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륙 와인 선두 주자 칠레

레에 대해 아는 거라곤 FTA(자유무역협정)와 와인 정도였는데 우리 축구대표팀을 꺾는 걸 보고 축구도 강함을 새삼 알게 됐다. 남미의 다른 나라와 달리 라틴 출신보다 영국이나 독일 출신 이민자들의 비중이 높은 칠레는 경제가 강하고 경찰이 부패하지 않은 나라로도 알려져 있다. 겨울이 시작되는 12월이 그들에겐 여름의 시작인데, 뱀장어처럼 긴 칠레를 여행하면서 와인의 저력이 땅과 태양에서 비롯된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그들 음식엔 실란트로가 많이 들어간다. ‘고수’라고 불리는 일종의 허브다. 하도 덥다 보니 동남아처럼 그런 게 필요한지 모르겠다. 흰살 생선으로 만든 샐러드 ‘세비체’는 우리의 김치처럼 식탁에 빠지지 않는 음식이다. 레몬즙에 절여 더운 계절에 몸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단백질 섭취에도 좋다. 호박과 꽃을 넣어 만드는 소파티야는 비스킷처럼 얇은 빵인데, 도넛처럼 기름에 튀겨 낸다. 역시 더운 계절에 열량을 확보하기에 좋다. 홍합과 바지락, 당근, 피망을 넣고 우려낸 소파 데 마리스코는 우리 해물탕 비슷한 음식으로 국물 맛이 시원해 해장에도 좋다.수도 산티아고에서 남하하든 북상하든 한쪽은 안데스, 다른 쪽은 태평양이다. 바다와 산맥 사이의 좁은 협곡에 사람들이 산다. 문명화가 덜 돼 불편하기도 하지만 포근한 시골 정서를 느끼니 좋은 점도 있다. 여기 카우보이는 ‘후아소’라고 불리는 ‘추파이야’라는 챙 넓은 모자를 쓴다. 강한 태양을 피하기 위해서다. 차 대신 말 타는 농민들이 심심치 않게 길가에서 보인다. 그 뒤로는 충직한 개가 따라가고.산티아고 남쪽에 있는 산타크루즈로 가면 이런 풍경이 자주 눈에 띈다. 이곳에는 칠레에서도 좋은 토양으로 알려진 클로 아팔타가 있다. 낮 기온이 섭씨 영상 35도는 족히 넘을 듯한 무더위에 포도가 새근새근 지쳐 잠든 이곳은 해가 지기만 하면 딴 세상이 된다. 오후 9시께면 어두워지는데, 밤에는 두꺼운 이불을 덮어야 할 정도로 기온이 뚝 떨어진다. 주야간 기온 차가 무척 심한 기후는 포도에는 운명인 듯싶다. 포도는 서늘한 기후에서 완벽하게 숙성되기 때문이다. 칠레의 와인 산업은 1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나 이탈리아에 비해 와인의 다양성이나 깊이가 떨어진다. 1980년대부터 해외 자본이 유입돼 현대화의 걸음마를 시작했고, 199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포도밭의 중요성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선견지명이 있는 일부 양조가들은 토양의 차이에 눈을 떴다. 지금도 사실 칠레는 양으로 승부하는 나라이며 뜨거운 태양 아래 농익은 포도로 만든 레드 와인 일변도의 생산 전략을 구사한다. 하지만 칠레는 변화하고 있다. 눈을 들어 태평양으로 가보라. 거기는 칠레 와인의 새로운 도전이 싹트는 곳이다. 서늘한 기후에서 새로운 스타일의 와인이 양조되고 있다. 이는 품종으로 보면 소비뇽 블랑, 샤르도네, 그리고 피노 누아에 어울리는 풍토다.산티아고에서 해안으로 가면 산 안토니오 밸리가 있고, 그 위에 카사블랑카 밸리가 있다. 바다가 무척 가까워 바다에서 피어오르는 안개와 스모그가 합쳐서 검은 색으로 해안을 수놓기도 하는 이곳에서 기존의 칠레 와인과는 완연히 구분되는 와인이 나온다. 품질로 보나, 스타일로 보나 특별하게 눈여겨볼 양조장으로는 가르세스 실바(Garces Silva)가 있다. 플랜테이션 토지 소유자들에게 와인 산업은 포트폴리오 차원에 불과했지만, 최근에는 이들도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서의 와인 산업을 인식하기 시작해 고품질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유칼리투스 나무가 행렬에 맞춰 길게 늘어선 가로수 길을 달려서 다다른 가르세스 실바는 산 안토니오 밸리에 속하는 레이다 밸리에 위치한다. 아마이나(Amayna)라는 브랜드를 통해 몇 가지 와인만 양조하는데, 20가지 이상 양조하는 보통의 양조장과 구분된다. 아마이나의 피노 누아 2006은 딸기, 체리의 과일 맛과 향이 제대로 농축돼 아로마가 풍부하고 자연스럽다. 질감은 미디엄 보디여서 부르고뉴의 깔끔한 마을 와인에 버금갈 정도로 싱그럽고 상쾌하다. 이런 쾌활한 느낌이 입 안에 넘치니 2주 동안 돌아본 칠레 와인 중에 단연 ‘서프라이즈’라고 생각한다. 전혀 기대하지 않은 신선하고 깔끔한 맛이다. 화이트 와인을 연이어 시음했다. 준비된 와인은 오크통에서 숙성한 소비뇽 블랑. 누가 소비뇽 블랑을 오크통에 넣을까. 그게 과연 제대로 맛을 낼까 의심했다. 그런데 맛이 꽤 괜찮았다. 아니 근사했다. “오크와 이렇게 잘 섞이다니.” 소비뇽 블랑의 새로운 차원이랄 수 있겠다. 풍부해진 아로마 속에는 바닐라가 있지만, 그게 무척이나 감미로운 울림을 준다. 질감도 확장되어 풀 보디에 가까운 입맛을 준다. 코와 입 속에서 신선한 기운을 느끼게 하며 삼키는 즐거움을 선사한다.산티아고에 가까운 마이포 밸리에는 칠레 대표급 양조장들이 즐비하다. 콘차이토로, 카르멘, 산타리타 등이 그것이다. 100년 이상의 기업화된 양조장들인 것이다. 한편 개인이 자신이 가진 토지의 뛰어남을 발견해 고품질 와인 생산을 시작한 곳도 있다. 종마 사업으로 이름난 하라스 데 피르케(Haras de Pirque)가 그 예다. 양조장 뒤쪽에 자리 잡은 산은 안데스에서 불어오는 한풍을 막아주며, 양조장 앞으로 펼쳐진 들판은 원형 경기장처럼 오목해 더운 열기를 잘 흡수한다. 밤과 낮에 빚어지는 극심한 기온 차로 인해 들판의 포도는 생기를 유지하며 잘 익어간다. 산 위에서 내려다보면 조성된 포도밭의 모양이 말발굽처럼 보인다. 하라스 캐릭터 카베르네 소비뇽 2004는 미세한 구조가 느껴지는 질감이 잘 정제된 입맛을 준다. 강하게 어필하지 않고 차분하게 입 안에 퍼지는 확장감이 좋다. 캐릭터 쉬라즈 2005는 부드러운 타닌 위에 여린 후추 향기가 신선하며, 고기반찬에 잘 어울릴 구조감을 지니고 있다. 레드 와인으로는 엘레강스가 단연 돋보인다. 2만 병 정도 생산했고, 카베르네 소비뇽이 주로 쓰였다. 농익은 과일맛과 부드러운 타닌과 신맛의 조화가 자연스러우며, 긴 여운을 준다. 실크처럼 길게 늘어지는 질감이 어느새 사라지는 듯싶다가도 금세 다시 화려한 향기로 되살아난다.1. 하라스 데 피르케 양조장 주인 에두아르도 마테(Eduardo Matte)2. 칠레에서 아니 남미에서 가장 큰 와인숍 앞에서 추파이야를 쓰고 포즈를 취하는 칠레 최고 소믈리에 엑토르 베르가라(Hector Vergara)3. 아마이나의 시음 와인들4. 칠레 기본 음식, 세비체칠레 산티아고=조정용 아트옥션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