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이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공기에 옷은 두꺼워지지만 왠지 마음속이 허전하다. 인간은 누구나 외로운 존재라는 것을 더욱 느끼게 하는 이 계절에 나를 좀 더 이해해주고 마음으로 안아줄 수 있는 그 누군가가 고프다. 사랑을 하면 세상이 일순간 달라 보이고 내가 세상의 중심에 서있는 듯한 생각이 드니, 사랑이란 참으로 대단하다.하지만 사랑은 단지 호르몬의 장난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성을 보고 호감이 갈 때는 도파민이, 깊은 사랑에 빠졌을 때는 페닐에틸아민이, 사랑에 빠져 그 사람을 안고 싶은 충동이 들 때는 옥시토신이, 안정기에 접어들어 소중함으로 느껴질 때는 엔도르핀이란 호르몬이 분비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건조하기만 한 과학자들의 얘기일 뿐, 사람들은 누구나 사랑받고 싶어 하고, 사랑하기 위해 열심히 살고 있다.예술가에게 있어서도 사랑이란 위대한 작품을 탄생하게 만드는 중요한 에너지다. 문인들은 시나 소설로, 화가들은 그림으로 자신의 사랑을 노래했다. 위대한 작곡가들 역시 사랑을 하면서 느꼈던 열정, 낭만, 그리고 실연의 상처와 외로움의 곤고함 등을 자신의 음악으로 남겼다. 대체로 쓰라린 실연의 상처가 많거나 이루지 못할 짝사랑만을 했던 작곡가들의 음악은 심오하며 깊이가 있다. 반면 비교적 애정 생활이 순탄했던 작곡가들(예를 들면 멘델스존 같은-그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결혼 생활 역시 순탄하여 애정 전선에 별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은 그만큼 곡들이 밝고 가벼워 오히려 구조적인 형식미가 돋보인다.문학 작품이나 영화에 나오는, 일생을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이야기들은 가슴시린 감동을 주는데 음악가 중에서도 그런 해바라기 같은 사랑의 주인공을 찾아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브람스다. 브람스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이는 그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클라라라는 한 여인만을 마음에 두고 평생 고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클라라는 작곡자이자 피아니스트였던 슈만의 아내였으며 그녀 역시 훌륭한 피아니스트였다). 슈만은 무명 시절 브람스의 재능을 알아보고 키워준 스승이었기에 브람스는 그에 대한 존경심으로 클라라에 대한 연정을 자제했던 것이다. 브람스는 후에 클라라가 슈만의 정신병 때문에 힘들어할 때 곁에서 클라라와 슈만의 아이를 돌보면서 평생을 지냈다.이런 사연을 지녀서인지 브람스의 음악은 단 한 번만 들어도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만큼 아름다운 선율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노골적으로 과장해 연주하면 진짜 브람스 음악의 맛이 사라진다. 마음속에서 연정이 소용돌이치더라도 겉으로 애써 감추는 브람스의 성격은 그대로 곡에도 묻어나 있다.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3번을 감상해 보면 1, 4악장에서는 고백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2악장에서는 열네 살 연상이었던 클라라에게 느꼈던 모성애와 깊이 있는 쓸쓸함 등을 느낄 수 있다.클래식 음악 애호가들 중에서는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등 한 작곡가의 작품을 깊이 있게 좋아하는 이들이 있는데 특히 말러에 빠지면 헤어나지 못할 정도로 그의 작품만을 최고라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말러의 심포니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에서 느낄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고들 한다. 그의 작품을 연주하려면 보통 전체 오케스트라 단원에 객원 단원까지 동원될 정도로 많은 인원이 필요하다. 특히 8번 심포니는 ‘천인 교향곡’으로 불리는데, 이는 합창단까지 더해 무대 위에 1000명이 올라가기에 지어진 이름이다.그의 관현악곡들은 오케스트라의 모든 악기가 최고의 기량을 가지고 혼이 빠지도록 연주해야만 제대로 된 연주를 할 수 있다. 마치 여러 종류의 부품들이 조립되고 맞물려 좋은 자동차가 탄생하는 것처럼, 복잡하지만 짜임새 있는 치밀한 구성과 간간이 나오는 달콤한 멜로디들이 얘기하는 음악적 스토리에 매력이 있다.말러의 마음속 역시 한 여인이 지배하고 있었으니 바로 작곡가 알마였다. 그녀는 누구라도 한 번 보면 사랑에 빠질 만큼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매력적인 여성이었고 그녀 곁에는 늘 그녀를 추앙하는 남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당대 최고의 작곡자이자 지휘자인 말러와 결혼하고 난 뒤 말러는 스무 살 연하인 아내를 잃게 될까 두려운 탓인지 재능 있는 그녀에게 더 이상 작곡을 하지 못하게 하고 가정에만 충실할 것을 원했다.그가 남긴 10개의 교향곡 중에 5번이 알마와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했을 당시의 음악이다. 교향곡 5번의 1악장은 장송곡으로 시작된다. 죽음을 알리는 트럼펫 소리와 뒤이어 나오는 현악기들만의 장례 행렬…. 알마를 생각하면서 작곡한 테마가 종종 나오는데, 음악이 극으로 치닫다가도 이 알마의 테마가 나오면 갑자기 말할 수 없이 부드럽고 아름다운 분위기로 급전환된다. 4악장은 사랑하는 남녀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너무나 아름다운 음악이다. 이 곡은 영화에 삽입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예외 없이 사랑하는 연인을 어루만지는 장면이다.말러의 9번 교향곡은 ‘이별’이라는 제목이 붙여져 있다. 그는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 불안한 첼로의 리듬으로 시작하는데, 이는 자신의 부정맥을 표현한 것이다. 말러에게 이별은 죽음을 뜻하기도, 연인과의 이별을 의미하기도 한다. 말러의 마지막 교향곡 악보에는 이런 메모가 있었다. “너를 위해 살고 너를 위해 죽는다! 알므시!(fuer d ich leben! fuer dich sterben! Almschi!, 알므시는 알마의 애칭)” 연인과 헤어져 마음이 쓸쓸하다면 마지막 악장을 들으면서 말러의 ‘이별’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음악과 함께 마음껏 울 수 있을 것이다.작곡가들이 사랑을 하면 좋은 작품이 나오고 연주자들은 사랑할 때 마음을 움직이는 연주를 한다. 사랑하면 현실 속의 고통스러운 일도 잊게 되고 모든 일을 의욕적으로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눈물이 나게 아름다운 연주와 곡들은 이루지 못한 사랑의 경험에서 나왔다. 사랑을 시작할 때는 누구나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저 그렇게 끝난다 하더라도 영혼을 깨우쳐 주는 아름다운 경험으로 남는다. 이 가을, 영원히 마음속에 남을 사랑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정유진바이올리니스트. 서울예고. 서울대 음대. 뉴잉글랜드 콘서바토리 졸업 부천시향 수석바이올리니스트. JK앙상블 악장, 한국페스티발 앙상블 멤버이화여대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