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를 패러디해 실존을 탐구하는 권여현

람들의 심장과 뇌가 점점 딱딱해져가고 있는 것일까. 어찌된 까닭인지 요즘 사람들은 작은 변화, 미묘한 움직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강하고 자극적이어야 마음과 시선을 돌려 어느 정도 반응할 뿐이다. 이렇다 보니 영화와 드라마를 비롯해 주변의 문화 예술이 다루는 내용의 파격은 점차 그 강도를 더해 간다. 미술도 예외는 아니다. 사람의 소변에 플라스틱으로 만든 예수상을 담가 놓고 사진을 찍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자신의 얼굴 성형 수술하는 장면을 비디오로 찍어 작품화하는 작가도 있다.그러나 모든 예술가들이 이런 방향을 향하는 것은 아니다. 영국 조각가 안토니 곰리(Antony Gormley)는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요청해서 된 것이 아니다. ‘던져진 존재(Thrown being)’로서의 나인 셈이다. 이것을 깊이 새기면 그러한 존재가 갖는 남과의 관계 또한 말이나 의식을 넘어 신체적이고 보다 본질적인 관계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작가 권여현 또한 실존에 대한 것을 주제로 한 작업을 하고 있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심판’, 조선시대 풍속화 등을 패러디한 작업은 전혀 충격적이지 않다. 오랜 시간 늘 봐왔던 원작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화 속 인물에 자신을 포함해 제자들의 얼굴을 넣는 등 화면 속에서 벌어진 변화를 감지하며 작가의 의도를 파악해 가는 과정은 이만저만 흥미로운 것이 아니다. 초기작 제목 ‘실존 공간’, ‘던져짐’ 등에서 알 수 있듯 권여현은 실존철학을 줄곧 작업의 화두로 삼고 있다. 이처럼 그가 자아에 천착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초등학교 5학년 때 대구로 유학을 가고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서울로 유학을 왔습니다. 일찍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고, 낯선 환경에서 친구를 사귀는 것도 쉽지 않았고 필연적으로 모범생이어야 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생각이 많아지고 자아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진 자아의 발현에도 관심이 많아 결국 제 작품의 주제로까지 삼게 된 것입니다.”대학 졸업 즈음해서부터 10여 년간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이론을 근간으로 개인의 내적인 잠재의식을 다루는 작업을 했다. 이후 자크 라캉의 자아와 사회와의 관계 유추에 빠져들면서 캔버스 안에서 역할 놀이(Role Playing)를 구현한다. 1920년대 초 정신과적 심리 치료를 위해 만들어진 역할극은 자신의 입장만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도 이해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자신이 상대역을 하고 상대방이 자신의 역할을 하는 식으로 역할을 교환하면 타인이 자기를 보는 것처럼 객관적으로 자신을 볼 수 있으며 통찰하기도 쉽게 된다. 자신과 제자들 가운데 ‘최후의 만찬’에 등장하는 예수, 베드로, 요한, 유다 등에 어울리는 인물을 설정, 화면에 대입하는 것이 바로 권여현식 역할 놀이인 셈이다.“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해 학생들과 공동 작업할 때 자신이 원하는 인물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역할을 지정하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외모뿐만 아니라 평소 학생의 성격이 반영돼 배역이 정해졌지요. 타인과의 관계성과 삶의 과정이 인간의 기질을 결정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예컨대 나는 불그스름하면서 노란기도 있고 핑크색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람들이 ‘너는 빨강이야’라고 말하면 그 사람은 빨강인 것입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시스템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고, 인성은 사회적인 시스템이 부여하는 것이지 본인이 판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이렇게 역할이 정해지면 원작의 인물과 같은 포즈를 잡아 사진 촬영을 하고 전사를 해서 화면에 그려 넣는 방식으로 작업이 이뤄진다.지난 3월에는 ‘마법의 숲’이라는 주제로 29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이번에 그가 차용한 작가는 앙리 루소. 사실 그가 루소의 작품을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2003년께부터이고 2005년까지 그린 그림에는 실사가 합성돼 있다. 인물 사진 합성 없이 그린 것은 2007, 2008년에 그린 최근작이다. 이전의 것이 한눈에 ‘루소 그림이다’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면 이번에는 ‘루소틱’한 느낌이 나는 그런 작품이다. 루소 그림 속에 등장하는 소재 일부와 여타의 이미지가 혼재돼 있는 혼성 모방(Pastiche: 다른 화가의 여러 작품에서 부분적인 모티브를 인용해 조합해 독립된 독창적인 작품과 같이 만드는 기법)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예컨대 ‘마법의 숲(magic forest)’에 등장하는 여인은 여신 아르테미스를 연상시키지만 자세히 보면 동양인의 얼굴을 하고 있고 토마스 기차, 로봇 같은 만화 캐릭터가 숨은그림찾기처럼 뜬금없는 곳에 그려져 있다. 게다가 화면 중앙에는 소나무가 버젓이 그려져 있는데 그 주변에는 열대 식물이 있는 식이다.“숲을 배경으로 선택한 이유는 익숙하지만 낯설고, 낯설지만 익숙한 그런 이미지를 보여 주기에 제격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건물에 그리면 보는 사람이 그 어색함을 금세 알아차리겠지요. 그렇지만 숲에는 어떤 것을 그려도 잘 어우러집니다. 이성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 등 서로 다른 요소들이 자체적으로 잘 어울리죠.”권여현은 1984년 서울대 서양화과 4학년 재학 중 창작 미협 공모전 대상, 1986년과 1990년 동아 미술상과 중앙미술대전 우수상, 1991년 평론가들에 의해 주어지는 석남 미술상을 수상하면서 두각을 나타낸 화가다. 1988년 첫 번째 개인전 이후 지금까지 29차례 전시를 열었고 100여 회의 그룹전에 참가했다. 말하자면 신춘문예 당선만을 고대하며 골방에서 20대 청춘을 바친 것이 아니라 일찌감치 신춘문예에 당선돼 베스트셀러도 낸 작가였던 셈. 그러나 30세였던 1990년대 초, 그는 그간 쌓아놓은 위치를 털어 버리고 무작정 뉴욕으로 갔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을 보고 싶어서였다. 소호에 작업실을 얻고 2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수많은 전시회를 찾아다니며 사람들도 만나고 작업도 열심히 했다.“한국에서는 제 그림이 너무 서구적이다, 외국 작가 작품 같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뉴욕에 갔더니 한국적이고 동양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고 하더군요. 나의 감성과 느낌을 상대방에게 이해시키려면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주어야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평면 작업만 하던 것에서 벗어나 이후에는 여러 작업을 시도했죠.” 앞서 언급했듯 그는 수차례 전시회를 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만큼 작업을 많이 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렇지만 그는 그림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15년 넘게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기도 하다.“온전히 작업에만 몰두하고 싶지 않느냐는 질문을 많이 듣습니다. 물론 때로는 개인 작업만 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몸이 작업이 잘 되게 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에는 바이오리듬이 끊어지지 않게 그림을 계속 그리고 싶기도 합니다.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4~5번 그런 적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학교에 가서 학생들을 만나고 가르치다 보면 그에 못지않게 얻는 부분도 많습니다. 우선 저 자신을 한 곳에 머물러 있게 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극하고 계발하게끔 하는 동기가 됩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제자인 동시에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작업적 동료이기도 하죠. 모든 것은 장점과 단점의 양면이 있게 마련인데, 결국 선택은 자신한테 달린 것이죠. 저는 학생들과 함께 연구하고 작업하는 것이 좋습니다.”천재성을 타고난 모차르트보다는 꾸준히 노력하고 연구하는 작곡가 살리에리 쪽에 가깝다고 자평하는 작가 권여현. 그를 잘 모르는 사람은 ‘말 수 적고 점잖은 선비같다’고 하지만 그를 잘 아는 사람은 ‘말이 많고 강하고 격렬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한다고 한다. 작가를 알려면 작품을 보면 알 수 있는 법. 지금까지 해 온 그의 다양한 작업을 보면 선비적 성향보다는 다채로운 에너지를 지닌 사람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정지현 미술전문 칼럼니스트· 이승재 기자Syntagm-myth, 180×180cm, Oil on Canv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