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 ③

(故)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과 고 이병철 삼성 명예회장의 골프 스타일은 전혀 딴판이었다.이 명예회장은 골프 장비를 모두 최고급으로 썼다. 레슨도 유명한 일본 프로에게서 제대로 배웠고 평소에도 골프 전문 서적을 탐독할 정도로 골프에 심취했다. 반면 정 명예회장은 10년이 지나도록 낡디낡은 골프 장비를 사용했다. 골프를 전문적으로 연구하지 않았고 스코어에 연연하지도 않았다.단지 두 사람의 공통점을 찾자면 모두 장타자로, 거리 욕심이 대단했고 정직하고 깨끗한 매너로 골프를 즐겼다는 점이다. 지저분하게 스코어를 속이고 동반자들의 눈을 피해 볼을 건드리거나 ‘알까기’를 하는 등 비겁한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 OB가 나거나 볼이 잘못 맞아도 캐디나 동반자 누구에게도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당시 동반자들은 정 명예회장이 이 명예회장에 대해 라이벌 의식이 강했다고 전한다.한번은 정 명예회장이 라운드하면서 이 명예회장을 거론한 일화다.“이 명예회장이 5만 달러를 주고 잭 니클로스와 라운드를 했다데. 18홀을 다 마치고 원 포인트 레슨을 받았는데 말이야. 니클로스가 딱 한마디만 하더래. ‘헤드업 하지 말라’고.”이 명예회장이 비싼 돈을 투자해 골프를 배우지만 결과는 그저 그렇다는 폄훼의 뜻이 담겨 있었다.정 명예회장은 라운드 도중 농담을 하며 화기애애하게 분위기를 주도했다. 어쩌다 버디라도 하면 캐디에게 팁을 주면서 호쾌하게 기분을 냈다. 내기는 거의 하지 않았지만 팁을 주기 위해 몇 만 원 정도는 항상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골프는 정 명예회장에게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었다는 게 주변 사람들의 전언이다.그는 “골프는 건강관리에 매우 좋다. 나이가 들면 반드시 골프를 해야 한다”는 얘기를 자주했다. 골프를 하면서부터 건강에 관한 한 자신감이 넘쳤다고 한다. 동반자들에게 입버릇처럼 “나는 백이십 살까지 살 것이다. 두고 봐라”고 말했다.1980년대는 재벌들이 독재정권을 도와주며 이른바 ‘정경유착’을 한다고 학생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던 시절이었다. 정 명예회장은 지인들과 라운드 할 때마다 “우리나라는 기업인이 존경을 받지 못한다. 존경은커녕 욕만 안 먹어도 좋겠다”고 토로했다고 한다.고금리와 낮은 환율 때문에 기업을 운영하기 어렵다며 정부의 대기업 정책에 대한 불만도 자주 털어놓았다.정 명예회장은 1992년 14대 대선이 끝나고 나서 몸이 극도로 나빠졌다. 옆에서 보기에 안타까울 정도로 건강이 악화돼 있었다. 대선 출마만 하지 않았어도 10년 이상 더 살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대선이 끝난 지 4∼5개월이 지나 골프장에 나왔는데 스윙을 제대로 못했다. 전 금강CC 헤드프로였던 이강천 프로는 ‘어떻게 이처럼 갑자기 건강이 나빠질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도 정 명예회장은 그 후 매주 골프장에 나왔다.하지만 건강은 다시 회복되지 못했다. 자주 몸을 잘 가누지 못해 주위에서 부축하려 했지만 질색하며 거절하곤 했다. 이때부터 그린에 올라가면 퍼팅을 딱 한 번만 했다. 이전에는 홀인할 때까지 퍼팅을 했었다.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전만 해도 정 명예회장은 100타 안쪽의 스코어를 낼 정도로 체력이 좋았다. 스윙도 거의 정상에 가까웠고 골프 카도 타지 않고 걸으면서 라운드했다. 겨울에도 아주 춥지 않으면 9홀이라도 돌았다. 중간에 라운드를 중단하는 일은 절대 없었다.가족들과 라운드하다가 누군가 잘못 치면 “젊은 놈이 그것도 못쳐”라면서 핀잔을 주기도 했다. 필드에서는 연습 스윙 없이 바로 치고 나갔다. 앞뒤를 재거나 방향을 보거나 하는 것이 없었다.특히 나이가 들면서 드라이버 샷 거리가 줄어들었는데 금강CC 5번 홀 앞의 연못을 넘기면 매우 좋아했다. 대선 후 건강이 악화되면서 드라이버 샷 거리가 더 줄어 이 연못을 넘기지 못하게 되자 정상영 KCC 명예회장은 티를 레이디 티 앞으로 빼 정 명예회장이 연못을 넘길 수 있도록 배려했다.정 명예회장은 따뜻한 사람이었다. 추석과 설날 등 명절이 오면 금강CC 임원과 헤드프로에게 선물로 멸치와 미역을 보내줬다. 캐디에게는 항상 친절하게 대해 주며 금전적으로도 후하게 도움을 줬다.금강CC 캐디마스터 길미희 씨는 1995년부터 6년간 정 명예회장의 전담 캐디였다. 길 씨는 정 명예회장과 카트를 함께 타고 다니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기회가 많았다고 한다.정 명예회장은 길 씨에게 “나도 가난하게 살았다. 그 가난을 벗어나 잘 살고 싶어 서울로 올라왔다”며 격려하곤 했다. 그늘집을 나오면 매번 길 씨에게 “밥 먹었느냐”, “뭐 마셨느냐”며 자상하게 배려했다. 또 길 씨가 “회장님은 무슨 음식을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면 “여기 소머리국밥이 맛있다”고 했다.금강CC 경기과장인 진광식 씨는 매주 일요일이 되면 정 명예회장을 위한 티오프 시간을 관리하곤 했다. 보통 오전 7∼8시에 정 명예회장이 라운드할 수 있도록 앞 팀과 뒤 팀의 시간을 조정하는 일을 했다.대선 이후 건강이 악화된 정 명예회장은 9홀을 채 돌지 못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5번 홀을 마치고 그늘집에서 잠시 쉬다가 돌아오곤 했다. 뇌졸중으로 몸 한쪽에 마비 증세가 와 볼을 제대로 못 칠 정도였으니 정상적인 라운드는 사실상 불가능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정 명예회장은 골프장에 나오는 그 자체를 무척 좋아했다.정 명예회장은 티샷뿐만 아니라 세컨드 샷도 길 씨가 고무 티 위에 볼을 올려주면 쳤다. 아이언은 그린 주변에서 어프로치할 때만 쓰고 드라이버와 우드를 주로 사용했다. 그린에서도 퍼팅을 딱 한 번씩만 했다.정 명예회장이 마지막으로 라운드한 것은 2000년 10월이었다. 이때도 9홀을 채 돌지 못했다. 4번 홀을 끝내고 5번 홀 티샷이 끝나자 “춥다”며 라운드를 마치고 클럽하우스로 돌아왔다. 이날을 끝으로 정 명예회장은 더 이상 라운드를 하지 않았다.그런데 정 명예회장은 한 번 더 골프장을 찾았다. 2000년 11월. 운명하기 4개월 전이었다. 이날은 월요일로 휴장일이었다. 예고도 없이 찾았다. 갑작스레 도착한 정 명예회장은 코스를 돌고 싶다고 했다. 몸이 불편해 승용차에서 내릴 수가 없어 차를 탄 채로 코스를 돌았다. 진 과장이 골프카로 정 명예회장이 탄 다이너스티 승용차를 앞에서 인도했다. 정 명예회장은 차 안에서 1번 홀부터 9번 홀까지 쭉 돌았다.길 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갑자기 골프장에 오셔서 마중을 나가니까 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안에서 물끄러미 저를 쳐다보셨어요. 제가 맞는지 확인하시는 것 같았어요. 코스를 돌고 온 뒤 귀가하실 때도 입구에 제가 서 있으니까 차를 멈추게 하더니 계속 저를 주시하다가 가셨지요. 무슨 할 말이 있으신 것 같았는데….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한은구 한국경제신문 기자 to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