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 세계 여행의 ‘라스트 데스티네이션(Last Destination: 마지막 여행지)’이라고 불리는 일본의 전통 여관인 료칸. 대학생 시절부터 배낭여행으로 전 세계의 문화와 역사를 맛보아 왔지만 일본의 대표적 숙박지인 료칸이라는 곳은 그동안 나에게는 심적 부담이었을까, 혹은 때가 아니라고 무의식속에 각인돼 있었는지도 모른다. 누가 그랬던가. “완전한 고립은 무한한 자유를 선사 한다”고. 일상 속 지쳐가고 있는 심신에 완벽한 일탈을 맛보기 위해 료칸으로의 고즈넉한 여행을 떠나본다.‘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니 설국이 펼쳐졌다.’ 일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첫 문장이다. 일본의 중심부 도쿄 역에서부터 시작되는 이 여정은 오감을 매료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충분했다. 일본 동북부 니가타 현의 에치고유자와 역으로 향하는 신칸센에 몸을 의지한 채 40여 분이 흘렀을까. 신칸센은 이내 수차례 긴 어둠의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마지막 터널을 10여 분간 암흑 속에 헤치고 나아갔다.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앞에 펼쳐진 것은 믿을 수 없이 새하얀 순백색 눈의 향연, 분명 이것은 설국(雪國)이었다. 순백으로 가득한 여백의 미, 이것이 바로 설국이 가져다주는 비운 듯 꽉 찬 느낌,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을 맛보기에 너무나도 충분한 환경이다. 설국의 감상이 끝나기도 전에 당도한 곳은 에치고유자와 역. 예상은 했지만 세차게 휘몰아치는 눈발에 해발 3000m가 넘는 산악지대라는 것을 새삼 실감하며 류곤 료칸의 문을 조용히 두드려 봤다.에치고유자와 역에서 류곤 직원의 안내를 받아 달리기를 15분 남짓. 눈보라를 헤치며 도착한 곳 류곤 료칸. 설산 능선의 아랫자락에 자리 잡은 이 료칸은 상상력으로 그렸던 료칸의 이미지와 일치됨을 보여줌과 동시에 일본 사무라이들의 역사가 느껴져서인지, 혹은 입구에서부터 풍겨지는 역사의 기운에 압도당해서인지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들의 숙연함과 엄숙한 분위기에 첫 방문인 나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든다.류곤의 현관을 들어서기도 전, 내 인기척을 반겨준 건 다름 아닌 료칸의 여주인 오카미상. 우리네 할머니와 다를 바 없는 인심 좋게 생긴 오카미상과 그녀의 손녀 나카오카미상이 곱디고운 기모노를 차려 입은 채 맨발로 뛰어나와 반기는 까닭에 나도 모르게 허리가 숙여지고 말았다.동방예의지국이라고 자칭하는 한국 어디에서도 이러한 전통적인 서비스를 받아 보지 못한 내가 미묘한 감정 대립의 주연인 일본에서 분에 넘치는 극진한 접대를 알리는 인사를 받으니 지키지 못한 한국의 전통문화가 그저 아쉬울 따름이었다.첫발을 내디딘 류곤 료칸의 현관. 아차, 이곳이 료칸인 것을 깜빡 잊었었나 보다. 높은 천장에서부터 머리 위까지 매달려 있는 일본의 큰 전통 등과 몇 백 년은 묵었음직한 목재 바닥, 그리고 반다이(프런트)에서 자연스레 배어나오는 고가(古家)의 향기로 인해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의 코끝은 이미 료칸의 운치를 알아차리고 있었다. 이어 오카미상이 내어준 감차와 달콤한 과자를 맛 본 후 안내를 받은 곳은 하루 동안 묵을 객실. 몇 종류의 객실이 있었는데 그중 마음에 들었던 객실은 널찍한 일본식 정원과 연못을 끼고 있고 설산의 풍경이 그대로 노출되는 엔쯔(円通) 객실. 안내가 끝난 후 다다미 위에 가만히 앉아 설산의 전경을 응시하고 있자니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고도 남을 기운이 바로 이곳에 서려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백문이 불여일견’인 것이다. 아직 식사시간까지는 여유가 있는 터. 객실의 전담 종업원인 나카이상이 정성스레 준비해 준 기모노의 약식인 유카타(浴衣)를 꺼내 입고 나름대로 멋을 부린 채 류곤 료칸의 자랑, 대 노천탕으로 발걸음을 옮겨봤다. 사무라이들이 실제 살았던 250여 년 세월을 간직하고 있는 류곤은 단층 구조로, 삐걱거리는 목재 바닥(꾀꼬리마루: 우구이수바리)으로 만들어진 기나긴 복도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치 새소리와 흡사한 바닥의 삐걱거림은 한밤중 외부인의 침입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고 하니 일본 옛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복도의 공명을 느끼며 당도한 곳은 류곤의 자랑, 대 노천탕.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빽빽이 들어서 있는 삼나무의 숲과 허리까지 쌓여 있는 눈이 노천탕의 투명한 수면에 그대로 반사돼 온천이 뿜어내는 수증기와 함께 니가타 현의 알싸하리만큼 신선한 겨울 공기와 어우러져 내 몸 구석구석까지 노천탕의 정기가 들어오는 듯하다. 쥐죽은 듯 고요한, 바람소리만 감지되는 혼자만의 가시키리(전세탕) 노천탕에서 유카타를 벗어던지고 반짝이는 온천에 몸을 담근 채, 수면 너머 바라다 보이는 삼나무 숲의 정기와 눈 쌓인 설국의 정경을 마주하니 우리네 선조들의 신선놀음 또한 이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잠긴다.겸재 정선이 그려놓은 듯한 동양 화폭에 젖어 신선놀음을 즐기다 보니 벌써 석양의 황혼은 저물어 어둑어둑한 저녁의 어둠을 료칸의 호롱불들이 수놓고 있었다. 이제는 료칸의 하이라이트라 일컫는 석식 가이세키를 대접받을 차례. 온천욕의 상쾌한 기분을 몸속 깊숙이 간직한 객실로 향하는 발걸음은 일상을 벗어나 ‘나’를 돌아봤다는 존재감에 충만해 있었다. 산과 바다를 동시에 품고 있는 니가타 현의 저녁 밥상인 가이세키는 그야말로 임금님의 수라상이 부럽지 않을 만큼의 진수성찬. 우선 나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이 지방의 오사케(일본 청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청정지역의 쌀로 만들어서인지 쌉싸래한 맛이 가히 일품이다. 뒤를 이어 차례로 내어 오는 각양각색의 요리는 정성스러운 손길이 빚어낸 미각의 최고봉. 그중 내 입맛을 사로잡은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니가타 현의 쌀 ‘고시히카리’. 일교차가 크고 적설량이 풍부해 쌀의 한 톨 한 톨이 기름지고 당도가 높아 최고의 밥맛을 찾아준다는 이 쌀은 이 지역의 향토 요리인 우엉 절임과 화로에 꽂힌 채 구워져 나오는 물고기와 함께 곁들이니 가히 ‘명불허전’이다.이 고시히카리는 매년 한정 판매로 인해 이 지역에 오지 않고는 맛볼 수 없다고 한다. 성찬이 끝나고 나서 일본인의 습성대로 몸을 덥히기 위해 또 한 번 온천을 하고 나오니 객실의 다다미 위에는 두꺼운 이불이 깔려 있고 그 안에 안고 잘 수 있는 따뜻한 보온병이 놓여 있다. 잠자리까지 배려하는 료칸, 하루 동안의 힘든 여정이 이들의 세심한 서비스에 그만 녹아 없어지는 듯하다. 시조 한 가락의 풍월이 절로 나올 정도의 고즈넉한 운치가 느껴지는 류곤에서의 하루. 바쁜 일상으로의 도피를 충분히 만족해하며 날은 그렇게 어느덧 저물어갔다.다음날, 아직 밤의 미련이 남아 있는 스산한 여명에 일어나 차갑고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아침 온천욕과 함께 하룻밤의 사치를 잠시 되뇌어 보았다. 오전 9시께, 객실로 가져다주는 가정식 아침을 가볍게 먹은 후 소복이 쌓인 눈의 산책로를 여유롭게 걸으며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일탈의 시간을 가져보았다. 누군가에겐 사치일 것 같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 지금 이 순간 나의 존재감을 느끼게 하는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언젠가는 다시 찾을 그런 곳으로 추억되기에 충분했다. 하루 동안의 여정 속에 료칸이라는 여행이 내게 의미해 준 것은 가끔 삶의 여유와 충전의 시간을 가져보라는 느림의 미학과 한걸음 물러선 여유로운 일상을 느껴 보라는 되새김과 함께 그네들의 배웅 인사를 끝으로 일상으로 돌아온 나에게는 ‘하루 동안의 고립된 자유’, 느림을 찾아가는 료칸 여행이었다.글·사진 전광용 이오스여행사(www.ios.co.kr)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