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 ②

(故)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은 1970∼80년대에 여러 골프장을 돌면서 지인들과 골프를 즐겼다.1986년 6월 어느 주말 뉴코리아에서 정 명예회장은 고 신병현 부총리와 유창순 전 국무총리, 김도창 서울대 법대교수(변호사)와 라운드했다. 그런데 이날 하루 종일 비가 왔다.김 변호사는 “시간이 갈수록 비가 억수처럼 쏟아졌고 후반에 들어서는 집중호우로 변해 조금 보태 말하면 볼이 떠내려갈 지경이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일행은 모두 속옷까지 흠뻑 젖었다.상황이 이러니 모두 ‘더 이상 골프 하기가 어렵겠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늘집에 겨우 당도해 이제는 그만두겠지 했는데 정 명예회장은 잠시 쉰 뒤 아무 소리 없이 그냥 티잉 그라운드로 걸어갔다. 나머지 일행도 별 수 없이 따라나서 볼을 치는지 빗줄기를 치는지 정신없이 끝내고 가까스로 클럽하우스로 돌아왔다.김 변호사는 “한 번 시작하면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끝을 보고야 말겠다는 강철 같은 그 의지력이 아산(정 명예회장의 호)의 성공 비결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김상홍 삼양그룹 명예회장도 라운드를 통해 정 명예회장을 접한 적이 있다. 김 명예회장은 “골프를 할 때 그 사람의 성격이 나타나는데 아산 선배는 필드에서 스윙할 때 좀 급하게 몰아치는 버릇이 있다. 또 내기에서 지면 다음엔 어떻게든 이겨보려고 이 궁리 저 궁리하는데 그런 모습을 보면 시골 소년 같은 순박함이 느껴져 재미 있었다”고 말했다.정 명예회장은 1950∼60년대 시절만 해도 호쾌한 스윙에 놀라울 정도의 장타자였다. 박태준 전 포항제철 회장은 고 이병철 삼성 회장 성품을 섬세하고 깔끔한 구절판형으로, 정 명예회장을 걸쭉한 된장찌개형으로 비교하며 골프 스타일도 성품과 비슷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박 전 회장은 특히 정 명예회장의 골프 스타일은 중후장대형이라고 평하기도 했다.정 명예회장은 언제나 있는 힘껏 스윙을 했다. 제대로 맞은 경우 엄청난 장타가 나왔다. 어프로치 샷이나 퍼팅 등 쇼트 게임에 신경을 써 스코어를 관리하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호쾌하게 골프를 즐겼다.그러다 보니 내기를 하면 지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골프를 하고 나면 술자리로 이어졌는데 여기서도 정 명예회장은 호쾌하게 술을 마셨다. 술이 얼큰해지면 흥을 돋우기 위해 제일 먼저 마이크를 잡아 분위기를 주도했다.정 명예회장은 라운드할 때 컬러 볼을 고집했다. 주로 연두색 볼을 사용했는데 시력이 좋지 않아 확인하기 쉽게 색깔 볼을 쓴 것 같다.색깔 볼과 관련해 유명한 일화도 있다. 정 명예회장이 1980년대 중반 어느 날 신격호 롯데 회장과 골프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마침 약속한 날 눈이 발목까지 빠질 정도로 내렸다.신 회장은 골프 하기는 틀렸다고 생각하고 망설이는데 정 명예회장이 골프장으로 떠났다는 전갈이 와 차나 한 잔 하고 헤어질 작정으로 골프장에 갔다. 그러나 정 명예회장은 골프 복장을 하고 신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 회장이 “이런 날씨에 골프를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묻자 정 명예회장은 “눈이 와서 그렇지 골프 하기엔 아주 좋은 날씨인데요. 그래서 눈 위에서도 잘 보이도록 빨간 볼을 가져 왔습니다”라며 웃었다. 이날 신 회장은 골프를 시작한 지 40년 만에 처음 눈 속에서 라운드를 했다. 정 명예회장은 그 눈 속에서도 20대 청년처럼 박력 넘치게 플레이했다. 장성환 전 교통부장관은 뉴코리아CC에서 정 명예회장과 가끔 라운드를 했는데 골프 매너가 훌륭했다고 회상했다. 티오프 시간을 정확하게 지키는 것은 기본이었다. 플레이할 때는 자신감 넘치고 당당했다.장타자면서도 그린에서는 퍼팅에 집중하는 등 어느 한 가지에 편중되지 않은 고른 골프 실력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여유 있게 치면서 남을 잘 배려하는 좋은 파트너였다고 기억을 되살렸다.정원식 전 국무총리는 강원도 한 골프장에서 정 명예회장과 골프를 할 때 이런 일이 있었다. 몇 개 홀을 지나 정 명예회장과 나란히 앞에 우뚝 솟은 설악산을 바라보면서 걷고 있었다. 홀과 홀 사이의 거리가 꽤 돼 한참을 걸었다.그런데 정 명예회장이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오던 길을 되돌아갔는데 모퉁이를 돌아 내려가니 정 명예회장이 깊은 상념에 젖어 물끄러미 서 있었다.정 명예회장은 정 전 총리를 보고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또 직업의식이 발동한 모양이야”라면서 “홀과 홀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많은 면적의 땅이 놀고 있는데 이 땅을 어떻게 쓸 수 없을까 하고 생각에 사로잡혔다”고 말했다. 정 명예회장은 골프를 하면서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이를 즉각 사업과 연결시키는 ‘사업가 기질’이 배어 있었던 것이다.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 구자경 LG 명예회장, 박성상 전 한국은행 총재, 고 조정구 삼부토건 명예회장 등도 정 명예회장과 잘 어울리는 동반자였다.박성상 전 한은 총재에 따르면 정 명예회장은 한 라운드에 OB가 3∼4번씩 났다고 한다. 있는 힘을 다해 후려치는 스타일인지라 조금만 빗맞아도 코스 밖으로 볼이 날아갔다.정 명예회장은 그래도 전혀 괘념하지 않았다. 거리 욕심도 대단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누가 자기보다 거리가 더 나면 몹시 신경을 썼다.지난해 77타로 ‘에이지 슈팅(본인의 나이 이하의 스코어를 기록하는 것)’까지 기록했을 정도로 골프 실력이 뛰어난 박 전 총재가 자기보다 거리가 더 나면 “몸도 약해 보이는 사람이 어디서 그런 괴력이 나나, 일은 하지 않고 골프만 했나”라고 말했다고 한다.박 전 총재는 “정 명예회장은 나보다 거리가 뒤지면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 OB나 토핑 등 미스 샷을 연발했다”고 회상한다.정 명예회장은 그러나 거리를 늘리기 위해 골프채나 볼을 자주 바꾸지는 않았다. 또 미스 샷을 범하더라도 절대 ‘멀리건(티샷이 잘못됐을 때 그것을 없던 일로 하고 다시 치는 것)’을 받은 적이 없었다. 스코어도 곧이곧대로 기입했다. 타수도 줄여 적지 않았다. 어쩌면 스코어에 그리 연연하지 않았다고 하는 표현이 어울릴 듯하다.러프에 가서도 볼을 밖으로 빼내 치지 않고 그대로 쳤다. 어지간한 룰은 지키려고 노력했다. 퍼팅 시 ‘OK’도 퍼터 길이 이내로 들어와야만 허용할 정도로 엄격하게 골프를 즐겼다.다만 디보트 홀에 있는 볼은 옮겨 놓고 쳤다. 디보트 홀에 있는 볼을 치면 그곳이 더 파여 좋지 않다며 옮겨 놓고 칠 것을 동반자들에게 제안했다고 박 전 한은 총재는 말했다.한은구 한국경제신문 기자 to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