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으로부터 10년 전. 미국 주식시장의 광풍 한가운데에 아무도 반기지 않는 예언자가 나타났다. TV와 경제신문을 통해 전해진 그의 메시지는 생뚱맞았다. ‘주식에서 눈을 떼고 상품에 투자하라.’ 미국인 가운데 60%가 주식시장에 발을 담그고 있었고 심지어 직장을 그만두고 데이 트레이딩으로 생활비를 버는 사람까지 나오던 때였다. 그에 비하면 원자재 시장은 고리타분할 뿐이었다. 1970년대 상품 거래로 짭짤한 수익을 올렸던 메릴린치도 더 이상 나올 게 없다며 상품 사업에서 손을 떼기로 한 터였다. 월가의 반응은 심드렁하기만 했다.하지만 그의 전망은 적중했다. 21세기 들어 원자재 값은 심상치 않은 곡선을 그리다 지난해부터 기록적 고공 행진에 돌입했다. 국제 유가는 배럴당 100달러, 금은 온스당 1000달러로 아예 자릿수를 바꿨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곡물 시장까지 요동치기 시작했다. 콩과 옥수수, 설탕과 코코아 등 거의 전 종목이 투자자들의 화두로 떠올랐다. 언론은 뒤늦게 예언자를 재조명하기 시작했고 투자자들은 그의 한마디 한마디를 받아 적기에 바빴다. ‘월가의 신화’ ‘상품 투자의 귀재’, 짐 로저스(66·로저스홀딩스 대표)의 화려한 귀환이었다.그의 메시지는 10년 전과 다를 바 없다. 중국 경제의 무서운 성장세가 상품 수요를 끌어올리고 있으며 원자재 붐이 막 시작됐다는 것. 얼마 전 방한해서도 “주식에는 관심 없고 상품 투자에만 올인하고 있다”고 당당하게 밝혔다. 그는 상품 시장 강세장이 1990년대 말에 시작됐으며 2020년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상품 투자론이 적어도 10년 이상은 약발을 이어갈 것이란 얘기다.짐 로저스는 어떻게 상품 시장의 문을 두드리게 됐을까. 1998년 그는 마이크로소프트, 시스코 등 소위 기술주들이 잘나가는 사이 다른 주식들은 하락하고 있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였다. 다우지수는 1980년대 이후 10배 이상 상승하고 있었지만 강세장이 영원할 수는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대신 에너지와 곡물, 금속 같은 상품들은 대공황 이후 유례없는 최저치에 달해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코웃음칠 때야말로 투자에 뛰어들 타이밍이라는 동물적 감각이 그를 움직였다.당시 짐 로저스는 새로운 밀레니엄의 도래를 기념하며 3년간의 세계 일주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상품 시장 강세장의 개막을 시베리아나 아프리카에서 멍하니 지켜보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비행기에 타기 전에 상품 시장의 새로운 인덱스 펀드부터 만들기로 결심했다. 이를 위해 당시 알려진 상품지수인 CRB선물지수(현 로이터-CRB상품지수)나 골드만삭스 상품지수 등을 조사했다. 하지만 상품 비중이나 구성 등 모든 게 그의 까다로운 눈에 들지 않았다. 다우존스 상품지수를 발표하는 월스트리트저널의 지인을 찾아갔을 때는 더 기가 막혔다. 편집인이면서도 자기 신문에 매일 그런 지수가 나오는지도 모르고 있었던 것.그는 결국 믿을만하고 균형 잡힌 상품지수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1998년 8월 1일 35개 상품이 포함된 로저스 인터내셔널 상품지수(RICI)와 이에 기초한 인덱스 펀드가 출범했다. 짐 로저스가 여행을 다니는 사이 닷컴 거품이 터졌고 주식시장에 파문이 일었다. 2001년 그가 미국에 돌아왔을 때 로저스상품지수는 80% 올라 있었다. 상품 투자의 시대가 문을 연 것이다.“상품 시장에 신비스러운 것은 전혀 없다. 옥수수는 옥수수고 납은 납이다. 금 역시 그것의 공급량이 얼마나 되며, 돈을 내고 그것을 가져가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가격이 결정된다. 더욱 분명한 사실은 상품 가격이 장기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가를 파악하는 데는 아무런 마술도 없다는 사실이다.” 로저스 저, ‘상품시장에 투자하라(Hot commodities, 2004)’그의 상품 투자론은 단순하고 간결하다. 초등학생도 아는 수요와 공급 법칙이 원자재 투자의 밑바탕이라는 것. 하지만 주식시장 광풍 속에서 상품에 눈을 돌린 혜안은 교과서 밖에서 나왔다. 그는 1980년 한창 때인 37세에 퀀텀펀드로부터 공식 은퇴했다. 1969년 조지 소로스와 함께 만든 퀀텀펀드로 12년간 3365%라는 엄청난 수익을 올린 후였다. 그는 미련 없이 여행 짐을 꾸렸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오토바이 세계 일주를 하기 위해서였다. 22개월간 52개국, 6만5000마일을 달린 것으로도 모자라 밀레니엄 기념 여행에서는 3년간 노란색 벤츠로 116개국을 쏘다녔다.짐 로저스에게 여행은 단순한 모험이나 여흥이 아니었다. 그는 여행이야말로 ‘삶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야 할 배움의 과정’이라고 여겼다. 중국의 농촌과 몽골의 사막지대, 남미의 슬럼을 거침없이 횡단하며 새로운 시장의 지도를 그렸다. 특히 역동하는 중국 경제의 가능성은 놀라움 자체로 다가왔다. 그는 21세기 중반이 되기 전에 중국이 세계 제1의 경제 대국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대만의 경제 기적에 감화된 13억 인구가 무서운 경제 성장을 이끌어나갈 것이었다. 게다가 중국의 1자녀 갖기 정책은 자본주의적 성취욕에 물든 젊은 세대의 약진을 의미했다. 에너지와 금속 곡물 등 원자재 수요는 신흥시장 성장으로 급증할 것이 분명했다. 꿈틀대는 저잣거리에서 얻어낸 살아 있는 정보들이 상품 투자론의 살과 뼈가 된 셈이었다.그는 지금도 대표적인 중국 통으로 꼽힌다. 그가 중국 기업의 주식을 처음 산 것은 20년 전 중국 횡단을 할 때였다. 당시 비포장도로 앞의 초라한 상하이 증권거래소에서 구입한 그 주식을 그는 아직도 액자에 넣어 자기 집 벽에 걸어 놓고 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보유해 자신의 어린 딸에게 유산으로 남겨주겠다고 공공연하게 밝히곤 한다. 딸에게 중국어를 가르치기 위해 중국인 가정부를 채용한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뉴욕의 집을 팔고 아예 싱가포르로 이사했다. 원래는 베이징과 상하이 등 중국의 핵심 지역으로 옮길 생각이었지만 대기오염 때문에 그나마 가까운 싱가포르를 선택했다는 전언이다.짐 로저스는 이제 막 상품 시장의 문을 두드린 투자자들에게 ‘기본에서 시작하라’고 조언한다. 월스트리트저널의 선물 페이지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수학적 모델과 이론으로 무장한 기술적 분석도 그는 탐탁하지 않게 본다. 짐 로저스에게 중요한 것은 실물 경제를 움직이는 ‘구체적인 현실’이다. 상품별로 과거의 강세장과 약세장, 현재의 생산 능력과 생산량, 가동 중인 광산의 현황, 농산물과 에너지 수급에 영향을 미치는 기상 정보까지 파악해야 한다. 한마디로 상품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꿰뚫는 혜안을 갖춰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알려면 상품에 대한 기본적인 공부가 필수다. 투자자에게는 꽤나 머리 아픈 일이지만 보상은 적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이제 당신도 이 세상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었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다. 어느새 그동안 당신이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던 설탕이나 구리 따위와 관련된 여러 뉴스와 사실들이 당신의 삶 속으로 들어오고, 신문을 읽으면 알루미늄이나 비육우 같은 단어가 당신의 눈을 사로잡을 것이다. 상품 시장에 대해 알게 되면 단지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질 뿐 아니라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의 세계로 들어설 수 있다.”김유미 한국경제신문 기자 warmfron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