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의 또 다른 이름, 필그림 아트
자기, 그 가운데서 섭씨 1350도 이상 고온에서 빚어내는 자기(瓷器)를 유럽에서는 포슬레인(Porcelain)이라고 부르거나 차이나(china)라는 이름으로 따로 부른다. 이는 자기 문화의 이동 경로와 관련해 지어진 이름이다. 칭기즈칸이 유라시아제국을 건설할 즈음인 13세기 마르코폴로가 중국을 여행하고 약간은 과장되게 실크의 나라를 소개했다. 당시 유럽인에게 중국은 향료의 교역을 통해 그 이전부터 알려져 있었고 중국산 실크가 로마 귀족들의 옷감으로 사용된 유래도 있었지만 실제 그곳을 방문해 본 사람은 없었던 먼 이국이었다. 마르코폴로가 ‘동방견문록’에서 중국의 자기 그릇을 소개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 조개-라틴어로 포르셀라나(porcellana)-가 곧 자기로 불리게 된다. 자기는 조개처럼 표면이 광택이 나면서 반투명 사기질이라는 점에서 일견 올바르게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유럽에 소개된 도자기는 그 유동하는 문화 경로가 순례자를 닮았다고 해서 언제부터인가 ‘필그림 아트’라는 닉네임으로도 불리게 된다.도자기 문화는 대략 세 개의 권역으로 나눠 살펴볼 수 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는 라틴 유럽 지역과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그리고 두 지역의 중간에서 매개역을 담당했던 오리엔트, 혹은 이슬람 지역이 그것이다. 도자기 마니아들에게는 이들 문명 간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점과 영향을 나눈 흔적이 이질적이면서도 매우 흥미롭다.조선과 일본의 관계에서처럼 도자 문화의 이동 경로는 지정학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유럽의 고성이나 궁을 방문해 보면 접시를 벽에 걸어둔 차이나 룸(china room)을 볼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해 오던 밥그릇이 ‘다완’으로 일본의 귀족들을 사로잡았듯이 유럽에서도 중국산 도자기가 매우 귀한 예술품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그러나 마르코폴로가 ‘동방견문록’에서 언급하기 전까지만 해도 유럽은 중국의 자기를 알지 못했다. 따라서 중세 이후 유럽의 관심은 중국식 자기를 따라 하려는 노력에 다름 아니었다.문화 선진국이었던 중국의 아름다운 자기를 18세기까지 유럽에서는 개발하지 못했다.모든 군주들은 백색 금으로까지 불린 자기를 개발하기 위해 열정을 기울였으나 쉽게 도달할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짝퉁 자기가 등장한다. 이 짝퉁 자기는 유럽과 중국의 중간 지점에 있는 이슬람 지역에서 나타난다. 그들은 일찍이 유럽으로 아시아 문화를 전달하는 중개자 역할을 수행해 온 경험을 가지고 있었지만 중세에는 종교적인 이유로 베네치아, 혹은 비잔티움 같은 몇 곳의 창구를 통해서만 교역이 가능했다. 간혹 몇 점의 중국 자기가 유입된다고 하더라도 그 가격이 너무 높아 실생활에서는 사용하기에 벅찼던 것이다.바빌론 같은 중동지역에서는 일찍이 타일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그리고 유리 산업에서 월등히 앞서 있었는데 여기서 나타난 발색(發色) 기술이 중국으로 수출되는 과정을 거친다. 특히 청화백자의 코발트 원료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안료로서 조선에까지 그 영향을 끼쳤다.섭씨 135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워 내는 자기와 비슷하게 유리도 고온에서 녹여 만들기 때문에 재료에 함유된 금속이 녹는 과정에서 발색하는 기술은 이슬람인들이 보유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현재 독일의 페르가몬 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컬러풀한 건축용 타일은 바빌론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니 아시아의 도자기는 그들과의 교류에서 터득한 코발트블루를 만나면서 색을 내는 기술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들이 자부하는 청화백자도 알고 보면 이렇게 오리엔트권과의 문화 교류로 얻어진 산물인 것이다. 조선과의 전쟁으로 얻어낸 기술로 자기 생산 대열에 합류한 일본, 그들이 네덜란드와 합세해 유럽에 판매하게 된다.유럽의 모든 군주들은 백색 자기 개발에 매진했다. 독일 작센공국의 아우구스트는 마이센 성에 뵈트거라는 연금술사를 유폐시키고 백색 금을 개발하라는 특명을 내린다. 결국 그들은 백색의 금을 탄생시켰다. 1710년부터 현재까지 작센의 드레스덴 근처에 있는 마이센 공장에서 생산되고 있다. 마이센 자기는 유럽에서 성공적으로 생산된 최초의 순수 자기로, 1756년께 예술의 나라이자 대국이었던 프랑스 세브르 자기에 주도권을 넘기기까지 유럽산 자기의 양식을 지배했다. 이렇게 중국산과 비슷한 순수 자기의 비법은 연금술사인 요한 프리드리히 뵈트거와 물리학자 에렌프리트 발터 폰 취른하우스에 의해 유럽에서 최초로 개발된 것이다.1731년 이후 마이센 공장은 조각가 요한 요아힘 켄들러의 모델링으로 전성기를 맞게 되는데 이로써 그릇의 범주를 벗어나 조각으로 그 예술적 지평을 넓혀갔다. 푸른 쌍칼을 마크로 한 마이센은 초창기 중국과 일본의 디자인을 모방했다. 그러나 곧이어 유럽 디자인으로 조각까지 아우르는 제품이 출시되자 그 인기는 크게 높아졌다. 이후 프랑스 세브르 자기가 루이 15세의 후광을 업고 등장해 마이센과 경쟁한다.유럽에는 이제 백색 자기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퍼져나갔으며 곧 중국 품에서 벗어나 유럽 특유의 안목으로 세계 시장을 석권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급기야 청나라 황실에서 세브르 자기를 수입해 사용하는 일이 생기고 만다.세브르 탄생과 더불어 창의적인 영국인들은 보다 보온성이 높으면서 얇고 투명한 자기 개발에 도전한다. J 스포드라는 도공에 의해 본차이나(bone china)가 탄생하자 일약 세계 자기 시장의 주도권이 영국으로 옮겨간다. 지금도 스톡 온 트렌트에 가면 웨지우드를 비롯한 수많은 명품 브랜드들이 클러스터를 유지하며 활발하게 생산되고 있다.©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