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남권 신영투자신탁운용 상무(주식운용본부장)는 올 들어 급락 장세를 보이고 있는 증권가에서 가장 분주한 사람 중 한 명이다. 글로벌 시장과의 동조화 속에 우량주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자 조용히 관련주의 비중을 늘려가고 있는 것. 신영투신운용의 간판 상품인 ‘신영밸류 고배당주식형펀드’ ‘마라톤 주식형펀드’ 등의 총지휘자로, 한국밸류자산운용 이채원 전무와 함께 국내 가치 투자의 쌍두마차라는 점에서 그의 이 같은 투자 행보에 시장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주변 증시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투자 원칙을 고수한 때문에 성장주가 주도했던 작년에는 ‘BJR(배째라)’ 투자라는 핀잔을 듣기도 했지만 결국 미소 짓는 쪽은 원칙론자인 듯싶다. 밸류고배당펀드는 3월 현재 2003년 5월 설정 이후 225%, 마라톤펀드는 2002년 4월 이후 234%의 누적수익률을 기록 중이다. 반 토막 펀드가 속출한 가운데 두 펀드의 최근 3개월 수익률도 각각 마이너스 8%, 마이너스 10%로 선전하고 있다.그는 평소 “지옥에 한 번이라도 다녀온 사람만이 가치 투자자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펀드매니저에게 지옥이란 다름 아닌 고객이 맡긴 자산을 순식간에 까먹게 된 상황. 1990년대 말 허 상무는 외환위기 탓에 200억 원 가까운 투자 손실을 봤던 쓰라린 경험이 있다. 가치 투자로 돌아선 후 고객들에게 수천 억 원의 이익을 안겨준 것은 당시의 막대한 수업료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펀드매니저는 수익률로 말해야 한다’는 믿음을 앞세워 좀체 언론과의 심층 인터뷰를 피하는 은둔의 펀드매니저 허 상무를 만나 투자 전략과 향후 시장 전망을 들어봤다.“경영진과 기업 가치를 믿고 회사를 산다는 마음으로 투자하는 면에서 나는 워런 버핏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가치 투자는 저평가 주식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다. 남보다 앞서 저평가된 주식을 찾아내는 부지런함과 기다릴 줄 아는 인내, 그리고 기다림에 확신을 주는 분석적 신념 3박자를 갖춰야 가능하다.”“외환위기 당시 날이 새면 하한가로 치닫는 주식을 쳐다보며 ‘대체 무슨 잣대로 투자해야 발 뻗고 잘 수 있을까’ 고민하며 수많은 불면의 밤을 보냈다. 덜 먹더라도 고객의 돈을 까먹지 않고 투자의 방향성을 고객도 예측할 수 있는 원칙 투자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당시 1만2000원에 산 대한해운이 2000원까지 떨어질 때도 버텼다. 결국 2만 원대로 회복될 때까지 갖고 있던 덕분에 ‘지옥’에서 살아왔다. 지난해 대한해운이 29만 원까지 뛰는 것을 볼 때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현재 펀드 시장의 가장 큰 문제는 실패를 경험한 펀드매니저가 드물다는 점이다. 지수가 500에서 2000까지 달려온 지난 5년은 펀드매니저들에게 가장 ‘해피’한 시간이었으며 개인적으로도 입사 이후 본 적이 없던 초강세장이었다. 하지만 이는 거꾸로 많은 매니저들이 리스크 관리를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다는 역설도 된다.”‘주당순자산가치(PBR) 1배 이하 기업을 주로 보는데 요즘은 크게 하락해 0.5배 수준인 우량주들도 적지 않다. 이들 종목 가운데 경기 사이클이 바닥권이고 전고점 대비 60∼70% 하락한 종목들을 주 타깃으로 하고 있다. 최근에는 유동성이 적으면서 지분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 대기업 우선주와 신저가를 경신할 정도로 급락한 은행주를 매입했다.”“여전히 중국이 성장의 축이 될 것으로 본다. 따라서 중국 관련 소비재 업체나 커머더티(commodity) 관련주에 관심을 두고 있다. 중국법인이 진출 2년 만에 1000억 원의 매출을 달성한 CJ홈쇼핑이나 참치 쿼터권을 갖고 있어 국내 상장사 중 유일하게 커머더티 관련주로 꼽히는 동원산업 등이다. 동원산업은 작년 말부터 사들여 7%까지 확대했다. 또 중국 버스 사업을 추진 중인 금호그룹 관련주 농심 아가방 등 소비재 중심으로 비중을 늘리고 있다.”“글로벌 증시의 방향키인 미국 내에서도 시장에 신뢰를 갖지 못하고 있는 게 문제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여진이 얼마나 지속될지 아무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국내 증시는 사실상 완전히 주도권을 잃은 상태다. 이 같은 상황에서는 결국 보유 중이거나 매입할 주식이 기업 가치에 비해 싼지, 비싼지 등의 방식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역발상적으로 생각하면 악재가 오히려 우량주를 싸게 살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그 어느 때보다 가치 투자 원칙이 절실한 시점이다.”“1800선을 뚫지 못하고 1700선 아래서 추세 장기화 시 손절매성 환매 사태가 나타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지난해 말 2000선에서 급작스럽게 1600선으로 무너질 때는 환매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횡보세가 계속되면 손절매에 나설 투자자가 나올 것이다.”“지속 성장이 장기적으로 가능한 기업에 투자하는 SRI(Socially Responsible Investment) 펀드를 1∼2개월 내에 내놓을 계획이다. 준비는 오래했으나 성장주가 주도했던 지난해 상황에서는 여의치 않았다. 기업의 경영 투명성에 초점을 맞추는 CSR(기업사회책임) 펀드와 달리 투명한 경영을 펼치고 있는 기업 중 업종 내 지배사업자이면서 주주 이익을 높이는 기업이 투자 대상이다. 포스코가 좋은 예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세계적 인증기관인 노르웨이 DNV의 자문을 바탕으로 기업을 선별할 계획이다.”“개인적으로 지난해 일본 펀드에 투자했다가 혼쭐이 난 적이 있다. 일본 펀드 붐을 일으켰던 지난해 초 가입했던 일반 투자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때 50배에 달했던 주가수익률(PER)이 14배 수준까지 떨어진 우량주들이 속출하고 있어 가치 투자 기준에서 충분히 떨어졌다고 본다. 일본 제휴사인 스미토모 미쓰이와 공동으로 중소형 가치주 펀드를 계획하고 있다.”“원자재 펀드를 내놓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본다. 지난해 베트남 중국 펀드 사례에서 보듯 남들이 다들 잘된다고 할 때 뛰어드는 동행 투자는 남보다 먼저 뛰어내려야 하는데 그 타이밍을 잡기가 쉽지 않다. 또 역발상적으로 접근하는 가치 투자 개념과도 배치된다.”허남권신영투자신탁운용 상무(주식운용본부장)고려대 행정학과신영증권 입사신영투신 이사글 김형호·사진 이승재 기자 chs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