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영영 못 떠날 것 같습니다. 밖에 나가 평소 꿈꿔 왔던 프랜차이즈를 시작할까 합니다. 지금까지 많이 신경 써 주셨는데 기대에 보답하지 못해 죄송합니다.”사표를 받아든 박용만 두산그룹 전략기획본부장(현 두산인프라코어 회장)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하지만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이미 마음이 떠난 사람을 어떻게 붙잡을 수 있겠는가. 사표를 내민 정수연 할리스에프앤비 대표도 얼굴을 들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그길로 그는 정든 두산그룹을 떠났다.그때까지만 해도 정 대표는 공동 대표인 이성수 사장과 함께 두산그룹의 프랜차이즈 사업부문을 실무에서 진두지휘하던 스타였다. KFC를 국내 대표적인 프랜차이즈로 키운 것도 바로 그다. 그 때문에 그와 이 사장은 KFC와 피자헛, 타코벨이 소속돼 있는 세계 최대 요식업 가맹 업체인 염 브랜드(YUM Brand)가 주는 마케팅 상을 죄다 휩쓸 정도로 발군의 능력을 보여줬다. 덕분에 당시 두산그룹의 주력 사업이었던 OB맥주와 그룹의 핵심인 전략기획본부에 근무하는 등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도 출세 가도를 달렸다. 그토록 잘나가던 그가 따뜻한 온실을 박차고 추운 광야로 나가겠다고 하니 가족들조차 이해하지 못했다.“입사 선배이자 함께 두산의 프랜차이즈를 움직이던 이 사장의 꼬임 때문이었죠.(웃음) 저보다 먼저 퇴사한 뒤 프리머스라는 프랜차이즈 극장 체인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제게 전화를 해 극장 한쪽에 커피 전문점을 만들고 싶어 커피체인을 하나 인수했는데 그걸 맡아주면 어떻겠느냐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평소 꿈꿔 왔던 ‘진짜 멋진 프랜차이즈를 만들어보자’고 말하는데, 그 말에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사표를 내고 그는 곧장 근처 커피 전문점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커피 한 잔을 시켜 맛을 음미해 봤다. 자판기 커피에 익숙해 있던 그가 원두커피 맛을 제대로 알 리 없었다. 그렇게 며칠을 커피 전문점으로 출퇴근하면서 그는 소비자의 반응을 살폈다. 프랜차이즈 전문가답게 그의 눈에 트렌드가 읽혀지기 시작했다. 문화와 커피를 접목해 세계적인 회사로 성장한 스타벅스처럼 할리스커피만의 브랜드 이미지를 키우는 것이 중요했다. 그가 합류하기 전까지만 해도 할리스커피는 품질, 조직 등 거의 모든 분야가 엉망이었다. 브랜드를 런칭한 지 5년째인데도 2003년 당시 가맹점 수가 30개를 채 넘기지 못했고 매출 성장률은 매년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었다. 한국 토종 커피 전문점을 표방하고 있지만 가맹점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점주들의 불만은 갈수록 고조됐다. 대표이사에 취임하자마자 그는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우선 운영 시스템부터 뜯어고쳐 점주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매달 결과를 발표해 우수 매장을 표창하는 모니터링 제도를 도입했고 가맹점 간 커피 맛을 일정하게 맞추기 위해 커피 제조 매뉴얼을 책과 동영상으로 만들어 배포했다. 본사가 가맹점을 평가하는 것과 달리 할리스커피는 가맹점이 본사의 서비스를 평가하도록 해 가맹점의 불편을 귀담아 들었다.할리스커피라고 하면 가장 많이 연상되는 것이 바로 ‘신선한 커피’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할리스커피 전 매장에는 입구에 ‘지금 드시는 커피는 00월 00일 볶은 신선한 커피입니다’라는 안내 문구가 붙어 있다. 할리스커피가 스타벅스, 커피빈, 파스꾸지 등 해외 유명 커피 체인과의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신선도에서 할리스커피의 성장 동력을 찾은 것도 우연한 계기에서 비롯됐다.“하루는 인터넷에서 신선한 커피와 관련해 논쟁이 붙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맛있는 커피 전문점은 어디에 있을까라고 시작된 한 네티즌의 질문에 여러 댓글이 붙었는데 그중 ‘미국에서 들어온 커피는 이송 시간 탓에 커피가 신선하지 않다’는 댓글 때문에 네티즌과 업체 간 논쟁이 붙었던 겁니다. 업체 측이 “우리 커피는 커피를 볶자마자 진공으로 포장하기 때문에 몇 달이 지나도 품질에 이상이 없다”고 말했던 것이 네티즌들의 반발을 사면서 큰 논쟁이 됐습니다. 그때 생각이 났습니다.”그때부터 할리스커피는 월 2회 원두를 볶던 것을 4회로 늘렸다. 이를 위해 OEM(주문자생산방식)으로 진행되던 국내 원두 생산 업체와 생산량을 조율하고 가맹점에선 재고량과 관련된 데이터를 받았다. 현재 할리스커피는 볶은 후 1개월, 개봉 후 1주일, 분쇄 후 1시간 이내의 신선한 원두만을 사용한다. 또 해외 대형 커피 전문점들이 대도시 위주로 가맹점을 늘리고 있을 때 그는 지방 쪽에 더 공을 들였다. 자금력이 풍부한 외국 업체와의 경쟁을 위해선 가맹점 수가 100여 개는 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메뉴의 차별화도 꾀해 요커트 셰이크 음료인 아이요떼와 고구마라떼 등은 할리스커피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음료다. 특히 여름철에 아이요떼는 전체 매출 중 20%를 차지할 정도로 효자 상품이 됐다.인터뷰 중간에 본지 자매지인 프로슈머가 분석한 국내 4대 커피 전문점 제품 평가 기사 얘기를 슬그머니 꺼냈다. 당시 할리스커피는 커피 전문가와 일반 소비자들로부터 ‘커피의 신선도는 높지만 블렌딩 기술이 다른 브랜드에 비해 떨어져 맛과 향이 좋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었다.“프로슈머 기사를 읽어봤는데, 딱 반만 수긍이 가더군요. 어쨌든 블렌딩 기술이 타 제품에 비해 떨어진다는 소리는 그냥 넘길만한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에 기술력 강화에 많은 신경을 썼습니다. 2개월 전부터 새롭게 블렌딩한 커피를 제공하고 있는데 소비자들의 반응이 궁금합니다.”이쯤에서 커피에 대해 잠깐 알아보자. 커피는 아라비카 종과 로버스터 종이 대표적인 품종인데 아라비카는 쓴맛이 강한데 비해 향이 뛰어나 여러 가지 품종을 배합해 고유한 맛을 만들어낸다. 커피의 블렌딩 기술은 바로 아라비카 종에 여러 가지 재료를 어떤 비율로 혼합하느냐가 관건이다. 할리스커피는 코스타리카와 브라질에서 생산된 최상급 아라비카 종 원두를 주로 사용한다.그는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는 원두커피 시장을 어떻게 전망할까. 이에 대해 정 대표는 “이웃 일본만 해도 인스턴트와 원두 시장의 비율이 6 대 4인데 비해 우리나라는 겨우 8 대 2다. 따라서 아직도 성장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며 “타사들이 막대한 로열티를 내는 것에 비하면 매출 구조도 탄탄하다”고 말했다.지난해 할리스커피 매출은 450억 원으로 전년도 250억 원에 비해 80% 성장했으며 올해는 660억 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매장 수는 1월 말 현재 직영 매장 11곳, 가맹점 119곳 등 130개로 서울과 지방이 6 대 4 정도의 비중이다. 타사에 비하면 지방 비중이 상당히 높다.요즘 정 대표는 ‘가맹점을 내고 싶다’는 해외 교포들의 전화를 심심치 않게 받는다. 지난 1월 해외 가맹점으로는 처음 문을 연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는 기대 이상의 판매 실적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조만간 말레이시아에 두 번째 지점을 낼 계획이며 싱가포르 태국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국가는 물론 커피의 본고장 미국 진출도 모색 중이다.“미국에 있는 교포들은 원두도 한국에서 제공해 줬으면 한다고 해서 ‘그러지 말고 커피는 미국에도 좋은 것이 많으니 그걸 가져다 쓰라’고 했죠. 그랬더니 우리 커피가 너무 신선하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면서 이송 비용을 들여서라도 한국에서 볶은 원두를 보내달라고 합니다.(웃음)”할리스커피 체인점을 내기 위해서는 최소 99㎡(옛 30평) 이상의 매장을 확보해야 한다. 최소한 의자 몇 개를 놓을 만한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커피는 곧 문화’라는 그의 경영 철학이 그대로 담겨 있는 것이다.“하워드 슐츠가 커피에 문화를 불어넣어 스타벅스를 키웠지만 사실 이건 우리나라가 진짜 원조라고 생각해요. 그 전까지 미국은 테이크아웃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커피 매장이 거의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죠. 지금도 미국과 유럽 등지는 테이크아웃 비중이 높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커피를 들고 다니면서 마시지 않습니다. 다방을 떠올려 보세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커피는 사람과 사람을 만나게 해주는 것이지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커피가 문화라는 것은 우리나라가 원조입니다. 몇몇 대기업이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을 만들었지만 대부분 참담한 실패를 맛봐야 했던 것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감성을 이해하지 못해서입니다.”지난해 말 할리스커피는 코스닥 상장사인 유니버설씨엠의 주식 240만7879주를 80억 원에 매입했다. 이를 두고 업계에서는 할리스커피가 우회상장을 준비 중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그러나 이에 대해 정 대표는 “우회상장을 할지는 아직 검토된 바가 없다”면서 “커피와 엔터테인먼트를 접목하기 위해 인수했으며 유니버설씨엠을 할리스커피의 문화 마케팅에 적극 활용할 생각”이라고 말했다.글 송창섭·사진 이승재 기자 realsong@moneyr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