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 가슴이 저려왔다. 어떻게 시작한 건데…. 현실의 벽은 역시 높았다. 성공이 손에 닿을 만한 거리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그렇게 한심해 보일 수 없었다. 큰 기대 속에 무대에 올린 창작 뮤지컬 ‘댄싱 쉐도우’가 흥행 실패라는 참담한 성적표를 남기고 막을 내리던 순간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스태프들에게 위로의 말을 던졌다.“실패라고 생각하지 맙시다. 이번 일을 거울삼아 세계인이 감동할 우리의 고유 창작 뮤지컬을 만들어 봅시다. 저 자신도 이번 일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됐으니 다음번에는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어쩌면 그는 이 말을 스태프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했는지 모른다.박 대표는 한국 뮤지컬계를 이끌고 있는 선두 주자다. 기초조차 정립되지 않았던 뮤지컬을 영화, 연극과 함께 한국 공연 산업의 트로이카로 성장시킨 것은 순전히 그의 공이 컸다. 흥행에 성공했던 작품 모두가 그의 손을 거쳐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는 한국 뮤지컬 산업의 살아 있는 신화다. 그가 뮤지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98년 브로드웨이 뮤지컬 ‘더 라이프’를 기획하면서부터다. 당시만 해도 국내 무대에 오르는 뮤지컬은 ‘아가씨와 건달들’,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넌센스’ 등 해외에서 30~40년 전 막이 오른 것들이 고작이었다.“재탕 삼탕은 물론, 남의 작품을 베껴 공연을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어요. 그래서 미국 브로드웨이로 넘어가 정식 계약을 추진하는데 우여곡절이 참 많았습니다. 뉴욕과 런던에서 개막되는 작품을 한국 극단들이 무단으로 쓰고 있다는 것이 세계 뮤지컬계에 이미 소문이 다 나 있었던 터라 정식 계약을 해주지 않았습니다.”한국 뮤지컬 역사에 있어서 ‘더 라이프’는 뉴욕 브로드웨이와 동시에 공연된 최초의 작품으로 기록된다. 일본에 있는 대행사를 통해 계약서를 체결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지만 공연은 대성공이었다.‘더 라이프’가 박 대표의 성공 가도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면 ‘렌트’는 한국 뮤지컬의 대박 가능성을 알려준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지난 2000년 막을 올렸던 ‘렌트’는 공연마다 매진 행진을 기록했고 당시 20~30대 사이에서는 ‘렌트’를 보지 않고는 대화에 끼지 못할 정도로 빅 히트를 쳤다. 출연자의 팬 카페가 등장한 것도 ‘렌트’ 이후부터다.이후 ‘시카고’, ‘키스 미 게이트’, ‘카바레’, ‘갬블러’ ‘유린타운’, ‘틱틱붐’ 등 연이어 터진 박 대표의 흥행 성공은 ‘아이다’와 ‘맘마미아’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제작비 120억 원을 들여 8개월간 기획한 ‘아이다’는 국내 뮤지컬 사상 최장 공연 작품으로 기록되고 있다. 가수 옥주현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스타 마케팅의 극대화를 꾀한 것도 그의 아이디어다. 무대를 화려하게 꾸미다 보니 제작비가 당초 예상보다 많이 들어갔지만 이 작품은 브로드웨이에서 올리는 것 못지않게 작품 수준이 높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의상도 브로드웨이에서 직접 공수해 왔다. 어쨌든 아이다는 공연 4개월 만에 10만 관객을 돌파했고 결국 150억 원의 매출액을 기록했다. ‘아이다’는 20~30대의 전유물이었던 관객층을 40~50대로 확대시켰고 여기서 얻은 노하우는 ‘맘마미아’에 이르러 화려하게 꽃을 피운다.40대 미혼모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에 전설적인 록그룹 ‘아바’의 노래를 입힌 ‘맘마미아’는 7080세대에게 아련한 옛 추억으로 다가왔다. 90억 원의 제작비를 들여 매출 350억 원, 순이익 45억 원을 벌어들인 ‘맘마미아’는 그를 대한민국 최고 뮤지컬 기획자로 올려놓았다. 아직도 ‘맘마미아’는 매 회마다 객석을 가득 채운 채 공연이 계속되고 있다. 2월 4일 현재 65만 명의 관객 동원을 기록 중이다.그의 성공 요인을 어떻게 풀이할 수 있을까. 우선 그는 선택과 집중에 탁월했다. 연극이 좋아 무작정 상경한 그는 서울 생활에서 혹독한 시련을 경험해야 했다. 1981년 배우로 입문한 그의 앞에는 극장에서 먹고 자는 삼류 배우 생활 밖에 없었다. 어디서 자고 어디서 끼니를 때워야 하는지는 고민 축에도 끼지 못했다. 가장 큰 고민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대학로(연극계) 바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였다.“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연극배우의 삶이라는 게 참 척박했어요. 서른두 살에 작품 하나 하고 처음 100만 원을 받아봤을 정도로 고생했죠. 보통 작품 하나가 3~4개월간 열리는 걸 감안하면 고생스러움이야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탤런트 김갑수, 뮤지컬 연출가 한진섭, 연극 연출가 박근형 씨가 당시 대학로 뒷골목에서 전전긍긍하던 제 친구들입니다. 하도 생활이 어려워 결혼도 서른일곱에 했거든요. 기초를 다지기 위해 뒤늦게 서울예대 무용과에 입학했지만 배우로서 성공할 가능성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그때부터 그는 배우가 아닌 연출가로 출발을 선언했다. 그리고 시작한 첫 작품이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다. 하지만 역시 참담한 실패를 맛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연출자와 기획자로서 자신의 가능성을 찾았고 1989년부터 연극 프로듀서로 본격 출발한다.그는 자신의 성공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성공이라고 말하기는 이르죠. 이제 1차 성공을 이뤘다고나 할까요. 우리 현실에 뮤지컬도 흥행이 된다는 것을 입증했다는 것만으로도 반은 성공입니다. 나머지 반은 우리만의 창작 뮤지컬을 만드는데 달렸습니다. 그런데 쫄딱 망했으니….”‘댄싱 쉐도우’는 한국 창작 뮤지컬의 성공 가능성을 엿봤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론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뒀다. 애초부터 대박을 터뜨릴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막상 실패로 나타나자 박 대표의 실망감도 컸다. 이 작품에 대한 평단의 반응은 극과 극이다. 한국 뮤지컬의 질적 성장을 위한 수업료와 함께 무대, 음악, 조명 등 작품 외적인 요소는 수준급이라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는가 하면 결말이 모호하고 실험성만을 강조해 대중성이 결여됐다는 비판도 함께 받는다. 물론 그도 이 작품을 준비하면서 25억 원가량의 손해를 봤다.“외부 자본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 극단의 자본금만으로 작품을 준비하다 보니 손실이 예상보다 컸습니다. 제가 보기에 ‘댄싱 쉐도우’의 실패 요인은 세계적 보편성을 너무 추구했다는데 있습니다. 우리만의 정서를 잃어버렸죠. 원작이 희석되다 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하지만 그에게 ‘댄싱 쉐도우’의 실패는 한낱 숫자일 뿐 따져보면 넓은 시각에서 보면 오히려 얻은 것이 더 많다. 무엇보다 한국적인 뮤지컬을 만드는 방법을 ‘댄싱 쉐도우’의 실패에서 배웠다. 그는 올 연말에 김영하 소설 원작의 ‘퀴즈쇼’를 올릴 예정이고 내년에는 장유정 작가가 쓴 ‘그레이트 미스코리아’와 황지우 원작의 ‘오월의 신부’도 창작 뮤지컬로 만들 생각이다. ‘헤어스프레이’가 2월 13일 현재 7만5000명의 관객 동원을 기록했고 ‘시카고’, ‘맘마미아’가 흥행 돌풍을 이어가면서 매출도 다시 성장세로 돌아섰다. 현재 신시뮤지컬컴퍼니는 ‘헤어스프레이’와 ‘맘마미아’ 외에 연극인 박정자가 주연한 ‘19 그리고 80’을 예술의 전당에 올리고 있다.최근 뮤지컬 산업은 양극화가 심하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표현이 딱 맞다. 일본 거대 극단인 시키가 선보인 ‘라이온 킹도’ 36억 원 적자라는 초라한 성적표만을 남기고 1년 만에 막을 내렸다. ‘라이온 킹’이 적자로 끝난 케이스는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다.그는 현 상황을 심각한 위기라고 진단한다. “지난해 50여 편의 작품이 올랐는데 성공한 작품은 5~6편이 채 못 됩니다. 문제는 지금과 같은 제작 시스템 아래서는 이 같은 일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뮤지컬이 돈이 된다고 하니까 외부 투자는 수월해졌는데 오히려 뮤지컬 산업 전반엔 독이 되고 있습니다. 작품에 대한 애착이 없는 상황에서 보따리 장사만 잔뜩 모이고 있기 때문이죠.”그는 현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선 “거품부터 빼는 것이 중요하다”고 진단한다. 돈벌이 수단이 아닌 문화 산업 육성 측면에서 접근하는 투자자부터 선별적으로 가려내야 한다고 말한다. 뮤지컬 기획자들은 규모가 작은 무대부터 노하우를 쌓아나가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다.서울연극협회장을 겸하고 있는 그는 연극 산업의 활성화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올 6월에 제1회 차범석희곡상을 수상한 김명화 씨의 ‘침향’을 대학로 아르코 대극장에 올리는 것을 시작으로 매년 1편씩 대형 연극 작품을 무대에 올릴 생각이다.그의 성공은 이제 시작이다. 그런 면에서 ‘댄싱 쉐도우’는 그의 내성을 한층 강하게 만들어줬다. 그의 행보에 뮤지컬 업계 전체가 주목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박명성신시뮤지컬컴퍼니 대표·프로듀서서울예대 무용과 졸업서울연극협회장중앙대 연극학과 겸임교수한국뮤지컬대상 최우수작품상(댄싱쉐도우·2007)올해의 프로듀서상(2007)글 송창섭·사진 이승재 기자 realsong@moneyr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