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선구자 최훈 보르도아카데미 원장
"르크스와 나폴레옹, 처칠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세계 정치, 경제사에 찬란히 빛나는 이들은 하나같이 지독한 와인 애호가였죠. 몸과 마음이 늘 고달팠던 칼 마르크스에게 현실에서의 고통을 덜어주었던 것이 바로 포트 와인 한 잔과 시가 한 개비였고 영국과의 워털루 전투를 하루 앞두고 그토록 사랑하던 르 샹베르탱을 마시지 못해 집중력을 잃은 나폴레옹의 와인 사랑도 대단합니다.”보르도와인아카데미 최훈 원장은 우리나라 와인 업계의 산증인으로 통한다. 1994년 철도청장을 끝으로 공직 생활을 마감하고 와인 대중화에 뛰어들어 2001년 국내 최초의 와인 교본서라고 할 수 있는 ‘포도주의 모든 것’을 펴낸 것도 이런 선구자적인 사명감이 큰 몫을 했다. 책을 펴낼 당시만 해도 와인은 일부 상류층의 전유물에 불과했다. 와인과 관련된 용어의 한글 표기법도 정착되지 않아 영어와 한국말을 혼용해 사용해야 했다. 제대로 된 자료조차 구할 수 없어 그는 당시 세계 와인클럽 회장이었던 블루 몽탈, 세계적인 보르도 와인 전문가 스테파니 하인즈, 부르고뉴 와인 석학 라비 씨 등에게 자문을 구해 어렵게 책을 펴냈다.그가 와인에 대해 알게 된 것은 1967년 교통부 관광국 재직 시 프랑스 정부가 개발도상국 지원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진행한 9개월짜리 호텔 훈련 과정에 참여하면서부터다. 5성급인 파리 르 그랜드, 중부 비시의 알베르트 프레미에르, 남부 니스의 네그레스코 호텔에서 실습 중이던 젊은 한국 연수생 눈에 비친 와인 문화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술이 약해 독주를 멀리하던 그였지만 한 모금 마신 와인 속에서 그는 유럽의 기풍과 멋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와인 선구자답게 그는 우리나라 와인 역사도 꿰고 있다. “1977년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제대로 된 와인이 없었습니다. 포도주라고 해봐야 포도 분말 가루를 물에 타 만든 천양포도주가 전부였습니다. 그러던 중 정부가 경북 밀양에 화이트와인 품종 리슬링을 대거 심어 대규모 포도밭을 경작하게 됐죠. 그렇게 해서 생산된 것이 1977년 첫선을 보인 마주앙입니다.”마주앙이 생산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국내에서 와인은 쇠고기, 향신료와 함께 특정외제품판매금지법에 의거, 내국인 소비가 금지돼 있었다. 외국인의 경우 관광호텔 내에서만 허용됐다.그는 당시 생산된 마주앙에 대해 멋진 향미를 가진 중급 화이트 와인이었다고 말했다. 10여 년 전 프랑스에서 마시던 화이트 와인과 비교해 볼 때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얘기다.공직에서 은퇴한 뒤 그는 와인 대중화를 위해 2000년 와인 교육 기관을 설립했다. 부암동에 있는 보르도와인아카데미는 정통 와인 전문 기관으로는 국내 최초다. 수강생의 직업에 따라 와인 관리자 과정, 리더스 코스, 직장인 와인 정복 코스 등을 구분해 설립한 것도 보르도와인아카데미의 특징이다. 와인 관리자 과정은 주로 소믈리에 및 와인 업계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프로그램이 짜여 있다. 국내 특급 호텔 소믈리에 90% 이상이 보르도와인아카데미 출신이다.리더스 코스는 기업체 최고경영자(CEO) 등 사회지도층 인사 164명이 수강생으로 참여했으며 이 과정에서 만난 CEO들끼리 와인 사교 모임이 구성될 정도로 인기가 높다. 최근에는 와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일반인들의 수강 신청도 크게 늘고 있다. 최 원장은 수업의 질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 강사진을 직접 프랑스 이탈리아 호주 등지에서 초빙해 오고 있으며 지난해 5월에는 프랑스 보르도 지역 와인스쿨인 에클 두 뱅드 보르도와 교육 관련 협약을 체결했다. 그와 인터뷰를 한 장소는 뜻밖에도 구름이 반쯤 걸린 인왕산 자락이 한눈에 들어오는 종로구 부암동의 손만두 전문점이었다. 점심 메뉴로 만둣국과 만두 찜을 시킨 그는 가방 속에서 칠레산 와인 하나를 주섬주섬 꺼내들었다. 그러고는 점원을 향해 와인 잔을 가져다 달라고 말한다. 만두 가게에 와인 잔이 준비돼 있을까. 이내 와인 잔이 식탁에 올려졌다. 나중에 확인하니 이 집에 올 때마다 매번 와인을 올려놓고 식사를 해 주인장이 최 원장을 위해 특별히 준비해 놓은 것이었다.와인과 만둣국이 과연 잘 어울릴까 싶었지만 결과는 뜻밖이었다. 칠레산 와인의 진한 오크 향과 만두소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전혀 색다른 맛을 냈다.“생각보다 괜찮죠. 외국 손님을 초대해 우리 음식과 함께 와인을 대접하면 하나같이 ‘원더풀’을 연발합니다. 맵고 짠 음식에도 잘 어울리고요. 이는 충분히 한국화될 가능성 있다는 얘기입니다.”그는 와인의 매력에 대해 “사람과 사람을 ‘편안’하게 이어주는 가교와 같은 역할을 한다”며 “술의 알코올 도수는 사람의 성격을 결정짓는데 우리나라의 독주 문화는 사람의 성격을 공격적으로 만드는 게 문제”라고 꼬집었다.“스테디셀러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를 보면 ‘스트레스를 받으면 남자는 자기 동굴로 들어가고 여자는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남자, 여자의 스트레스 해소법 차이가 크다는 얘기죠. 그런데 와인은 이 둘을 자연스럽게 이어줍니다. 남자에게는 와인 한 잔으로 심신의 피로를 풀어주고 여자에게는 자연스러운 대화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는 뜻이죠.”요즘 기업체 CEO들이 와인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다양한 품종, 생산 지역, 빈티지 등 와인을 마시기 위해선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대해 최 원장은 “좋은 와인을 마시고는 ‘굿(Good)’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베리 밸런스트(Very Balan ced), 롱 피니시(Long finish)라고 말하는 게 옳다.왜냐하면 와인은 개인의 느낌이 어떤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라며 “외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자신의 혀끝에서 전해오는 느낌, 그 자체를 즐기면 된다”고 조언한다.‘포도주의 모든 것’ 이후 ‘와인과의 만남(2005)’, ‘프랑스 와인(2006)’, ‘남국의 와인(2006)’을 펴낸 그는 조만간 이탈리아를 제외한 구대륙 국가의 와인과 관련된 정보를 담은 와인 정보 도서를 펴낼 계획이다.글 송창섭·사진 이승재 기자 realsong@moneyro.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