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병철 삼성회장 ③
이병철 삼성 회장은 사업상 경쟁자였던 고 정주영 현대 회장에게 골프에서 지는 것이 아주 싫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이 회장은 이렇게 승부욕이 강하면서도 즐겁게 치고 싶은 사람과는 즐기면서 골프를 했다. 자신의 골프를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이 회장은 일본의 재계 학계 정계 인사들과 자주 라운드를 했다. 그중에는 일본 총리를 비롯해 거물급 인사들이 많았다. 이 회장은 당시 일본의 초명문 골프장인 스리헌드레드(300)CC의 유일한 한국인 회원이었다. 후에 정주영 회장도 이 골프장의 회원이 됐다. 300은 회원수가 300명이라는 뜻이다.스리헌드레드CC는 일본 백화점 그룹인 도큐회사가 만들었는데 회원권 거래를 하지 않고 일본의 실력자만 회원이 될 수 있다. 식당도 정장을 입어야만 입장할 수 있고 로커룸에 회원의 사진이 걸려 있을 정도로 철저한 프라이빗 골프장이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가 재임 시 회원 가입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일화가 유명하다. 안양CC(현 안양베네스트GC)는 바로 이 골프장을 모델로 삼아 만들어졌다.이 회장은 이곳에서 일본 고위층과 라운드하면서 친선을 도모하고 사업 정보도 얻곤 했다. 그는 한 걸음 나아가 주일 한국대사들을 일본 거물들과 연결시켜 줘 기술 도입이나 차관을 얻는데 상당한 도움을 받도록 했다. 골프를 통해 ‘민간 외교관’ 역할을 한 셈이다.일본인들은 이 회장을 접하면서 경외감 같은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들은 이 회장을 두고 동방예의지국에서 가장 지혜롭고 예리하고 예의바른 멋진 신사라고 평했다.이 회장은 일본 사람들과 골프를 하면서 그 사람이 스윙이나 스코어가 좋지 않으면 자상하게 가르치면서 라운드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맞는 골프채를 사 선물하기도 하고 레슨프로를 붙여주기까지 했다. 이러니 일본인들이 이 회장 편이 안 될 수 없었다. 이 회장은 골프장에 오면 마음이 편해져 사교하기 쉽고 여러 정보를 얻기 유리하다고 생각했다.이 회장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 본격적으로 가까워진 것은 안양골프장에서 라운드를 함께하고 난 뒤였다고 한다. 1967년 안양골프장을 오픈하고 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이 회장이 지인들과 골프를 하고 있던 중 누군가가 찾아왔다. 전갈을 들은 이 회장은 바로 골프를 중단하고 클럽하우스로 내려갔다. 박 대통령이 찾아온 것이었다.이 회장과 박 대통령이 함께 라운드를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두 사람은 9홀을 돌고 나서 저녁식사를 함께했다. 그 자리에 동석한 신용남 씨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사업하는 사람들이 사업에만 매달리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나무 관리도 잘 하는 줄 몰랐다”며 “농촌을 살리고 싶은데 사업가들이 협조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이후 지금의 용인자연농원이 된 땅을 사들이기 시작, 그곳에 양돈, 과실 시범단지를 조성했다. 박 대통령은 그 후에도 자주 안양골프장을 찾아와 이 회장과 라운딩을 했다.이 회장은 김종필 현 자민련 명예회장과도 친분이 있었다. 김종필 씨는 이 회장으로부터 국가 경영에 관한 여러 가지 조언을 들었다고 한다.최근 김종필 씨는 “골프와 관련해선 이 회장이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이라며 이 회장에 대한 일화 한 토막을 이렇게 소개한 적이 있다. “이 회장은 하늘에 가서도 골프장을 만들었을 텐데 아마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박종규 경호실장 두 명은 멤버십에서 빼버렸을 거야. 두 사람한테 많이 시달렸거든. 특히 김형욱은 내기 골프를 했을 때 자기가 이기면 진 사람한테 다음 날이라도 사람을 보내 돈을 받아냈지. 그런데 만약 질 것 같으면 ‘때맞춰’ 걸려온 부하들의 전갈을 받고 ‘각하가 부른다’는 핑계를 대면서 중간에 도망쳤지.”이 회장은 평소 자기 뜻대로 안 되는 세 가지를 꼽곤 했다. 조미료 사업에서 미풍이 미원을 이기지 못하는 것과, 자식 농사, 그리고 골프가 그것이었다.이 회장의 골프에 대한 애정은 나이가 들어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한겨울 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도 ‘설경이 좋다’며 라운드를 하곤 했다. 그러면 직원들이 총동원돼 눈을 치우고 보조 캐디가 여러 명 붙었다. 날씨가 추워도 라운드를 중간에 그만두는 경우는 없었다. 꼭 18홀을 다 돌았다.1976년 9월 일본에서 위암 수술을 받고 온 뒤에도 골프장에 가끔 들렀다. 골프는 못하더라도 수요회에 참가해 차를 마시면서 예전의 그 분위기를 즐기는 것이었다.이 회장은 가을이 와 잔디가 누렇게 되면 몹시 안타까워했다. 이를 본 큰 딸 이인희 씨는 ‘일본에서 이렇게 하는 것을 봤다’며 그린에 파란 물감을 칠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라도 올라치면 물감이 번져 보기가 흉했다. 이러다 보니 나중에는 그린을 비닐로 덮어 두었다가 이 회장이 나오는 수요일과 일요일에 벗겨 푸른색을 유지하곤 했다.1987년 이 회장이 작고하기 며칠 전인 10월 27일께. 그날은 낮부터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부축을 받아야 2층에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였던 이 회장은 오후 4시 30분께 갑자기 “골프화를 가져오라”고 했다.날이 흐려 어두컴컴해지려는 시간이었기에 직원들은 ‘뜻밖이다’고 생각하면서도 지시에 따랐다. 당시에는 한장상 프로가 그만두고 이강선 프로가 안양골프장에서 근무했다. 이 프로는 골프화와 볼, 골프클럽, 골프카트를 준비해 갔다.이 회장이 1번 홀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섰다. 이 프로가 “한 번 쳐보시겠습니까?”라고 묻자 이 회장은 “응, 가져와 보게”라고 말했다. 볼이 잘 맞을 리 없었다. 첫 번째 티샷은 헛스윙이나 다름없었고 두 번째 시도한 샷도 약 10m 전진하는데 그쳤다. 그러자 이 회장은 이 프로에게 “이군도 치라”고 했다.이 프로가 샷을 날리자 “가자”며 앞으로 나갔다. 세컨드 샷 지점에 가니 이 회장은 “내 볼이 어디 있는가”라고 물었고 이 프로가 볼을 찾아주자 그때부터 평상시 라운드와 똑같이 플레이를 진행했다고 한다. 3번 홀에 이르러 날이 컴컴해지자 이 프로가 “들어가시죠?”라고 했고 이 회장은 “응, 들어가지”라고 대꾸했다.이 회장은 그러나 4번 홀이 파3홀이기 때문에 그 홀을 마저 마치고 5번 홀 대신 클럽하우스로 향하는 8, 9번 홀로 이동하려는 요량이었던 것 같았다.4번 홀 티샷을 할 때부터는 불을 켜야 플레이 할 수 있었다. 골프장에 있던 골프카트 4대, 오토바이 3대, 이 회장 차에 달려 있는 헤드라이트를 모두 밝혀 이 회장이 샷을 하는 곳을 비췄다. 그 상태로 8, 9번 홀을 마쳤다. 불을 켜고 라운드한 것은 그 세 홀이 전부였다.이 회장은 그래도 아쉬웠던지 10번 홀을 한 번 둘러보고 클럽하우스로 향했다. 당시 현관 앞에는 모형 그린이 있었는데 이 회장은 카트를 탄 채 그 그린을 세 바퀴 돌았다. 그 뒤로 이 회장은 안양골프장에 나타나지 않았고 20일 후 타계했다.불을 켜고 한 라운드가 이 회장의 ‘마지막 라운드’였다. 이 회장은 이미 자신의 운명을 예견한 듯 그토록 사랑했던 골프장을 찾아 생애 마지막 라운드를 마쳤던 것이다.한은구 한국경제신문 기자 tohan@hankyung.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