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불안기 PB고객 동향

역시 한발 빨랐다. 일선 PB센터에 확인한 결과 상당수 거액 자산가들은 중국 증시가 불안한 행보를 보인 지난해 4분기를 전후해 세금 감면 혜택이 있는 해외 펀드를 중심으로 환매해 현금 비중을 확대해 놓은 상태다. 상당수가 고금리의 특판예금이나 머니마켓펀드(MMF) 등에 현금을 묻어두고 시장의 방향성이 잡히면 재투자하겠다는 민첩한 대응 전략을 세워둔 것. 일부 국내 주식형 펀드는 보유하면서 코스피지수가 급락할 때 조금씩 분할 매수하는 일명 ‘체리 피킹(Cherry Picking)’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박희명 대우증권 압구정 PB센터장은 “과감한 투자를 하지 않고 일단 현금 비중을 높인 채 기다리는 것도 중요한 투자 전략”이라며 “환매도 여의치 않을 정도로 시장이 요동치면서 현재는 수익률을 덜 까먹는 방어에 주안점을 두는 분위기”라고 전했다.실제 상당수 PB센터장들은 올해는 시장 안정이 가시화된 후 투자에 나설 것을 권하고 있다. 현주미 신한증권 강남 PB센터장은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의 파장이 장기화되면서 긴 호흡으로 투자 전략을 짜고 있다”며 “바닥권에서 매수를 저울질하는 고객이 여전히 많지만 과연 어디가 바닥인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하지만 이 같은 관망세에도 불구하고 한번 맛본 높은 고수익률의 중독성 때문에 현재 은행 예금이나 MMF, CMA(종합자산관리계좌) 등에 잠시 피신해 있는 대기 자금은 시장이 안정되면 언제든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높다는 게 일선 PB센터장들의 전언이다. 실제 100억 원대 금융자산가인 70대의 한 은행 PB 고객 A 씨는 단타 펀드 투자에 푹 빠진 대표적 사례다. A 씨는 “내 나이가 있는데 어떻게 장기 투자를 하느냐”며 ‘단타식’ 펀드 운용으로 지난해 40%를 웃도는 수익률을 올린 후 여전히 펀드로 돈을 굴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10억 원을 투자한 펀드 상품을 3개월 환매 제한 기간이 지나자마자 처분, 14억6000만 원으로 불리는 등 일명 ‘먹고 튀자’식 전략으로 고수익을 올렸다.PB 고객 가운데 특이한 것은 10억 원 안팎의 금융자산을 굴리는 고액 연봉 변호사나 의사 등 전문 업종 종사자의 대응이 생각보다 발 빠르지 못하다는 점이다. 김현구 하나은행 경복궁역 골드클럽 팀장은 “10억 원 안팎의 금융자산을 보유한 전문 직종 자산가들은 주식형 펀드 비중이 높은데 바쁜 직장 업무 때문에 상당수가 현금화 시기를 놓쳤다”며 “당분간은 지켜보자는 입장”이라고 설명했다.사모 ELS(주가지수연계증권), 부동산 사모 펀드 등 맞춤형 대안 상품으로 발길을 돌리는 투자자들도 늘고 있다. 지난해 과도하다 싶었던 해외 펀드 쏠림 현상이 올 들어 완화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사모 ELS는 10억 원 이상 위탁 시 고객이 원하는 종목과 구조로 설계가 가능해 포트폴리오 안정성이 상대적으로 높다. 과거 부동산 투자 경험이 있는 자산가 중 일부는 토지나 펜트하우스 등 고부가가치성 부동산으로 눈을 돌리는 사례도 포착되고 있다. 80억 원의 금융자산을 보유한 우리투자증권 PB센터의 한 여성 고객은 연초 펀드를 환매해 특정 지역의 토지를 산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고객은 과거 손을 댄 부동산마다 막대한 차익을 남겨 PB 고객들 사이에서 부동산에 관한 한 ‘미다스의 손’으로 꼽히는 투자 고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담당 PB에게도 매입 지역을 알려주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한정 우리투자증권 PB팀장은 “10억 원 이상 투자 시 개인이 원하는 구조로 설계가 가능한 사모 ELS를 통해 ‘원금보장+알파’ 수준의 수익률을 기대하는 고객이 늘고 있다”며 “하지만 일부 고객은 자신이 남들보다 잘 아는 실물 분야로 자산을 분산하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하지만 부동산 실물이나 금 은 등의 광물자산 투자는 아직까지 극히 일부 자산가에 한정된 현상이다. 특히 금 은과 같은 광물 투자는 소문과 달리 반짝 관심에 그치면서 관련 펀드 상품 인기도 시들한 상태다.‘펀드도 한방에 큰 손실을 볼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면서 국내외 부동산 프로젝트 등에 투자하는 사모 펀드도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10% 안팎의 안정적 수익률과 원금 보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대안 상품으로서의 매력이 높기 때문이다. 화성 향남 택지지구에 사모 펀드 방식으로 투자해 9%의 수익률을 올린 하나은행은 PB 고객을 위한 국내외 부동산 프로젝트를 적극 검토 중이다. 베트남 골프장 건설, 마카오 호텔 건립 등 리조트 사업은 물론 국내 빌라 단지 개발 등의 실물 간접 투자 상품도 고려하고 있다. 김현구 팀장은 “펀드도 한번에 큰 손실을 볼 수 있다는 위험성을 경험하면서 1인당 5억 원 안팎 규모로 참여할 수 있는 사모 펀드에 대한 관심이 높다”며 “PB 입장에서도 고객의 자산 분산 투자 차원에서 사업성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일선 PB센터들도 뚜렷한 방향성을 잡지 못하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다소 있지만 대부분 보수적 입장이다. 연초에는 ‘물타기를 해서라도 펀드 손실을 줄여야 한다’ ‘낙폭이 큰 중국 펀드 비중을 높여야 한다’는 의견도 강했으나 조정이 길어지면서 모두 조심스러운 반응이다. “올해는 일단 시장이 안정화된 것을 보고 들어가도 늦지 않다”는 게 일선 센터장들의 조언이다.박희명 대우증권 센터장은 “지난해 급등했던 조선주 에너지주 위주의 낙폭이 커지면서 펀드 외에 관련 ELS 상품 해지 문의가 늘고 있다”며 “서브프라임 외에 프라임 모기지에 대한 불안감도 제기되고 있어 최대한 보수적 접근을 권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주미 굿모닝신한증권 강남 PB센터장은 “연초보다는 급락 가능성이 완화되고 있어 투자 심리는 다소 안정화돼 장기 투자자들에게 1600선에서 펀드나 직접 투자 모두 분할 매수를 권하고 있다”며 “하지만 직접 투자를 선호하는 30∼40대 자산가의 경우 단기 매매 경향이 강화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김형철 국민은행 청담역 PB센터장은 “이번 조정을 계기로 분산 투자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 것 같다”며 “현재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미 환매를 통해 현금 여력이 있는 고객은 금리 인하를 겨냥한 채권형 펀드나 국내 주식형, 브릭스, 중국 관련 펀드에 대한 저점 분할 매수 전략이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김형호 기자 chs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