즘 기업 사회에서는 이른바 기업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다. 기업 생태계란 작은 기업들이 자라서 중견기업이 되고 중견 기업이 자라서 대기업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자연 생태계의 현상에 비유해 표현하는 말이다.그래서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무작정 사업을 키우기보다는 적정한 규모에서 무리 없이 잘 꾸려가는 경영의 지혜가 필요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창업 이후 세월이 많이 흘러도 규모의 적정성을 지켜가면서 장수하는 기업들이 귀감이 되고 있다.공작 기계를 만드는 ‘화천기공’이 그런 사례 중 하나다. 이 회사의 뿌리는 일찍이 광주 지역에서 공작 기계를 만드는 기업으로 시작한 화천공작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동안 성장이 더디고 시장 기반도 취약한 기계 분야에서 꿋꿋하게 소신을 지키며 기업을 이끌어 온 심지 굳은 기업이 화천기공이다. 이제는 광주, 창원을 포함해 여러 곳에 공장을 가지고 있으면서 국내 제일의 공작 기계 메이커로 성장한 화천기공은 그동안 여타 산업에 비해 열세에 있던 기계 산업을 유망 산업으로 일으키는데 일등공신의 역할을 한 기업이다. 경영은 주로 창업주의 자녀들이 서로 역할 분담을 잘해 모범적인 가족 기업의 형태로 성장해 오고 있어 요즘 가족 기업 연구에도 좋은 사례가 되고 있다.그런가 하면 ‘고려제강’도 강한 중견기업 중 하나다. 창업한 지 50년을 맞고 있는 고려제강은 부산을 무대로 철강 선재를 생산하고 있는 전문 업체로, 지금까지 한 길만을 달려온 뚝심 있는 기업이다. 그동안의 꾸준한 내부 유보로 자기 자본이 매출액을 훌쩍 뛰어넘는 알토란같은 중견기업이다. 경영권도 창업주로부터 승계돼 형제 간에 우애 있게 이어가고 있는 모범적인 가족 기업이다.우리나라 사무기기의 대명사 ‘신도리코’도 창업 50주년을 바라보는 장수 기업 반열에 들면서 탄탄한 중견기업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주력품인 복사기를 바탕으로 성장한 신도리코는 사무기기 업계에서 흔들리지 않는 경쟁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영역을 잘 가꾸고 있는 기업이다. 신도리코 역시 그동안 안정된 수익성을 기반으로 많은 사내 유보금을 가지고 있다. 경영권은 일찍이 후대로 승계해 지속적인 성장을 이뤄 내고 있다는 점에서 성공한 가족 기업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참으로 외길을 걸어 온 기업을 고르라고 한다면 ‘조선내화’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철강 산업의 뒤안길에서 묵묵히 내화벽돌을 만들어 온 가족 기업으로 안정된 제품 구조와 판로를 바탕으로 창업 후 50년이 넘도록 흔들림 없는 경영을 해오고 있다. 역시 자기 자본이 매출액과 맞먹는 높은 유보율을 유지하면서 기술과 자본에서 내부 역량으로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 실력 있는 중견기업이다.그 어떤 분야보다도 부침도 심하고 경쟁도 치열한 제약 업계에서도 중견기업으로 힘을 기르고 있는 ‘중외제약’도 눈길을 끌만한 기업이다. 설립한 지 60년이 넘는 장수 기업으로, 특히 처방의약품에서 강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으며 핵심 원료 사업과 기능성 수액제 생산에서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 역시 가족 간의 안정된 지배 구조를 유지하며 탄탄한 재무 구조를 가지고 있다.이 밖에도 가족 기업 형태의 중견기업들이 많이 있지만 이들의 대체적인 특징은 주로 한길을 걸어오고 있다는 점과 무리한 재무 구조를 만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가족 간의 조화롭고 끈끈한 경영 참여가 윤활유 역할을 하고 있다는 장점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엄길청경기대 교수 / 경제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