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 10주년 맞은 미래에셋 박현주 회장

느 날 우리 일상 속으로 ‘박현주’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곧바로 이름 석 자는 펀드의 상품명이 됐다. 지금이야 펀드라는 말이 익숙한 용어가 됐지만 그때만 해도 매우 생소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세상은 들썩거렸고 투자 문화는 큰 변화를 예고했다.박현주 미래에셋 회장(49)은 이제 흔한 최고경영자(CEO)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다. 한국 증권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최고의 파워맨이다. 최근 가장 각광받는 재테크 수단이 된 펀드를 대중화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1997년 창업 이후 10년 만에 6개의 알짜 계열사(5개 해외 법인 제외)를 거느린 금융그룹을 일궜다. 일부에서는 그를 가리켜 ‘2000년대 샐러리맨의 우상’으로 표현한다.박 회장은 요즘 해외에 나가 살다시피 한다. 한 달 가운데 20일은 외국에서 보낸다. 국내에서는 좀처럼 얼굴을 보기가 쉽지 않다. 해외 시장 개척을 2007년의 경영 화두로 삼고 있는 까닭이다. 그런 그가 최근 김형철 한경비즈니스 발행인과 미래에셋 10년의 성공 뒷얘기와 미래의 꿈을 펼쳐 보여 주는 시간을 가졌다. 처음부터 인터뷰를 조건으로 한 만남은 아니었다. 차나 한 잔 하자며 마주한 자리였다.오랜 지인인 두 사람은 대화가 진행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듯했다.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와 엔 캐리 트레이드 쇼크 등 국내외 경제와 증시 환경을 둘러싼 핫이슈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감기 때문에 박 회장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지만 대화는 2시간 동안 이어졌다.“좋은 내용이 많으니 정식 인터뷰 기사로 정리하고 싶다.”대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 김 발행인은 불쑥 이렇게 제의했고, 박 회장은 “편하게 이런저런 얘기를 했는데 기사거리가 되겠느냐”며 웃었다.여의도 미래에셋 사옥 7층의 회장 접견실은 언뜻 보기에 7~8평 규모로 작아보였다. 게다가 금융그룹 오너의 방 치고는 매우 소박했다. 탁자와 의자는 구입한 지 오래된 듯 좀 낡고 최신 스타일과도 거리가 멀어 보였다. 특히 의자의 가죽은 해어져 허연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른 가구도 그다지 값 비싸 보이지 않았다. 단지 난 화분 몇 개가 방문객을 조용히 맞았다. 탁자 위에는 마크 파버가 쓴 ‘내일의 금맥(Tomorrow’s Gold)’ 등 서너 권의 책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지요?”두 사람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자세히 보니 박 회장의 얼굴이 좀 핼쑥해 보였다. 땀이 나는 듯 한 손으로는 이마를 닦는 모습도 보였다. 한눈에도 몸이 불편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요즘 감기몸살로 고생 좀 하고 있어요. 별로 무리한 일도 없는 것 같은데 잘 낫지 않네요.”박 회장이 특유의 친근한 어투로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증권맨으로 잔뼈가 굵어서인지 몸가짐은 무척 단정했다. 상체를 꼿꼿이 세운 채 상대방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가는 모습이 무척 진지해 보였다. ‘진짜 아픈 사람 맞아?’라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전라도 억양(그의 고향은 광주다)이 살짝 섞인 말투는 오후의 나른함을 날려버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매우 정겹게 들렸다.“사실 요즘은 주가를 잘 보지 않아요. 오늘도 올랐는지 내렸는지 잘 모르겠네요(그러면서 그는 맞은편에 앉아 있던 기자에게 ‘오늘 주가가 어땠느냐’고 물었다). 주가 움직임에 일희일비하기보다는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중요하다고 봐요. 투자자들 역시 너무 단기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면 손해를 보게 마련이지요.”“아마 당분간 엎치락뒤치락할 거예요. 여러 가지 변수들이 많기 때문이죠.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나쁜 일보다는 좋은 일이 더 많을 겁니다.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이 아주 좋아졌기 때문이지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한 해 동안 순익을 제대로 내는 회사가 별로 없었어요. 하지만 요즘 보세요. 좀 괜찮다 싶은 회사는 순익이 1조 원이 넘습니다. 자연히 주가 역시 좋아질 수밖에 없지요.”“그런 면도 있겠지요.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파문이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해 보여요. 엔캐리 트레이드 청산 주의보 역시 부정적으로 작용했고요. 그렇다고 미국발 쇼크에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고 중장기적 안목으로 투자하면 됩니다. 미국도 이젠 하나의 시장일 뿐인데 우리는 아직도 미국만 쳐다보죠. 너무 미국, 미국 하는 면이 있어요. 그보다는 중국 등 신흥시장의 중요성을 인식할 때입니다. 대중국 수출비중이 미국을 앞질렀어요. 이제는 오히려 미국 주식시장이 중국의 영향을 받는 일도 있지 않습니까?”“당분간 미국에는 진출할 생각이 없어요. 어차피 미국 시장은 이미 자리가 잡혀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나가서 잘할 수 있는 나라가 있고, 그렇지 않은 나라도 있지요. 미국에 가느니 차라리 아시아 등 이머징 마켓에 나가 승부하는 것이 유리하지요. 회사에도 그게 훨씬 많은 이익이 될 겁니다.”앞서 설명한 대로 박 회장은 요즘 외국 출장이 잦다. 특히 아시아 각국을 누비고 다닌다. 홍콩 싱가포르 인도 영국에는 법인도 세웠다. 또 중국과 베트남 등에는 현지 사무소를 두고 수시로 챙긴다.“이제 국내 시장에서 승부를 거는 시대는 끝났다고 봐야 해요. 제조업체들도 자꾸 해외로 나가지 않습니까. 금융회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에 안주해서는 글로벌 시대에 살아남기 어려워요. 외국에 나가 외국 자본을 대상으로 비즈니스를 하는 것만이 한국의 금융시장을 질적, 양적으로 키우는 길이 되기도 하고요. 금융회사의 해외 진출을 다른 차원에서 보면 원화의 강세를 견제하는 기능도 해요. 요즘 환율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하다고 보는 거죠.”박 회장은 몇 년 전 미국에 머무르며 해외 금융시장의 동향을 면밀히 살피기도 했다. 설립된 지 오래되지 않은 회사의 오너가 직원들에게 일임하고 현장을 떠나기가 쉽지 않지만 그는 결국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미국에서 공부했다.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AMP과정을 마치기도 했다. 한번 마음먹으면 끝을 보는 그의 성격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해외 진출은 우리에게 선택이 아닌 필수지요. 미래를 생각한다면 꼭 가야 할 길이기도 하고요. 그렇다고 무작정 나갈 수는 없지요. 계획을 세워 하나하나 추진하고 있어요. 마음먹은 대로 추진된다면 몇 년 후 미래에셋의 위상은 크게 달라질 겁니다. 지금은 아직 발표할 때가 아니지만 조만간 굵직한 라이선스도 하나 딸 겁니다.”“그렇지 않아요. 기회가 닿으면 외국 금융회사를 인수·합병(M&A)해 성장 동력으로 삼을 겁니다. 앞으로는 국내의 작은 회사들을 인수해 봤자 시너지 효과를 내기가 쉽지 않아요. 최근 증권 업계가 M&A 문제로 들썩거리는데 대형사 입장에서 소형사는 그리 매력적이지 못해요. 차라리 장기적으로 볼 때 외국 금융회사를 인수해 현지에서 경영하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손을 내저으며)그렇지 않아요. 두바이 건은 잘못 전달된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그곳에 법인이나 사무소를 낸다고 얘기한 적이 없는데 마치 뭔가가 결정된 것처럼 기사가 나갔어요. 거듭 강조하지만 두바이와 관련해 아직 결정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미래에셋은 올해로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박 회장이 동원증권 이사 자리를 박차고 나와 회사를 세운 것은 1997년 여름이다. 최현만 미래에셋증권 사장과 구재상 미래에셋자산운용 사장 등이 당시 ‘도원결의’한 창업 멤버다.“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미래에셋이 만들어진 지 벌써 10년이 흘렀어요.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감개가 무량하지요. 하지만 회사에서 행사는 일절 하지 않았어요. 기념식은 고사하고 직원들에게 케이크 하나 돌리지 않았죠. 임원들도 내심 큰 행사를 바라는 것 같았지만 못 본 척했습니다. 개인적으로야 거창한 행사를 하고 싶었죠. 회사가 이만큼 큰 것에 대해 자랑도 하고 속된 말로 폼도 한번 잡고 말이죠(웃음). 하지만 꾹 참았습니다. 자칫 자화자찬하다가 회사가 붕 뜰 수도 있잖아요. 너무 자만심에 빠지면 안 될 것 같았어요. 회사가 10년이 지나 이만큼 성장한 게 대단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고 본 것이죠.”“10년 동안 외형적으로 많이 성장했죠. 국내 펀드 시장을 주도해 왔다는 자부심도 있어요. 그런 만큼 책임감도 많이 느낍니다. 고객의 돈을 잘 운용해 그 수익을 돌려줘야 하기 때문에 그 어떤 비즈니스보다 신경을 많이 써요. 외부에서 볼 때는 어떨지 모르지만 사실 스트레스를 엄청 많이 받는 것이 자산을 운용하는 일이에요.”“회사가 얻은 열매를 나 혼자 가지려고 하지 않아요. 작은 부분이라도 전체 직원들과 나누려고 하죠. 실제로 주력회사 주식의 20% 이상을 직원들에게 나눠줬어요. 결정을 하는 과정에서는 줄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죠. 내가 그냥 갖고 있어도 되는 것을 임직원들에게 나눠주려니 왜 인간적인 갈등이 없었겠어요? 한 1주일은 진짜 많이 고민했을 겁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나누어 주는 것이 옳다는 결론을 내렸죠. 이 부분은 지금 생각해도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직원들이 그냥 조직원이 아니라 우리 회사, 내 회사라는 생각을 갖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볼 때는 더욱 그래요.”미래에셋 임직원들 가운데는 주식 부자가 많다. 일부는 수십 억 원대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고참 지점장 가운데도 줄잡아 10억 원 안팎의 주식을 갖고 있는 이가 적지 않다. 회사에 기여한 만큼 미래에셋 계열사의 주식을 나눠준 결과다.“(쑥스러운 듯 한참 동안 뜸을 들이다가 예전 동원증권 지점장 시절의 얘기를 불쑥 꺼냈다.) 당시 지점을 하나의 회사처럼 운영했어요. 작은 지점 안에 리서치팀, 영업팀, 마케팅팀 등을 두었죠. 아마 지금도 그렇지만 지점을 그렇게 운영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겁니다. 지점을 일사불란하고 체계적으로 이끌기 위해서였죠. 그렇다고 인원이 더 필요하지는 않았어요. 한 사람에게 두 가지 업무를 맡겼으니까요. 이는 미래에셋 창업 이후에도 똑같이 적용하고 있어요. 지금도 우리 회사에는 두 가지 업무를 동시에 하는 직원들이 많아요. 글쎄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지만 아무튼 조직을 가장 효율적이고, 한 방향으로 끌고 나가는 힘이 있지 않나 생각해요. 또 하나 장점이라면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많이 고민하지만 일단 마음을 굳히면 속전속결하는 편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미래에셋이 빠르게 성장하니까 불도저처럼 밀어붙이고 속도전에 강하다고 해요. 하지만 사실은 그 전에 많이 생각하고 준비하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놓고 밤을 새우기도 하니까요. 일단 마음에 결정을 내리면 그 다음날부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강력하게 추진하죠.”“일부에서는 우리가 펀드의 경영 참여에 찬성하는 것으로 얘기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기본적으로 펀드 자본주의(주주행동주의)에 반대해요. 아울러 우리가 갖고 있는 지분을 이용해 기업들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다만 투자자들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는 기업에 대해서는 이들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차원에서 행동할 생각이에요. 이미 몇몇 기업에는 레터를 보내 주주나 투자자의 입장을 고려해 달라는 의견을 전달하기도 했죠. 아마 일부 기업은 우리 편지를 받고 뜨끔했을 겁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주주를 우습게 보는 회사의 주식은 사지 않을 겁니다. 또 이미 샀다면 보유 비중을 줄일 생각이고요. 투자 측면에서 볼 때 가치가 없기 때문이죠. 주주를 가볍게 보는데 무엇인들 잘하겠어요?”박 회장은 미래에셋이 유한양행의 2대 주주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투자 가치가 높아 주식을 사다 보니 어느새 그렇게 됐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렇다고 유한양행의 경영에 간섭하는 일은 없다. 경영진이 워낙 잘하기 때문에 굳이 할 말이 없다고 했다. 그는 “펀드는 투자자들을 가장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늘 좋은 주식을 발굴하고 투자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앞으로도 유한양행처럼 특정 기업의 주요 주주가 되는 사례가 많이 생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중간에 차가 다시 한 번 들어왔다. 비서가 녹차를 가져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미지근한 물에 탄 녹차는 마시기에 부담이 없었다. 이따금 땀을 흘리던 박 회장은 좀 힘이 드는지 이번에는 티슈를 꺼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냈다. 그렇지만 자세만큼은 처음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다리를 포개는 법도 없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다시 이어졌다.“사실 보험사 인수는 운이 좋았어요. 당시 M&A 시장의 화두는 한국투자신탁과 대한투자신탁이었지요. 이 두 회사를 누가 먹느냐가 관심을 끌었어요. 다른 금융회사들 역시 이 두 회사를 인수하는 데만 골몰했죠. 하지만 우리는 달리 봤어요. 매물로 나온 SK생명(현 미래에셋생명)에 눈독을 들였어요. 겉으로는 투자신탁 회사에 관심이 있다고 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생보사 인수에 열중했죠. 다른 회사들이 다른 곳에 눈길을 돌리는 바람에 좋은 조건에 인수할 수 있었지요. 지금은 기존 계열사들과 많은 시너지 효과를 내며 효자 노릇을 하고 있어요.”“전혀 없어요. 개인적으로 은행에 대해서는 그리 큰 메리트를 느끼지 못해요. 예전에는 은행 밖에 없으니까 고객들이 은행으로 몰려들었죠. 또 이 과정에서 은행들 덩치가 커졌고요. 그러나 앞으로 은행의 위상이 지금처럼 탄탄하게 유지될 수 있을지 의문이고, 그렇게 된다는 보장도 없다고 봐요. 이제는 투자 시대 아닙니까. 그런 면에서도 은행은 적합하지 않죠. 씨티나 HSBC은행보다 골드만삭스나 메릴린치가 더 매력적이지요.”“해보니까 펀드는 참 대단해요. 밖에서 보면 돈이 마구 움직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항상 일정하게 유지돼요. 일단 펀드에 돈이 들어오면 잘 빠져나가지 않아요. 다만 다른 펀드로 이동할 뿐이죠. 펀드를 운용하는 회사 입장에서는 큰 메리트죠.”“딱히 누구를 모델로 삼고 경영을 하는 것은 아니에요. 나름의 소신과 비전을 갖고 회사를 이끕니다. 성과만 놓고 보면 아주 훌륭한 분들이 많지요. 우리나라 투자자들도 이름을 줄줄 외울 정도로 유명한 사람들이 많잖아요. 하지만 그들의 방식이 우리와 꼭 맞는다고는 보기 어렵지요.”“미국은 아주 자유로운 투자 문화를 갖고 있지요. 오마하 축제는 워런 버핏이 회장인 투자회사 벅셔해서웨이의 주주총회 자리지만 유명 농구선수와의 농구 대결 등 갖가지의 볼거리도 제공해요. 미국 사회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행사라고 봅니다. 우리의 투자 문화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어요. 축제 같은 분위기는 아직 느끼기 어렵지만 예전과는 다른 양상을 많이 볼 수 있어요. 특히 간접 투자가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많이 건강해졌다고 봅니다. 또 하나 장기 투자 문화 역시 조금씩 자리 잡아 가고 있다고 봐요. 길게 보고 투자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투자의 금과옥조입니다.”“몇 년 전부터 박현주 재단을 만들어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등 번 돈을 사회에 되돌려 주는 일을 하고 있어요. 금액이 많고 적음을 떠나 기부 문화를 만든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올해부터는 어린이 펀드에서 나오는 수익의 일정 부분을 떼어내 우리나라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어린이들을 중국 상하이에 보내고 있어요. 이미 이번 여름방학 때 1진이 다녀왔지요. 굳이 상하이에 보내는 것은 중국의 발전상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죠. 게다가 그들이 크면 미래에셋의 팬이 되지 않을까요?”박 회장은 ‘기부’라는 단어를 꺼내자 물 만난 고기처럼 할 말이 많아 보였다. 그러면서 그는 “앞으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기부에 적극 나설 생각”이라고 말했다.“그동안은 회사를 키우느라 개인적으로 돈을 많이 벌지 못했지만 앞으로 돈이 모이면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사회에 기부할 생각이에요. 기부라는 것이 꼭 돈이 많아서가 아니고 마음이라고 생각해요. 세계 최고의 선진국이라는 미국을 보면 10만~20만 달러의 연봉을 받으면서 정기적으로 사회에 기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요. 너무 부럽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지요.”“배당금을 많이 받은 거 맞아요. 아마 200억 원쯤 될 겁니다. 하지만 집에 생활비 조금 준 거 빼고는 전부 자산운용 증자에 참여하느라 썼어요. 개인적으로는 거의 손도 대지 못했죠. 좀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사실 그렇게 하고도 돈이 모자라 빚을 많이 지고 있어요. 대략 500억 원쯤 됩니다. 남들은 ‘박현주가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아직도 빚쟁이에요. (웃음) 하지만 3~4년쯤 지나면 모든 것이 정리될 것 같아요. 회사가 점점 좋아지고 있는 만큼 적지 않은 액수의 배당금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대화는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마주 앉은 지 벌써 2시간 가까이 됐다. 화제가 금산법 시행, 생보사 상장 등 일련의 금융정책 얘기로 옮겨지자 박 회장은 윤증현 전 금융감독위원장 관련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사실 얼마 전 신문에 윤증현 전 금감위원장에 대한 글을 쓰려고 했던 일이 있어요. 재임 기간에 눈치 보지 않고 한국 금융 산업 발전을 위해 소신껏 현안을 처리해 준 데 대해 박수를 보내고 싶었죠.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참았어요. 글도 3분의 1쯤 쓰다가 덮었고요. 아무리 동기가 순수하더라도 읽는 사람들이 색안경을 쓰고 보면 용비어천가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많이 소홀하지요. 최근 들어 해외 출장이 잦다 보니 집에 충실할 시간이 없어요. 특히 한창 크는 아이들한테 많이 미안하죠(박 회장은 1남2녀의 자녀를 두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가 하는 일이 지금 시점에서 꼭 필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박 회장은 위로 딸 둘, 밑으로 늦둥이인 초등학생 아들을 두고 있다. 특히 막내아들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으련만 강하게 키울 생각이라고 덧붙였다.“아들을 사립학교에 보내지 않았어요. 주변에서는 그래도 사립이 낫다고 권했지만 못 들은 척하고 공립학교에 보냈지요. 공부 좀 덜하면 어때요? 어릴 때는 친구들과 마음 놓고 뛰놀며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봐요.”“대학 때 ‘제3의 물결’을 그야말로 책이 닳도록 읽었죠. 나중에는 너덜너덜해져 보기조차 힘들 정도가 됐으니까요. 미래에 대해 세계적 석학이 진단한 것이 너무 흥미진진했고 새로운 세계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죠.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는 것 같은 체험도 했어요. 요즘도 미래에 대한 식견을 넓혀주는 책을 주로 봅니다. 물론 업무에 필요한 금융 관련 서적을 보기도 하죠. 그러나 시간이 부족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기는 힘들어요. 만약 챕터(Chapter)가 20개 정도 되면 한 대여섯 개를 추려서 봐요.”“따로 운동할 시간은 별로 없어요. 신경 써서 운동할 나이인데 그게 잘 안돼요. 그나마 간혹 시간이 나면 헬스클럽에 가서 러닝머신에서 뛰지요. 그런데 나이가 좀 들어서 그런지 가끔 관절이 아프기도 해요. 아마 조심하라는 신호인 거 같아요.”2시간에 걸친 인터뷰가 끝났다. 사진기자가 카메라 앵글을 이리저리 돌리자 그제야 “사실은 5시에 약속이 있어 나가야 하는데 너무 늦었다”며 양해를 구했다. 작별 인사를 하며 악수를 했는데 손바닥이 따뜻하고 말랑하게 느껴졌다.박현주1958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광주일고를 거쳐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부터 주식 투자를 했고 1986년 동원증권(현 한국투자증권)에 들어갔다. 입사 5년 만에 중앙지점장에 올랐고, 1991년에는 이사(강남본부장)로 초고속 승진했다. 1997년 미래에셋캐피탈을 세운 이후 미래에셋자산운용(97년), 미래에셋증권(99년), 미래에셋투신운용(2000년), 미래에셋맵스자산운용(2004년), 미래에셋생명(2005년) 등을 차례로 설립했다. 곧 자서전 ‘돈이 꽃보다 아름답다’를 펴낼 예정이다.정리=김상헌 한경비즈니스 취재편집부장·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