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에서 은행에 가면 짜증이 난다. 통장을 개설하든, 송금을 하든 창구 앞에서 20~30분 기다리는 건 기본이다. 성격 급한 기자는 10분을 넘기지 못하고 대기 번호표를 찢어 버리고 그냥 나와 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시내든, 동네 지점이든 똑같다.일본의 은행 창구가 밀리는 건 아이로니컬하게도 은행 직원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돈을 송금하려고 창구에 신청서를 내면 창구 직원은 송금 신청서가 제대로 작성됐는지만 확인하고 뒷자리 직원에게 넘긴다. 그 직원은 송금 신청서를 전산에 입력한 뒤 결과를 다시 상급자에게 올린다. 상급자는 신청서부터 전산 입력까지 일일이 확인한 뒤 결재 도장을 찍는다. 결재가 떨어진 서류를 창구 직원이 찾아와 고객에게 전달해야 일이 끝난다.창구에 접수하면 즉석에서 전산 처리해 1~2분 내에 송금을 마치는 한국의 은행에 비하면 일본 은행의 업무 처리는 한참 ‘후진적’이다. 이런 후진성은 일본의 금융 구조조정이 덜 된 탓이다. 일본은 거품 붕괴 후 시중은행들이 합병을 하긴 했지만 직원들은 별로 자르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한 사람이 해도 될 일을 두세 사람이 나눠 한다. 시간이 더 걸릴 수밖에 없다.그런 일본이 ‘금융 후진국’을 탈피하기 위해 최근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정부와 기업들이 스스로 나서 수도 도쿄를 국제금융센터로 키우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거품 경제 붕괴 이후 ‘잃어버린 10년’을 넘어 제조업을 중심으로 되살아난 일본이 이젠 금융 선진화로 타깃을 돌리고 있다는 얘기다.일본 정부는 최근 국제금융센터를 위한 마스터플랜을 마련하고 규제 완화 등 각종 지원 방안을 잇달아 발표했다. 이를 배경으로 일본 최대의 부동산 개발 회사인 모리빌딩은 자신들의 주요 거점인 롯본기(六本木) 일대를 국제금융센터로 개발하는 방안을 내놓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도쿄증권거래소가 있는 도쿄역 앞의 니혼바시(日本橋) 지역을 국제금융센터로 육성한다는 방침이어서 국제금융센터 조성을 둘러싼 민·관 경쟁 양상까지 벌어질 판이다.모리빌딩은 오는 2016년까지의 중장기 경영 계획에서 롯본기를 중심으로 재개발 사업을 확대해 하루 24시간 풀가동되는 국제금융센터를 조성할 뜻을 분명히 했다. 이를 위해 롯본기 일대를 고층 오피스빌딩과 레스토랑 주거·문화 시설이 들어서도록 복합 재개발해 국내외 금융회사와 로펌 회계회사 등을 적극 유치할 계획이다.롯본기는 아카사카(赤坂) 아오야마(靑山)와 함께 도쿄 도심의 트라이앵글을 이루는 지역. 특히 외국인과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번화가로 유명하다. 이곳에 있는 롯본기힐스라는 빌딩은 롯본기를 대표하는 복합 빌딩이자 관광 명소이기도 하다.모리빌딩이 도심 재개발로 건설한 롯본기힐스는 대지 면적 11만2370㎡(옛 3만4000평), 건축 연면적 72만7100㎡(옛 22만 평)로 54층 오피스빌딩인 모리 타워와 21층 특급 호텔 그랜드하얏트 도쿄, 최고 43층의 고급 아파트 4개 동(840가구)이 주축이다. 아사히TV 방송국과 야외 스튜디오, 아홉 개의 대형 스크린을 갖춘 영화관, 120여 개 점포의 고급 쇼핑몰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모리빌딩은 롯본기힐스와 같은 재개발을 통해 롯본기 일대를 국제금융센터로 만든다는 복안이다.일본의 금융청도 일본은행(BOJ) 본점이 있는 도쿄역 앞 니혼바시(日本橋)에서 도쿄증권거래소가 있는 가부토초(兜町)까지의 지역을 새로운 금융가로 육성한다는 방침이다. 이곳을 아예 ‘금융특구’로 지정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이 지역엔 지금도 노무라증권 다이와증권 메릴린치일본증권 등의 본점이 있다. 하지만 더 많은 국내외 금융회사를 유치해 일본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금융센터로 만든다는 전략이다.작년 여름 야마모토 유지 당시 금융청 장관은 재일 미국상공회의소 주최 행사에 참석해 “국내외 금융회사나 로펌 회계법인 등이 밀집해 다양한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신금융가를 조성하고 싶다”고 밝혔다. 금융청은 니혼바시와 가부토초 지역을 금융특구화해 용적률과 층고 제한 등 규제를 대폭 푸는 방안도 고려 중이다. 국내외 금융회사 유치를 위해 사무실과 고급 임대 아파트가 들어가는 최첨단 고층 빌딩 건설을 촉진하자는 의도다. 금융청 관계자는 “지금도 외국계 투자은행(IB) 등 금융회사들은 첨단 내진 설계와 보안 시설이 갖춰진 넓은 사무실을 찾고 있지만 도쿄 시내 빌딩 오피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금융청은 또 금융특구엔 오피스와 아파트 외에 고급 호텔과 영어로 진료하는 병원, 외국인 자녀를 위한 국제학교 등도 적극 유치해 외국인이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할 계획이다. 특히 해외 시장과의 시차로 인해 밤이나 새벽에도 근무하는 금융회사 직원들을 위해 24시간 영업하는 레스토랑과 헬스클럽 등도 입주시킨다는 구상이다.일본 정부는 국제금융센터 조성을 위해 미국 뉴욕의 월스트리트와 영국 런던의 시티 등을 벤치마킹하고 있다. 최근엔 관련 공무원들을 뉴욕과 런던에 보내 자료와 정보 수집에 나서기도 했다.일본 정부가 도쿄증권거래소를 키우기 위해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도 국제금융센터 전략과 맞물려 있다. 일본 정부는 도쿄 증시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주식과 선물, 원자재 상품을 모두 거래할 수 있는 통합거래소를 만드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통합 시장에선 앞으로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도 이뤄지도록 한다는 목표다.또 도쿄증권거래소는 런던증권거래소와 손잡고 도쿄에 아시아 신생 기업을 위한 거래소를 세우기로 했다. 새 거래소는 런던판 나스닥시장인 ‘AIM(대안투자시장)’을 모델로 삼고 있다. 올해 말 개설이 목표다. 최근 제조업 분야의 일자리 감소로 고민하던 일본 정부는 이번 거래소 신설이 고용 창출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낮은 은행 이자로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일본 투자자들과 사업 확대를 위해 자금 조달이 필요한 아시아 지역 기업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일본이 도쿄의 국제 금융센터 전략을 추진하는 것은 경쟁력 낮은 금융 산업에 대한 위기의식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잃어버린 10년’ 동안 도쿄 금융시장이 활력을 잃으면서 국제 금융시장으로서의 매력을 잃었다는 판단이다. 실제 뉴욕 증시는 시가총액 기준으로 1990년 말 이후 약 6배 성장했지만 일본 증시는 1.58배 크는 데 그쳤다. 같은 기간 중국 상하이증시는 무려 55.69배 성장했다.1990년 도쿄 증시에 상장된 외국 기업은 125개사에 달했지만 2005년엔 28개사로 줄었다. 뉴욕 증시엔 2005년 현재 350개 다국적 기업이 상장돼 있다. 작년 중 미국 나스닥에 새로 상장한 기업은 모두 197개사, 런던은 184개사에 달한다. 반면 도쿄는 34개사에 그쳤다. 아시아 지역 경쟁 거래소인 홍콩(63개)과 싱가포르(46개)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일본 정부의 국제금융센터 추진엔 회의적인 반응도 없지 않다. 도쿄는 지금도 규모 면에선 아시아 최대이자 미국 뉴욕에 이어 세계 2위의 금융센터다. 그러나 세금이 많고 규제도 비효율적이어서 외국 투자자들이 꺼리고 있는 게 현실이란 지적이다. 회계 기준도 국제 수준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불만이 많다.정부가 직접 나서 도쿄를 매력적인 국제금융센터로 만들기 위해 개혁 작업을 벌이고 있지만 그 효과는 미지수라는 게 회의론의 배경이다.외국 금융인들은 첨단 빌딩과 고급 아파트 등 하드웨어 환경도 중요하지만 규제 완화 등 소프트웨어적인 변화가 더 긴요하다고 지적한다. 올 초 월스트리트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뉴욕을 방문했던 야마모토 유지 당시 금융청장에게 국제금융계 인사들은 “일본이 과감하게 규제를 풀어 금융시장을 개방하지 않는다면 아시아의 작은 나라 중 하나로 남을 수밖에 없다”고 충고했다.실제 싱가포르에선 2주일이면 끝나는 투자 펀드 인가가 일본에선 6개월이나 걸린다. 모건스탠리 도쿄지사의 로버트 펠드먼 이코노미스트는 “현재 도쿄에 진출한 외국 금융회사들은 안전하고 편리한 도시 환경 때문에 굳이 도쿄를 떠나지는 않을 것”이라며 “그러나 규제 환경을 개선하지 않는 한 더 이상의 외국 금융사들이 도쿄를 찾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동북아시아 금융 허브를 지향하고 있는 한국이기에 남의 얘기로만 들리지 않는다.차병석 한국경제신문 도쿄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