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본 경제가 불안하다. 10년 불황의 터널을 지나 2001년 이후 사상 최장의 경기 회복기를 구가했던 일본 경제도 ‘서브프라임 쓰나미’의 파장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세계 경제 전문가들은 1년 전에 금년 일본 경제를 낙관했었다. 그러나 1년 후 미국의 경제 주간지 비즈니스위크는 ‘2007년 최악의 예측’ 가운데 하나로 일본의 경제 낙관론을 들었다. 지난해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파문으로 미국 경기의 침체 가능성이 제기됐을 때도 많은 전문가들은 일본 경제가 큰 영향을 받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그런 믿음은 작년 10월 말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2007년 3분기(7~9월) 경제지표가 ‘이상 신호’를 보낸 데 이어 이후에도 경제지표 대부분이 부진했다.물론 비관론 일색인 것만은 아니다. 거품 경제 붕괴 후 10여 년 간의 불황기 동안 외부 충격에 대한 내성이 강해졌기 때문에 서브프라임 파문으로 성장세가 꺾이는 일은 없을 것이란 견해도 있다. 올해 일본 경제는 2% 수준의 견조한 성장세를 이어갈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다.그러나 서브프라임뿐만 아니라 원자재 급등, 내수 회복 부진 등 일본 경제를 둘러싼 안팎의 환경이 그리 녹록하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일본 경제의 어두운 징조는 경제 주체들의 심리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다. 소비자 심리 지표는 악화일로다. 내각부가 최근 발표한 지난 1월 소비자태도지수는 37.5로 전월에 비해 0.5포인트 떨어졌다. 4개월 연속 하락한 것으로 2003년 6월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기업들의 경기 심리도 마찬가지다. 일본 경제가 회복되고 있다고 보는 기업인이 최근 두 달 사이 크게 줄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지난달 134개사 최고경영자(CEO)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 결과 ‘일본 경제가 회복되고 있다’는 응답은 64%였다. 작년 10월 79%보다 15%포인트 하락한 것이다.이를 반영해 기업들의 체감 경기를 보여주는 단칸 지수는 작년 4분기(10~12월) 19를 나타내 2년여 만에 처음으로 20을 밑돌았다. 특히 대형 제조업체와 서비스 기업이 일본 경제를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경제를 비롯한 세계 경제 전망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다.일본의 경기선행지수는 작년 10월까지 3개월 연속 기준점인 50을 밑돌았다. 일본은행은 일시적 타격이라고 단서를 달았지만 작년 12월 경기 보고서에서는 3년 만에 처음으로 경기 하강 가능성을 우회적으로 언급했다. 당시 시장에선 ‘금리 인하설’이 나돌았다.후쿠이 일본은행 총재는 “금리 정책의 기본 입장에는 변함없다”고 강조했지만 모건스탠리 미즈호증권 미쓰비시UFJ 등 금융사들은 일본은행이 경기 회복세를 유지하기 위해 6년 만에 처음으로 금리를 내릴 수도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우려가 확산되면서 일부에선 경기 침체론까지 등장했다. 모건스탠리는 “올해 일본이 고유가와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일본 정부의 규제 탓에 가벼운 경기 침체(mild recession)를 맞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어쨌든 일본은행은 지난 2월 15일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연 0.5%인 정책 금리를 또 동결했다. 1년째 동결이다. 향후 경기 전망이 불투명하기 때문에 금융 정책 기조를 바꾸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나카도 야스히로 다이와SB인베스트먼트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올 상반기 상황이 악화되면서 일본은행이 하반기 중 금리를 더 내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최근 경기지표의 감속은 일시적인 것이란 견해도 없지는 않다. 미국의 경기 부진으로 인한 심리적 영향으로 인해 경기 성장세가 주춤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일본 경제가 또다시 성장을 멈추거나 후퇴하는 일은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실제 경기 예측 전문 기관들 사이엔 올해 일본 경제가 2% 정도의 견조한 성장세를 보일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일본의 주요 기관들은 금년 중 일본 경제의 실질 경제성장률을 1.9~2.3%로 예상하고 있다. 개인 소비는 작년에 비해 1.0~2.4% 늘어나고 기업들의 설비 투자도 전년 대비 2~5%가량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금융회사 대학 등의 이코노미스트 20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경제 전망 결과도 비슷하다. 2008년 실질 경제성장률을 ‘2.0~2.2%’로 내다본 전문가가 23%로 가장 많았다. ‘1.8~2.0%’로 점친 사람은 16%로 나타났다. 응답자의 예측치를 가중평균하면 1.9%였다. 미즈호종합연구소 나카시마 쓰지 수석이코노미스트는 “기업 실적 둔화가 예상되지만 수출 주도의 완만한 성장세는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최근 집계된 일본 경제의 작년 4분기(10~12월) 실질 성장률은 예상을 크게 웃도는 연율 3.7%를 기록했다. 3분기의 1.3% 성장에서 크게 높아진 것이다. 당초 전문 기관 예상치의 두 배를 넘는 성장률이기도 하다. 블룸버그통신과 로이터통신은 일본의 4분기 성장률을 각각 연율 1.7%와 1.6%로 내다봤었다.일본의 작년 4분기 ‘깜짝 성장’은 수출 호조와 설비 투자 증가에 따른 것이다. 설비 투자는 전 분기에 비해 2.9% 증가했고, 수출도 전 분기 대비 2.9% 신장했다. 작년 4분기의 높은 성장은 침체론까지 대두됐던 일본 경제에 청신호임에 분명하다. 미나미 다케시 노린추킨연구소 수석이코노미스트는 “기업의 설비 투자가 아직은 견조하기 때문에 일본 경제는 오는 3월 끝나는 2007 회계연도(2007년 4월~2008년 3월)에 탄탄한 성장세를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이 때문에 주가 전망도 그리 어둡지 않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의 이코노미스트 조사에서 금년 말 닛케이 평균 주가는 ‘1만7000~1만8000엔’과 ‘1만8000~1만9000엔’을 내다본 응답자가 전체의 50%를 차지했다. 응답자 평균은 1만6754엔이다. 닛케이평균주가의 작년 말 종가는 1만5307엔이었다.구보다 마사유키 다이와스미긴투신의 시니어 펀드매니저는 “올해 닛케이 평균 주가는 최저 1만5300엔, 최고 1만9000엔을 기록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현재 일본 기업 주가에 대해선 ‘동이 트기 바로 전의 가장 어두운 시기’라고 진단했다.일본 경제의 올해 불안 요소로는 미국 경제의 감속, 원자재 가격 급등, 제도 변경에 따른 관제(官製) 불황 등 3가지가 주로 꼽힌다. 일본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최신호는 ‘2008년 일본 경제 대예측’이란 특집기사에서 이 같은 복병들을 지목했다.첫째, 미국 경제의 감속이다. 일본은 1990년대 중반만 해도 수출이 실질 경제성장률에 기여하는 비중이 낮았다. 그러나 그 후 점차 높아지기 시작했다. 예컨대 자동차 수출 대수는 2001년 460만 대에서 2006년 596만 대로 늘었다. 일본 내 전체 자동차 생산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도 19년 만에 50%를 넘었다.일본 경제가 이처럼 ‘수출에 의존하는 경제’로 급속히 바뀌었기 때문에 미국의 경제 후퇴는 북미 시장에 주력해 온 일본 기업들에 직격탄이 될 수 있다. 여기에 엔화 강세까지 겹치면 일본 전체 수출 기업이 타격을 입을 것으로 전망된다.둘째, 원자재 가격 폭등이 일본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미쓰비시UFJ리서치에 따르면 원유 가격이 배럴당 100달러가 되면 일본 기업들의 수출 대금은 배럴당 50달러 때에 비해 10조 엔(약 80조 원) 증가한다. 원유 가격 인상 움직임이 이어지면 일본 기업들은 인건비 등 다른 비용을 줄일 수밖에 없다. 이는 소비 감소로 이어져 일본 경제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셋째, 최근 강화된 건축법이나 각종 제도로 인해 경기가 후퇴할 가능성도 있다. 일본 정부는 2~3년 전부터 내진 설계 위조 등이 잇따라 적발되자 작년 6월부터 건축기준법을 크게 강화했다. 이로 인해 일본 전국의 신설 주택 착공이 급감하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 주택 착공 실적은 40% 정도 감소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이를 ‘관제 불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차병석 한국경제신문 도쿄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