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수 씨엘엘씨디 사장의 성공질주
성수(43) 씨엘엘씨디 사장은 주변에서 ‘사업가의 DNA를 타고난 사람’이란 소리를 자주 듣는다. 그러나 정작 그는 ‘타고난 사업가’가 아니라 ‘만들어진 사업가’라고 말한다. 20대부터 사장이 되겠다는 일념을 갖고 체계적으로 준비했기에 가능했다는 설명이다.그는 지독한 일중독자다. 결혼 이후 지금까지 가족들과 여름휴가 한 번 떠난 적이 없다. 술은 물론 골프 채 한 번 잡아본 적이 없다. 별다른 취미도 없다. 성실과 근면으로 대표되는 그의 사회생활은 대학시절부터 시작됐다. 그는 대학 4년 동안 방학 때면 어김없이 아르바이트를 했다. 업종을 가리지 않고 딱 두 달씩 일했다. 주어진 시간에 다양한 직종을 섭렵해 보기 위해서였다. 중국집 배달원에서부터 건축 현장 일용 잡부, 공장 직원까지 해보지 않은 것이 없다. 사업가를 향한 그의 도전은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다.“전자제품에 들어가는 플라스틱을 제작하던 회사(정일전자)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사장님이 ‘정식 직원으로 일해 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했습니다. 나중엔 사장님이 저에게 회사를 맡기더군요. 그게 회사 경영의 시작이었습니다.”당시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천성이 부지런해 그는 그 와중에도 집 근처에 중식 레스토랑과 소매 팬시점을 운영했다. 한마디로 ‘스리 잡’을 한 것이다. 이후 세광산업(1994년)이라는 제조업체와 거성식품(1998년)이라는 만두 회사를 운영하면서 사업 수완을 길렀다.그는 3~4년 숨 가쁠 정도로 정신없이 달려왔다. 만두 전문 제조업체 취영루 사장에서 코스닥 등록기업인 통신 판매업체 씨앤텔 사장으로 변신하더니 최근에는 중앙아시아 시멘트 사업 진출을 선언하고 LCD 부품 생산 업체 에스티에스를 전격 인수한 것이다. 공통분모라고는 눈 씻고 봐도 없는 그의 연이은 변신에 대해 업계가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무리한 확장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올 법도 하다. 그러나 정작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다. 되레 그는 “경영자와 엔지니어는 다른 것 아니냐”며 반문한다.“최고의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 해당 분야에서 전문성을 키워야겠지만 경영자는 다릅니다. 경영자는 밑그림을 그리는 역할을 하죠. 경기 순환 사이클을 조망하고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경영자의 몫입니다. 남들은 제가 무리한 시도를 한다고 하지만 저는 신규 사업을 진출할 때 보통 3년 이상 검토합니다. 전문가들의 자문도 수차례 받죠. 기업은 정체돼 있어선 안 됩니다. 계속 움직여야죠.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현실 안주는 곧 실패입니다.”그에게 취영루는 오늘의 성공을 만든 토대다. 1998년 거성식품을 차렸지만 브랜드가 약해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던 중 2000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여파로 취영루가 부도 위기에 직면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곧장 인수·합병(M&A)에 나섰다.“세광산업에서 썬파워 랜턴용 건전지를 OEM(주문자제작방식)으로 제작했는데 외환위기 이후 다국적기업인 질레트가 900억 원에 7년 임대 조건으로 썬파워를 인수하는 것을 지켜봤습니다. 그 뒤 질레트는 로켓트건전지마저 비슷한 조건에 매입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썬파워와 로켓트가 국내 시장을 양분하고 있었는데 이들 업체가 하루아침에 외국계 기업에 매각된 것이었습니다. 그 뒤 질레트가 브랜드를 벡셀로 바꾸고 가격을 인상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브랜드 가치의 중요성을 안 것이죠.”취영루는 지난 1945년 문을 연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만두 가게였다. 지금의 소공동 프라자호텔 뒤쪽에 있었던 취영루는 점심시간만 되면 만두를 먹으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하지만 창업주의 2세가 방만한 경영을 하면서 회사가 부도에 몰렸다. 브랜드 파워의 중요성을 안 박 사장은 즉시 전문 감정기관에 의뢰해 취영루가 760억 원의 브랜드 가치가 있다는 결과를 얻었다. 그는 정확한 인수 금액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외환위기라는 당시 상황을 고려해 굉장히 싼값에 회사를 인수했다고 털어놓았다.그는 중소기업의 성공을 △생산력 강화 △브랜드 파워 △기술 개발로 요약한다. 초창기부터 취영루는 매출의 5% 이상을 기술 개발 비용으로 재투자한다. 지난 2001년 경기 중소기업청으로부터 벤처 기업으로 지정받았고 그해 12월 업계 최초로 생산 이력 시스템을 도입했다. 생산 이력 시스템은 가축과 작물의 사육 재배에서 가공, 유통, 판매에 이르는 전 과정을 소비자가 인터넷이나 바코드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말한다. 소비자가 제품에 표기된 ‘이력번호’를 인터넷 사이트(trace.uctnd.com)에 입력하면 사육 중에 돼지가 먹은 사료, 도축 및 가공 정보, 유통 경로, 생산 단계별 공장의 온도 습도 등을 모두 알 수 있다. 2003년 7월 식약청으로부터 식품위해요소중점관리기준(HACCP) 인증을 받았고 2001년 6월에 만두 속의 수분 함유량을 높이는 다가수공법의 특허를 출원해 2004년 3월 획득했다(특허 제0424267호).품질 향상을 위한 취영루의 노력은 금세 시장의 호응을 얻었다. 200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현지법인을 세워 미국 수출을 시작했으며 2005년 7월에는 주한미군 물품 배급 업체로 지정돼 주한미군에 만두를 납품하고 있다. 지난해 5월에는 미국 미시시피주립대에 만두제품개발연구소를 개설해 제품 개발과 마케팅 업무 등을 협력하고 있다. 그 자신은 올해 경희대에서 ‘생산이력시스템의 전자 칩 적용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와 최우수 논문상을 받았다. 향후 취영루는 미시시피주립대에 공장을 신축해 현지 생산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취영루의 성공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 지난 2004년 6월 경찰은 비위생적인 단무지로 만두소를 만드는 업체를 적발해 국내 상당수 만두 업체들이 이 업체의 제품으로 만두를 만들었다고 발표했다. 25개 불량 만두 제조업체를 적발한 만두 파동은 일파만파로 퍼졌다. 경찰이 발표한 명단에는 취영루도 포함돼 있었다.“신문을 보고는 저도 놀랐어요. 당시 우리는 물만두만 생산하고 있었는데 물만두에는 단무지를 넣지 않거든요. 그런데 우리 회사 이름이 끼어 있었던 겁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회사 구내식당에서 가끔 단무지를 반찬으로 주는데 그 업체 제품을 구입했나 봐요. 그리고 우리가 신제품으로 군만두를 기획하고 있어서 제품 생산을 위해 그 회사와 잠시 거래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경찰은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그 업체와 거래한 곳을 모두 명단에 포함했던 겁니다. 그날 이후 밀려드는 반품이 산더미처럼 늘어났습니다. 쓰레기 처리 비용만 수억 원을 내야 할 지경이었습니다.”그는 신속하게 대응했다. 되레 그보다 직원들이 더 억울해 했다. 식약청과 경찰을 방문해 사실 관계를 확인했고 모 종합일간지 1면에 ‘취영루의 만두에 문제가 있으면 만 배로 보상하겠다’는 내용의 광고를 냈다. 다음날 경찰은 취영루와 박 사장의 손을 들어줬다.만두 파동은 취영루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됐다. 당시만 해도 취영루는 업계 3~4위권을 맴돌고 있었지만 만두 파동 이후 상당수 업체들이 부도나거나 대기업으로 흡수 통합되면서 무주공산의 기회를 얻었다. 다행히 그는 기술 개발과 시스템 정비로 품질을 향상시킨 상태였고 때마침 산업은행으로부터 긴급지원금이 들어오면서 경영은 곧 정상화됐다. 만두 파동의 최종 승자는 취영루라는 언론의 보도는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계기가 됐다. 그는 인터뷰에서 “단 이틀만 늦게 대처했어도 취영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이 일을 겪은 후 그는 정도 경영과 문화 경영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취영루 공장의 생산 라인을 소비자에게 공개했고 공장 내 만두박물관을 만들었다. 지금도 매일 200여 명이 찾아와 만두박물관과 생산 공장을 견학하고 취영루 만두를 평가해 주고 있다. 또 지난해 5월에는 공장 한쪽에 스페인어로 ‘함께 느낀다’는 뜻의 센띠르 갤러리를 열었다.2000년 22억 원에 불과했던 매출은 지난해에는 409억 원으로 늘어났다. 시스템 개선으로 영업이익은 2000년 1억8000만 원에서 2006년 말에는 27억8000만 원으로 14배가량 커졌다. 현재 취영루의 국내 물만두 시장점유율은 30%로 업계 1위를 기록하고 있다.그는 올 1월 취영루 사장직을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신규 사업에 몰두하고 있다.통신 판매 업체 씨앤텔을 인수한 그는 사명을 씨와이알로 바꾸고 지난해 말 카자흐스탄으로의 시멘트 사업 진출을 선언했다.“고유가에 힘입어 카자흐스탄은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경기 회복은 건설 경기 호황으로 이어지고 있어 전망을 매우 밝게 합니다. 2000년 톤당 40달러였던 시멘트 값이 지금은 180달러로 치솟았습니다.”그는 현지에 국내 지분 60%, 현지 지분 40%로 구성된 합작 법인(IT인베스트)을 설립할 계획이다. 현지에서는 원료를, 이쪽에서는 가공 기술을 대 생산성을 높인다는 것이 그의 구상이다. 판로를 카자흐스탄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전역으로 확대하기 위해 건설 붐이 한창인 카자흐스탄 남부 쉼켄트 부근에 공장을 건설할 계획이다. 이곳은 카자흐스탄 남부의 유일한 석회석 광산 지역으로 우리나라 제품보다 산화칼슘(CaO)함유량이 7~8%가량 높다. 박 사장은 “오는 2009년부터 공장 운영에 들어가면 연간 7400만 달러(700억 원)의 매출액에 3500만 달러(329억 원)의 경상이익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했다.이런 가운데 박 사장은 지난 8월 LCD 제품 생산 업체인 에스티에스를 전격 인수하고 사명을 씨엘엘씨디로 변경했다. 에스티에스는 TV, PC 모니터, 노트북, 휴대폰에 들어가는 TFT-LCD(초박막액정표시장치) 유닛을 생산하는 등 초정밀 금형 개발 기술을 보유한 업체. 지난해 285억 원의 매출에 52억 원의 영업이익을 냈고 올해는 매출 300억 원에 47억 원의 영업이익을 목표로 하고 있다.“시멘트 사업이 정상 궤도에 오르기까지는 2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한데, 그때까지 취영루에만 의존할 수 없었습니다. 사업 다각화가 필요했는데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에스티에스였습니다. 에스티에스는 이미 중국에 거점을 확보하고 있는 데다 관련 산업의 경기가 이미 바닥을 친 상태여서 저가 매수 포인트라고 생각했습니다.”그는 “중국 BOE그룹이 주요 거래처인 현대 디스플레이 테크놀로지를 인수한 뒤 베이징에 LCD 라인을 신설했기 때문에 중국 시장을 선점한 씨엘엘씨디의 성장 가능성은 매우 높다”며 소형 LCD 제품 생산 쪽에 주력할 계획임을 밝혔다.또 2010년 개교를 목표로 관광 요식 전문대학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파주에 들어설 한서울관광대학은 서비스 산업 인력을 양성하는 직능 위주의 교육 기관으로 운영한다는 방침이다. 정원은 960명이며 2년제로 운영된다.“교육 기관을 설립해 회사 이익을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것이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지였습니다. 한서울관광대학에는 만두 서비스과, 제빵과, 관광 영어, 조리과 등이 개설됩니다. 이 학교는 학생들의 현장 학습을 최우선 과제로 정해 즉시 현장에 투입될 수 있는 전문 인력을 양성하도록 커리큘럼을 짤 생각입니다.”박성수씨엘엘씨디 대표이사우석대 경영학과경희대 대학원 관광학 석·박사글 송창섭·사진 이승재 기자 realsong@moneyro.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