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 년 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루이 15세 스타일의 재팬 뷔로(japan bureau) 한 점이 500만 달러에 낙찰됐다. 수백만 달러에 호가되는 가구가 흔치 않은 일이기에 앤티크로서 뷔로의 가치를 올려준 ‘재팬(japan)’이라는 이름의 옻칠에 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너무 흔해서, 혹은 아파트와 잘 어울리지 않을듯해서 집집마다 안방을 장식하고 있던 옻칠 가구를 모두 버리고 말았는데 그렇게 가치가 높다니…. ‘진작 돈이 된다는 것을 알았으면’ 하고 자못 아쉬웠던 기억이 있다.유럽에서 일어난 다양한 문화 상품은 동아시아로부터 영향을 받았거나 수입된 경우가 많다. 그 가운데 바로크 시대 옻칠의 발견은 유러피언들에게 경이로움이었다. 내구성이 강하고 미학적으로도 매우 수준 높은 디자인의 조형성은 그들을 매료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루이 15세 시대의 가구 명장 가운데 몇 명은 이 옻칠을 응용한 가구로 유명한데, 그 가운데 ‘마르탱’이라는 에베니스트(가구 제작자)에 의해 제작된 것은 특히 뛰어난 제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표면 처리는 영락없는 옻칠이지만 프랑스의 전통적인 장식 기법인 오몰루 마운트(ormolu-mounted)가 되어 있어 이것이 프랑스 장인에 의해 제작됐음을 알리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는 나라를 막론하고 ‘재팬’이라는 이름의 옻칠 가구들이 상당히 높은 가치로 앤티크 시장에서 거래되고 있다.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옻칠은 우리나라 전통의 뛰어난 표면 처리 기법으로, 특히 나전칠기가 유명하다. 물론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을 중심으로 일본 등지에서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발전됐다. 그런데 언제 어떻게 유럽에서 옻칠 가구들이 만들어진 것일까.중국은 모든 문화의 원류로서 이웃한 여러 나라들에 늘 영향을 미쳤다. 옻칠 기술도 중국이 원천 기술이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명나라 시절의 ‘휴식록’이라는 기록에 의하면 초기에는 죽간(竹簡)에 글씨를 쓰는 데 사용했으며 나중에는 흑칠(黑漆)을 한 것은 식기로, 내부에 주칠(朱漆)을 한 흑칠반(黑漆盤)은 의식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주대(周代)에는 마차 갑옷 활 화살 등을 금칠과 채색칠로 장식했으며, 신분 계급에 따라 사용이 법으로 규제됐다. BC 2세기께에는 악기를 장식하는 데 칠기를 사용한 것처럼 건축물의 장식에도 옻칠을 사용했다. 한대(漢代)에 이르면 옻칠의 사용이 더욱 많아졌다. 당에 이르면 칠기 유물이 더 많이 남아 있는데, 송대 말기에는 푸젠(福建)에서 자바 인도 페르시아 일본 메카 및 그 외 지역으로 중국의 칠기를 수출했다고 전해진다.한편 중국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해 남긴 서긍의 ‘고려도경’에 의하면 고려의 청자와 함께 나전칠기가 아름답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사실 고려청자의 아름다운 상감 기법도 나전칠기에서 그 모티브를 찾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우리 나전칠기의 역사는 길고도 아름다운 것이었지만 일본에서도 꾸준히 발전했다. 특히 일본의 칠기 산업은 매우 인상적이어서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모모야마 시대(桃山時代:1574~1600)의 혼아미 고에쓰는 일본 칠계의 거장으로 현란하면서도 창조적인 칠기 작품을 최초로 만든 사람이다. 그의 디자인은 세부의 단순한 기법이 모여 대담한 면을 보여주며 일반적으로 나전 덩어리로 고부조하거나 금속으로 상감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열정적으로 예술을 후원했는데 그의 지원 아래 칠기의 제작이 활기를 띠게 됐다. 그가 죽자 부인은 교토에 고다이 사를 세우고 다카마키에(高蒔繪)라고 불리는 독특한 칠 양식으로 장식했는데 그녀에 의해 기증된 칠기류가 아직까지 이 절에 소장돼 있다. 그리고 19세기에 다시 옻칠 부흥기를 맞는다.16세기 네덜란드와 교류가 확산되면서 일본은 칠의 나라로 알려진다. 그래서 일본은 곧 칠이라는 뜻과 동의어(同義語)가 됐는데 이것은 자기를 ‘차이나(china)’라고 부르는 것과도 같은 이치다. 재팬은 칠, 재패너(japanner)는 칠장이를 뜻한다. 일본의 자기와 함께 유러피언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준 문화상품으로 옻칠이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일본의 옻칠은 그 기법이 우리처럼 단아하고 우아한 편은 아니고 금분을 흩뿌려 놓은 환상적인 면을 보여준다. ‘짐은 곧 국가’라고 외쳐 댄 루이 14세가 바로크 시대의 웅장하고도 화려한 궁중 문화를 일구었다. 베르사유는 그 규모와 화려함에 있어 유럽 모든 군주들의 동경을 자아냈다. 전통적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금빛은 왕권의 상징이었다. 이전까지는 가구에 금을 사용한 예는 별로 찾을 수 없었지만 루이 14세는 고블랭에 지시, 가구에 금을 장식하도록 독려한다. 이로써 프랑스 가구에는 금빛이 화려하게 나타나게 된 것이다. 유럽의 군주들은 루이 14세를 모방했다. 이때 아시아로부터 실려 온 반짝이는 까만 바탕에 금빛 화려한 표면 처리의 일본 옻칠 가구는 그들의 요구와 잘 맞아떨어졌다.옻칠은 외형적인 것뿐만 아니라 우드웜(woodworm)을 방지하는데도 탁월했으며 습기에 강하기 때문에 실용적인 면에서도 인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1655년에 예수회 선교사인 마르티노 마르티니가 쓴 ‘Novus Atlas Sinensis(새 중국 전도)’에서 옻칠을 언급하고 있지만, 1688년에 이르면 존 스톨커와 조지 파커에 의해 발간된 ‘Treatise of japanning and varnishing(칠과 옻의 기술론)’은 문양 그림의 첫 책자로 일본 칠기의 우월성을 보여준다. 마르탱 형제들(기욤 시몽 에티엔 쥘리앵 로베르)은 볼테르가 칭송했던 광택 나는 마르탱 칠기를 개발했으며 그들은 베르사유 궁전의 방을 치장하고, 로베르의 아들 장 알렉상드르는 포츠담에 있는 프리드리히 2세를 위해 일했다. 프랑스의 칠 제조법은 1760년 프랑스 선교사 피에르 댕카르빌의 ‘중국 칠기산업에 관한 리포트(Memoire sur le vernis de la Chine)’와 1772년 장 펠릭스 와탱의 ‘화공·도금공·칠기공의 예술’ 부록의 새로운 정보를 통해 더욱 발전했다. 이 책에서 와탱은 동양의 수지(樹指)와 견줄 만큼 우수하지는 못하지만 서양의 노간 나무로부터 얻은 수지가 가장 좋은 옻칠의 대용품이라고 했다. 이것은 여러 가지 고무를 알코올과 테레핀유에 녹이고 역청을 혼합해 그가 생각한 대로 만든 칠이다. 와탱의 책은 나무의 준비, 천 바르기, 바탕 칠하기, 표면 광내기, 디자인대로 그리고 칠하기, 입체 장식 만들기 등에 대한 지침을 자세히 알려준다. 이렇게 수세기 전 유럽에서는 가장 화려한 장식예술로서 옻칠 가구가 주목받고 있었다. 우리는 나전칠기(螺鈿漆器)와 자기(磁器)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우수한 기술과 예술성을 독보(獨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것을 내놓지 못했다는 사실은 너무도 큰 손실이다. 도쿄국립박물관을 비롯한 미국, 독일 등지에 소장돼 있는 우리의 옻칠 유산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김재규헤리티지 소사이어티 대표. 앤티크 문화예술 아카데미 대표. 앤티크 문화예술기행, 유럽도자기 저자.영국 엡버시 스쿨, 옥스퍼드 튜토리얼 서비스 칼리지 오브 런던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