누각이라는 의미의 수홍루(垂虹樓). 물길을 건너 구례에서 얼마 되지 않은 지리산 품안에 자리 잡았지만 경내로 들어오면 아늑한 기운에 마음이 푸근하다. 사천왕문을 지나 보제루 누각이 성벽처럼 앞을 가로막는다. 신라 산지 사찰은 산이 높아 지형 확보가 어려웠기 때문에 누각 아래를 통과해 대웅전 영역으로 진입하는 영주 부석사 같은 형태가 일반적이다. 이에 비해 백제는 누각을 끼고 돌아 대각선으로 대웅전을 바라보도록 전각이 자리했다. 서산 개심사가 대표적이다. 천은사는 극락보전과 보제루를 마주하고 설선당과 회승당 요사가 마주한 마당 공간의 정적에서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나타내 보인다. 그중에 보제루의 당당함과 절제된 비례는 조선 건축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회승당 안마당에 내리는 봄 햇살은 선가(禪家)의 살림을 정갈하게 한다. 천은사를 찾는 순례객이 처음 대하는 소나무 숲 그늘의 ‘천은사일주문’ 현판은 원교 이광사의 글씨다. 원교는 1755년(영조 31) 나주벽서사건(羅州壁書事件)으로 큰아버지 진유(眞儒)가 처벌될 때 이에 연좌, 회령(會寧)에 유배됐으나 그의 학문을 배우려고 많은 문인들이 모여들자 다시 진도(珍島)로 옮겨져 그곳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이 현판을 썼다. 원교 특유의 유려한 필치가 유감없이 잘 나타나 있다. 원교는 당시 전라도의 명찰에는 어김없이 대웅전 큰 글씨를 썼으니 해남 대흥사 대웅전과 천불전 현판 글씨가 좋은 예다. 천은사일주문 현판 글씨는 서체의 유려함은 물론 단아한 일주문과 고식의 단청, 그리고 적당한 크기와 가로 세로의 비례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유산이다.천은사를 나와 지리산 남쪽 섬진강변을 걸었다. 봄은 매화가지 봉오리 속에 웅크리고 있다. 막 피어나는 산수유 꽃망울에서 시절의 변화를 본다. 눈이 녹아 불어난 우윳빛 녹색 강물을 바라보면서 농사의 씨앗을 뿌리 듯 또 한 해의 시작을 생각한다. 봄이 오니 만물이 깨어나고 내 마음도 새롭다. 시린 강바람이 정겹기만 하다.천은사 수홍루에서 바라본 봄 풍경. 경칩을 지나 아직 잎이 나오지 않았지만 가지 끝에는 물기가 촉촉하다.일주문, 작지만 단정한 소년 같다. 현판의 원교 필치가 물 흐르듯 유려하다.요사인 회승당(會僧堂), 봄 산의 푸름에 아침 햇살이 빛난다.보제루는 전형적인 산지 사찰 강당으로 ‘ㅁ’자형 마당과 이어져 공간을 넓혔다.첨성각 전경. 한국 건축의 단아함이 묻어난다. 현판 글씨가 작지만 힘차다. www.choisunho.com1957년 청주생. 서울대 회화과 및 동 대학원 졸업. 간송미술관 연구원. 뉴욕대(NYU) 대학원 졸업. 성균관대 동양철학 박사과정 수료. 현재 국립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화가. 저서 ‘한국의 美 산책’.표화랑 갤러리 현대 등 국내외 개인전 17회 및 국제전 참가.©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