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판 부르고뉴’ 팔츠 와인의 향미
일 남서부에 위치한 팔츠(Pfalz) 지방은 와인 생산량으로 보면 라인헤센 지방 다음으로 큰 생산지다. 지역의 생김새를 보면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축소판이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모양을 봐도 그렇고, 약간 못 미치는 재배 면적을 봐도 그렇다. 대륙성 기후를 가진 독일의 날씨는 지중해성 기후의 프랑스와 다르다. 비가 많고 춥다. 하지만 팔츠는 독일 내에서도 위도가 낮고 북풍도 없어 아몬드가 잘 자랄 정도로 그 기후가 온화하다.팔츠는 모젤이나 라인가우에 비해 와인의 지명도가 낮았다. 팔츠 와인은 그동안 모젤의 새콤한 맛을 무난하게 하기 위한 혼합용으로 인식돼 왔다. 지역 생산량의 절반이 여전히 타 지역 와인과의 블렌딩을 통해 출시되지만, 연이어 발굴되는 로마시대의 유물을 통해 전통 있는 생산지임이 증명되고 있다.독일 와인의 꽃, 나아가 세계 최고의 화이트 와인인 리슬링을 표현하는데 있어 팔츠는 기존의 명산지인 라인가우와 좀 다르다. 팔츠의 리슬링은 더 많은 일조량으로 농익기 때문에 당도가 높다. 이 때문에 높은 알코올 도수가 주는 단단한 구조감이 특징이라 하겠고, 끝 맛에서 느껴지는 드라이한 느낌은 입 안에 오래 머문다.오랫동안 침체기를 겪은 팔츠에서는 요즘 막대한 잠재력이 속속 고품질 와인으로 변모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만한 생산자들을 소개한다. 이들은 여러 대에 걸쳐 소규모로 생산하며 독일 최고급 와인의 전형을 보여준다. 리슬링으로 드라이 화이트를, 슈패트부르군더(Spaetbrugunder: 피노 누아의 독일식 이름)로 드라이 레드를 만든다.1575년에 세워진 양조장 크리스트만은 현재 슈테펜 크리스트만(Steffen Christmann)이 책임을 맡고 있다. 변호사 출신인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빈티지가 좋지 않았던 2000년도에도 순도 높은 리슬링을 출시했던 그는 지역 여러 양조학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비오디나미 농법을 도입해 더욱 세밀한 맛을 표현하려 한다. 대표적인 포도밭은 루퍼츠베르크 마을의 라이터르파드(Reiterpfad)이다. 이 와인의 2006년 빈티지는 우선 무게감이 느껴지는 굵은 질감에 부드럽고 경쾌한 뒷맛이 인상적이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 길어 올린 자연스러운 미네랄 맛이 오래 오래 메아리친다. 보통 이 밭에서는 헥타르당 4000리터를 수확하는데 강수량이 좀 과했던 2006년 빈티지가 엷은 과일 맛을 지닐까봐 수확량을 33%나 줄였다. 즉, 헥타르당 3000리터만을 수확해 과일의 집중성을 도모했다.비르크바일 마을에 자리 잡은 베라임(Wehrheim)은 1990년부터 양조장 책임을 맡은 칼-하인츠(Karl-Heinz)에 의해 운영된다. 3대째 양조를 하고 있는 그는 팔츠 와인 중흥을 이룬 이른바 ‘오형제’라 불리는 다섯 양조장 대표자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오형제는 시음회, 홍보와 명산지 순례도 같이하지만 이들 와인 자체는 개별성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베라임은 슈패트부르군더의 대목(접붙이기할 때 뿌리를 남겨 영양분을 공급해 주는 바탕 나무)을 사용한다. 이는 부르고뉴 부조마을 최고의 포도밭에서 가져온 피노 누아의 클론이다. 그가 만드는 슈패트부르군더의 매력은 클로드부조처럼 힘차고 강건하지만 그 속에 섬세하고 미묘한 여운이 깃드는 것이다. 베라임의 와인은 리슬링의 숙성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여든이 넘은 그의 아버지가 1975년에 담근 걸 디캔팅했다. 진노랑 액체 속에서 특유의 페트롤 향기가 스며나온다. 풍성했던 질감은 녹아내려 깔끔하고 담백한 기운이 감돌았다.지벨딩겐 마을의 레브홀츠는 유럽의 유력지 고미유에 의해 ‘2002 올해의 생산자’로 꼽힌 팔츠 최고의 양조장이다. 현 오너 한스요르크 레브홀츠(Hansjoerg Rebholz)의 할아버지가 와인 품질을 정부로부터 인정받아 양조장 이름에 오코노미에라트(Oekonomiertat)라는 칭호를 달고 있다.여기 최고의 포도밭 이름은 ‘밤숲’이란 뜻의 카스타니언부시(Kastanienbusch)로, 오랜 옛날에 깊은 땅속에 퇴적된 미네랄이 지각변동으로 표토층을 형성한 밭이다. 깊은 데서 융기된 토양층에는 여러 가지 광물이 많아 이 속에 심겨진 리슬링은 그것들 전부를 고스란히 포도 알로 끌어낸다. 산꼭대기에 위치한 이 밭은 표토층이 아주 엷어 무더운 해에는 관개를 해야 한다. 모든 이들이 꺼리는 비가 많은 해에 오히려 훌륭한 포도를 잉태할 수 있다. 가장 엷은 데는 겨우 30cm에 불과, 비가 아무리 와도 물이 잘 고이지 않는다. 뽀송뽀송한 상태를 좋아하는 포도나무 뿌리에는 이런 토양이 좋다. 레브홀츠의 슈패트부르군더는 5년째 출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2년은 오크통에서, 또 2년은 병에서 숙성한다. 와인은 어린 아이 같아서 그 정도는 나이를 먹어야 제대로 양조된다고 믿는다.조정용 아트옥션 대표©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