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신앙의 중심지

신라의 보천 효명 두 왕자는 오대산 중대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하는데 이 중 훗날 성덕왕인 효명태자가 705년(성덕왕 4년) 지금의 상원사 터에 진여원(眞如院)을 창건하고 725년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동종을 주조했다. 상원사가 문수신앙의 중심지가 된 것은 조선 7대 임금인 세조가 이곳에서 기도하던 중 문수보살을 만나 부스럼 병을 고쳤다고 해서 더욱 유명해졌다. 세조 10년(1464) 친필어첩 두 권을 내려 이름을 상원사로 고치고 원찰로 지정해 문수동자상을 봉안했다. 정부는 1984년 문화재 지정 기초 조사 중 상원사 법당 안에 모셔져 있는 이 문수동자상에서 세조의 둘째딸 의숙공주가 세조 12년(1466)에 사리와 함께 봉안한 유물을 발견했다. 유물은 왕세자의 만수무강과 아버지의 쾌유를 비는 기원문과 저고리 두 점 및 다라니와 불경 13권이었다.이 유물은 문수동자상 조성 연대를 확실히 말해주며 특히 복식류는 조선전기복식사를 확정하는 중요한 사료다. 아울러 다라니와 불경도 서지학적으로 귀중한 자료가 되니 한마디로 문수동자상은 보물덩어리인 셈이다.봄을 향한 한겨울의 수행이 상원사 앞마당에 수북이 덮인 눈밭에 가득하다. 청량선원 내부는 대중스님들의 선방으로 정갈하다. 방바닥은 콩댐 장판을 한 것 같이 노란색의 따뜻한 온돌이다. 방문은 살창과 띠문으로 되어 한지 사이로 비치는 겨울 산중의 햇살이 은은히 방 한가운데로 퍼진다. 집 구조는 ‘ㄱ’자형으로 큰 방 법당에 문수동자상과 관세음보살상을 같은 전각에 모셨다.문수동자상은 한눈에 보아도 아름답다. 목조좌상으로 단아한 체구에 총각(總角)머리를 하고 유려하면서도 장식적인 의습이 탁월하고 상호가 원만한 어린아이의 천진함까지 갖춘 가작이다. 나무로 깎아 금박을 올렸지만 마치 살아있는 듯 생기가 난다. 수인도 마치 살아있는 듯 하고 동자의 눈매와 입가엔 형언하기 어려운 서기가 서려 있다. 조선 불모의 솜씨와 지극정성이 시공을 뛰어넘어 오늘에까지 감동을 전한다.상원사에는 대웅전이 따로 없다. 신라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님의 정골 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있기 때문이다. 적멸보궁은 상원사에서 비로봉 등산로를 따라 약 1.3km 올라 오대산 전경이 그림처럼 펼쳐진 곳에 자리했다. 적멸보궁 오르는 길에 중대 사자암이라는 산내암자를 만난다. 중대는 깎아지르는 산비탈에 땅이 좁고 겨울이 깊고 바람이 센 오대산의 자연과 기후에 걸맞게 처마를 접시 포개듯 겹겹이 쌓아 언뜻 보면 다층석탑 같은 특이한 사찰 건축이다. 이 암자는 적멸보궁의 베이스 기지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 듯. 바로 적멸보궁 산등성이 아래에 있다.적멸보궁은 오대산 비로봉 아래 용머리에 해당하는 자리로 영조 때 어사 박문수가 명당이라 감탄해 마지않은 터다. 그곳에 ‘세존진신탑묘’라는 표석을 세우고 진신 사리를 모셨다. 마치 능묘의 봉분같이 도톰하고 기운이 따뜻하다. 멀리 비로봉 정상에서 흘러내린 정기가 서려 있다. 적멸보궁 앞으로 단정하게 봉긋한 언덕이 있다. 정기를 다시 모으는 듯 오대산 겨울바람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적멸보궁 전각에는 부처님 좌대 위에 붉은색 좌복과 어간을 향한 금박단청만 있다. 천장에는 용틀임을 하고 봉황이 날아다닌다. 겉에서 보기에는 평범한 전각같이 보이지만 건물 내부는 완전히 다른 극락세상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다녀갔을까. 이곳에 모은 기도와 염원은 하늘 끝을 닿고도 남음이 있겠지.1978년 여름, 상원사 법당 마당 너른 댓돌 위에 앉아 먹을 갈고 그림을 그렸다. 시원하게 펼쳐진 오대산 여름 풍경이 그만이다. 녹음이 뚝뚝 초록 물을 떨어뜨릴 것만 같다. 준비해간 화첩에 손벼루를 꺼내 먹을 갈았다. 붓에 농담을 듬뿍 내어 수묵의 정취를 호방하게 그려댔다. 녹음 우거진 나무들 사이 바위는 보이지 않지만 침엽수림과 활엽수림이 적당히 섞여 한여름의 산풍경이 그만이다. 벌써 몇 장 째, 뒤에서 “거 참 그림 자-알 그린다”라는 소리가 묵직하면서도 맑게 들린다. 비구스님이었다. 하안거 선방스님인가. 뜬금없이 “난초 칠 줄 알아요?”라고 한다. 아니 웬 난초? “네 에- 배웠는데-요-” 갑자기 말꼬리가 슬그머니 내려앉는다. 그리던 풍경을 되는 둥 마는 둥 마무리를 하고 먹을 다시 갈았다. 여름 볕이 따가웠다. 나는 청나라 양주팔괴(揚州八怪) 가운데 대나무와 난초를 잘 친 판교(板橋) 정섭(鄭燮, 1693~1765)의 난초가 좋았다. 그의 시도 좋고 필치도 시원하고 따라 그리는 맛도 좋아 내심 열심히 공부하던 중이었다. 난 잎을 시원히 치고 바람이 살랑이는 꽃잎을 묽은 먹으로 쳐 내려갔다. 보기에도 좋았다. “좋아요. 멋있는데.” 스님은 입선 시간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듯 얼굴에 희색이다. 나는 여백에 판교의 화제도 어눌하지만 이름도 썼다. 다 치고 나서 멋쩍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여 “스님께 드릴까요”라고 했더니 스님은 어쩔 줄 모른다. 잠시 후 다시 나타난 스님 손에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신심명(信心銘)’이었다. 이 책은 중국 선종의 삼조(三祖) 승찬대사(僧瓚大師)가 중생이 본래 부처(衆生本來佛)임을 설하고 석가의 대도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지은 선종 최고의 소의경전(所衣經典)이자 선문학(禪文學)의 진수다. 나로서는 읽어도 잘 모를 것인데 자기가 좋아하는 책이니 난초 선물 답례로 준다며 파란색 볼펜으로 ‘선호혜존(善鎬惠存) 설영(雪影)’이라고 사인도 해 준다. 나는 스님의 공부를 받는 것 같아 마음이 뜀뛰듯 기뻤다.그 후 30년이 지난 오늘까지 ‘신심명’은 내 책장에 고스란히 세월을 함께했다. 이젠 책도 나이를 먹어 표지가 누렇고 장정이 닳았다. 책갈피를 열어보니 해제 서설에 빨간 줄이 여기저기 그어져 있다. 내가 밑줄 친 건 사실인데 알고나 그었을까 싶다. 지금 읽어 보아도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명(銘)은 잠(箴)과 함께 마음에 깊이 새겨둘만한 것을 운문으로 읊은 것이다’에 밑줄을 그었다. 내 마음에 새긴다는 그 문구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지금은 무엇을 하고 어디에 있을까. 그런 인연이 지금 이 글을 쓰게 했나보다. 마음 한구석이 아련해진다.언젠가 우연히 서울 안국동 조계사 앞을 지나다가 ‘대복전(大福殿)’이라는 간판에 이끌려 책방에 들어갔다. 대복전은 승주 선암사에 있는 전각의 이름으로 큰 복을 내린다는 전각의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절집이다. 이리저리 책 제목과 표지를 보다가 눈에 띄는 얇은 책 한 권이 들어왔다. ‘선방일기’, 표지가 명주 바탕 소색으로 마치 고서의 장정같이 단아했다. 지은이는 본명도 없고 얼굴 사진도 없다. 대학에서 철학과를 나와 출가했다는 짧은 소개만 있고 아무런 수식이 없다. 단출하지만 강한 끌림이 있었다. 책은 1972년 동안거 석 달을 상원사 선방에서 보내는 동안 선방의 생활과 자신의 심경을 일기 형식으로 적은 간단한 기록이다. 글은 그해 음력 시월 보름 상원사에 선방에 방부(房付)를 들이면서부터 시작해 음력 정월 보름 해제 날 선방을 떠나는 것으로 마감했다.선방에서의 일상생활과 선방의 생태, 용맹정진, 그리고 선객의 고독과 인간적인 애증을 꾸밈없이 적어 내렸다. 선방에서의 우열과 인간적인 이기심과 위선, 그리고 견성에 대한 집착, 배고픔과 수마 때문에 겪는 육신의 괴로움, 몸은 미동도 하지 않지만 각자의 마음은 산과 바다를 뛰고 건너 우주를 헤집는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어려운 선방을 전전하며 수행하는지 선객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작지만 큰 글이다. 안거철 그 고행에도 불구하고 해제가 되어 새로운 기약을 하며 어디론가 떠나는 선객들의 분주한 발걸음이 꼭 우리네 삶 같다. 불교 서적이라기보다는 철학서다. 내가 선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사는 게 곧 선(禪)이다.최선호(崔善鎬) www.choisunho.com1957년 청주생. 서울대 회화과 및 동 대학원 졸업. 간송미술관 연구원.뉴욕대(NYU) 대학원 졸업. 성균관대 동양철학 박사과정 수료.현재 국립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화가. 저서 ‘한국의 美 산책’.표화랑 갤러리 현대 등 국내외 개인전 17회 및 국제전 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