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 함박눈이 내린다. 아침부터 퍼붓기 시작한 눈송이가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 정일품(正一品) 품계석 위에도 소복이 쌓인다. 근정전 너른 마당 거친 박석 위에도 쌓여 마당을 하얗게 바꾸더니 멀리 청와대 뒷산 북악산이 눈 속에 푹 파묻혀 있다. 한 폭의 단아한 수묵화가 완성된다. 경회루(慶會樓) 연못 두껍게 얼은 얼음판을 배경으로 인왕산 바위 봉우리마다 설경이 겨울 정취를 돋운다. 서울이 온통 눈 천지다. 아, 생각만 해도 마음이 환하다. 지구가 자꾸 따뜻해져 이젠 겨울의 정취가 사라져가는 듯해 아쉽기만 하다. 겨울은 겨울다워야 제맛, 매서운 칼바람이 휘몰아 들고, 경복궁과 북촌의 고래등같은 기와집에 눈이 겹겹이 쌓이고 한강이 꽁꽁 얼어붙어 강태공의 얼음낚시로 겨울 풍치를 자아내던 시절을 아득히 그려본다.경복궁은 명산과 명수가 어우러진 천하의 길지(吉地)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경복궁은 요즘 북한산이라고 부르는 삼각산을 조산으로 주산인 백악산 아래 양지바르고 따뜻한 터를 골랐다. 왼쪽으로는 예전 서울대 문리대가 있던 동숭동 뒤쪽 낙산(駱山)이 자리하고 오른쪽으로는 인왕산을 두어 좌청룡우백호의 기세를 갖추고, 앞으로는 오늘날 남산인 목멱산(木覓山)을 안산으로 두어 사방이 안온했다. 도성 안으로 청계천 맑은 물이 삼청동에서 시작해 중랑천으로 흘러나가고 도성 밖으로는 한강이 한양 전체를 휘감고 서해로 빠져나가니 산과 물이 겹겹이 쌓인 그야말로 명당이었다. 경복궁은 새로운 조선의 기운이 끝없이 뻗어나갈 국운의 시작이자 완성이었던 것이다.1394년 섣달 초사흘, 개성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궁궐과 종묘와 사직을 짓고자 산천신(山川神)에게 고사하고 터를 파기 시작했다. 그때도 눈발이 백악산에서 한강 쪽으로 몰아쳤을까. 이듬해 9월 새로운 시대의 기운을 한껏 모아 새 궁월을 완성했고, 경복궁이라고 이름 붙였다. 경복궁의 어원은 ‘시경’의 “군왕은 만년토록 빛나는 큰 복을 받으소서(君子萬年 介爾景福)”라는 구절에서 연유했다. 언뜻 생각하면 경복궁은 북경의 자금성(紫禁城)을 기본 모델로 삼았을 것 같지만 자금성은 명나라의 영락제(永樂帝)가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하기 시작한 1407년에 시작해 1420년에 완성을 보았으니 경복궁보다 25년 늦은 셈이다.경복궁은 이름도 좋고 뜻도 좋았지만 불행도 많았다. 조선 왕조에서 태종 이방원의 왕자의 난 같은 패륜과 연산군의 폭정이 뒤이었고 이를 계기로 사화와 붕당정치의 가속, 나아가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까지 영향을 미쳤다. 결국 임진왜란의 참화로 궁궐이 모두 불타 없어지고 조정은 창덕궁으로 할 수 없이 옮겨갔다. 그 후 270여년이 지난 1868년 경복궁은 다시 흥선대원군에 의해 재건되지만 경제의 불안을 가중시키고 뒤이은 개화기에 일본과 러시아의 갈등 속에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에게 건청궁(乾淸宮)에서 시해당하는 등 불행이 뒤이었다. 일제 치하에서는 전각의 대부분이 헐리고 그 자리에 총독부 건물이 들어서 국혼을 말살시키고자 했으니 그야말로 고단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하지만 이곳 경복궁은 조선 건국의 상징이자 천년 대업을 이끌 터전이었다. 세종 같은 불세출의 성군이 나와 집현전을 설치해 이상적 유교정치를 구현하고, 1443년(세종 25년) 한글을 창제 반포했으니 이는 조선의 자주성을 확립하고 중국과 확연히 구분되는 조선의 색깔을 비로소 갖게 됐다는 점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위대한 성과다.경복궁은 중국의 자금성이나 일본의 히메지성 같이 위압적이거나 권위적이지 않다. 그와는 전혀 반대로 인간적이고 자연스럽다. 조선 성리학의 이념인 예치주의의 근본과 도덕정치의 이념을 구현하는데 필요한 정치 공간과 부속 기관, 그리고 왕가의 사적 공간으로 구획했다. 사치스럽지 않고 불필요한 장식을 배제하고 자연을 궁궐에 들이고 외부와 단절하지 않은 인간적인 척도로 구획된 지극히 따뜻한 공간이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儉而不陋 華而不侈)것이 아름답다’고 한 조선 최초의 헌법인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의 전거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경복궁은 아름답다. 궁궐의 법도는 사가(私家)의 모범이자 기준이 됐고 궁궐의 미감 또한 일반 백성과 사대부들의 미감에 큰 영향을 줬다. 궁궐의 건축에는 나라 안 최고의 목수와 동산바치(원예사)들을 불러 최고의 기량과 정성으로 집을 짓고 나무도 심고 연못을 만들었다. 자연히 손길 하나마다 최고의 아름다움이 배었고 미감의 기준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경복궁은 조선 전기 궁궐의 기준으로 작용해 1405년 태종 5년 완공된 창덕궁의 본보기가 됐다.경복궁을 자금성과 비교해 보잘것없다고 자조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적의 침입을 막으려는 거대한 물웅덩이인 해자(垓字)와 철옹성 같은 성곽과 망루,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태화전의 삭막한 풍경 등 자금성의 그 위용과 권위는 천하를 아우르던 청나라의 국력을 보여주는 결정판이지만 거기에는 인간적 부드러움을 찾을 길 없다. 거기에는 오로지 권력과 삶과 죽음, 암투와 음모 같은 무겁고 수상한 수식어가 먼저 떠오른다. 16세기 일본 전국시대에 건립한 히메지나 오사카성 역시 살벌하고 잔인한 낭인의 피비린내가 물씬 배어 있는 성 같다.이에 비해 경복궁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경복궁은 자금성이나 히메지성에 비하면 어린애 같은 순진함이 묻어난다. 궁궐의 담이라고 해도 우스갯소리로 태권도 초단 실력 정도면 누구나 훌쩍 넘을만한 만만함이 보인다. 외적의 방어용이라기보다는 경계의 표시가 더 맞을 듯싶다. 일본의 경우 교토에 있는 에도시대 쇼군의 처소인 니조조(二條城)에서 보이는 위용의 해자는 그만두고라도 자객의 침입을 막기 꾀꼬리 마루라 불리는 ‘우구이수바리’만 보더라도 조선의 궁과는 거리가 멀다. 우구이수바리는 이를테면 요즘의 경보장치 같은 것이다. 나무 바닥에 쇠못을 박고 고리를 걸어 위에서 누르면 아무리 살며시 밟아도 쇠가 긁히면서 삑삑 소리가 나 외부인의 침입을 알린다. 얼마나 자객이 많았으면 그 정도였을까. 한옥의 대청마루는 장정이 저벅저벅 걸어도 소리가 둔탁하게 날만큼 무덤덤하다. 문인 국가와 무사 국가의 차이다.경복궁 흥례문에 올라 뒤를 돌아보라. 광화문 건너 세종로 풍경이 시원하다. 탁 트인 공간 사이로 서울의 햇살이 환하다. 천천히 어도를 따라 금천(禁川)인 영제교를 건너다가 눈길이 어구를 지키는 어수룩한 석수 한 쌍에 멈춘다. 한 마리는 입을 앙다물었지만 맞은편 다른 한 마리는 혓바닥을 날름 내밀고 ‘메롱’을 한다. 영제교 들머리 환하게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석수의 표정은 차치하더라도 궁 안 지엄한 곳에 사가의 풍속에서도 쉽게 보기 어려운 장난기 서린 조각을 본다는 게 어디 쉬우랴. 마음이 절로 너그러워진다. 조선의 해학미다.근정전, 너른 박석 위 두벌로 쌓은 월대 위에 정면 5칸 측면 5칸의 내부 통층의 중층 다포계 팔작집이다. 화려하지만 사치하지 않는 아름다움처럼 근정전은 경복궁의 핵심이자 국사의 중심으로 나라의 정책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건축의 안정적 비례감과 화려한 단청이 궁궐의 권위를 한껏 보여주면서도 선이 부드럽고 느낌이 따뜻하다. 지붕의 추녀선이 경복궁의 주산인 백악산 물매와 꼭 같고, 서쪽 인왕산 능선이 근정전 마당 가득 들어온다. 비록 공간은 자금성 태화전에 비교할 수 없이 작지만 근정전에는 백악산과 인왕산이 지척에 자리해 자연의 품에 안긴 아늑한 공간이다. 이는 곧 근정전 안의 공간만이 아니라 회랑 너머 백악과 인왕이 모두 경복궁인 셈이다.사신(四神)과 12지신상을 화강암에 조각해 월대를 장식한 조각 솜씨도 일품이다. 한국의 미는 날카롭거나 자로 잰 듯한 똑 떨어짐과는 거리가 멀다. 대신 무덤덤하고 수더분하지만 절제돼 수식이 덜하고 보면 볼수록 구수한 맛이 난다. 박수근 그림 같은 맛이다.경회루는 근정전 서쪽에 인공 연못 위에 건축한 누각이다. 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는 작은 규모였으나 조선 태종 12년(1412)에 연못을 넓히면서 크게 다시 지었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돌기둥만 남은 상태로 유지돼 오다가 고종 4년(1867) 경복궁 중건 때 경회루도 다시 지었다. 정면 7칸 측면 5칸의 화강석 고주(高柱)를 두어 지은 건물은 누각의 규모로는 나라 안에서 가장 크다. 나라의 경사나 큰 행사의 연회를 베풀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장소다. 연못은 사방이 반듯하고 가운데 직사각의 작은 섬을 두어 소나무를 심고 화초를 곁들였다. 이러한 사각 연못의 원형은 백제 부여의 정림사지 직사각형 연못으로 창덕궁 부용지도 이와 같다. 그 형태는 일본 나라(奈郎)의 도다이지(東大寺) 옆 쇼소인(正創院)으로 가는 길목에 파 놓은 직사각형 연못과 쇼소인 정면에 자리한 원형 연못에까지 미쳤으니 모두 백제의 영향이다.소한 추위에 얼어붙은 연못 위로 시린 겨울바람이 불어 내린다. 멀리 인왕산의 바위자락이 꼼짝도 안하고 추위에 웅크리고 있다. 봄바람에 연못가 버드나무 가지에 물이 오르고 연둣빛 늘어진 가지마다 잎이 돋아 바람에 일렁이면 경회루의 봄은 마냥 설렌다. 겨울의 짧은 햇살에 얼음이 반짝인다.향원정(香遠亭)은 경복궁 가장 위쪽 건청궁 아래 있다. 모서리가 꺾인 둥근 사각의 연못에 다리를 두고 걸어 들어가게 마련한 2층 육각 정자다. 향원정은 사방에 문을 달아 내부가 보이지 않는다. 형태도 육각나무마루에 육모기와지붕을 하여 언뜻 바라보면 아름답지만 오래보면 어딘지 이국적이고 어설프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육각이나 팔각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저 반듯한 사각이다. 향원전 육각 정자는 우리네 미감이라기보다는 중국풍의 약간 느끼한 화려함이 배어 있다. 1873년 고종이 건청궁을 건립하면서 장안당(長安堂) 추수부용루(秋水芙蓉樓)에서 바라보기 좋은 자리에 세운 정자로 고종의 취향이 전차와 전기 그리고 자동차 등 새로운 서구 문물 수용과 맞물려 건청궁의 서적 보관용 중국식 건축인 집옥재와 함께 향원정 정자를 중국풍으로 건축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하기야 당시의 선진은 청나라이고 명품은 모두 중국제였기에 동경할 만도 하다.봄부터 가을까지 향원정 주변 화목이 아름답게 피어나고 겨울에는 백악산 산그늘이 연못 얼음 위로 비치면 향원정은 그야말로 한 폭의 화려한 채색화가 된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정원에 들이는 한국의 미감을 여실히 본다.경복궁을 걸어 나와 소격동 집으로 돌아왔다. 건천궁에서 바라본 향원전 아래 경복궁 전각들의 기와지붕 선이 산맥처럼 물결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서재 창밖으로 마른 감나무 꼭대기 시리도록 파란 하늘에 실 같은 구름이 걸려 있다. 이따금 작은 새들이 마당으로 내려와 낙엽 사이에 떨어진 풋사과 열매를 헤집는다. 새해의 시작이 어제 같은데 벌써 한 주가 지났다. 새해가 정월로 바뀌었다. 일상이 언제나 새해다.최선호(崔善鎬) www.choisunho.com1957년 청주생. 서울대 회화과 및 동 대학원 졸업. 간송미술관 연구원.뉴욕대(NYU) 대학원 졸업. 성균관대 동양철학 박사과정 수료.현재 국립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화가. 저서 ‘한국의 美 산책’.표화랑 갤러리 현대 등 국내외 개인전 17회 및 국제전 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