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근처’의 가치가 주목받는 시대. 하이퍼로컬 트렌드가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은 물론이고 글로벌 비즈니스 생태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을 계기로 급부상한 하이퍼로컬의 가능성, 과연 어디까지일까.

팬데믹에 다시 주목받는 '동네 플랫폼'
#1.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집에서 멀리 떨어진 인스타그램 맛집을 찾아가는 게 취미였던 프리랜서 김 모(32) 씨는 요즘 동네 탐방에 푹 빠졌다. 다른 지역에 사는 지인들과 따로 만남을 가지기 부담스러워진 요즘. 그간 자세히 들여다볼 겨를조차 없었던 ‘우리 동네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된 덕이다.

#2. 지역 밀착형 소셜미디어 ‘넥스트도어(Nextdoor)’의 최고경영자(CEO) 사라 프라이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동네’와 ‘이웃’이 우리 일상의 중심이 됐다”고 말했다. 거주 지역과 접근성의 힘이 지금처럼 중요한 적이 없었다는 게 그녀의 분석이다.


팬데믹 이후 전 세계 라이프스타일 트렌드는 ‘하이퍼로컬(hyper-local: 지역 중심 네트워킹)’이라는 화두를 떼놓고 말하기 힘들어졌다. 하이퍼로컬은 극단을 뜻하는 ‘하이퍼(hyper)’와 지역을 의미하는 ‘로컬(local)’을 더한 합성어다. 아주 좁은 지역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네트워킹이라는 의미로 쓰이곤 한다.

국내에서는 ‘슬세권(슬리퍼+세권: 집에서 슬리퍼를 신고 이동할 수 있는 주거권역)’ 혹은 ‘동네 경제’라는 개념과 맞닿아 있는 트렌드다. 수년 전부터 거주지를 기반으로 하는 하이퍼로컬 비즈니스가 조금씩 주목받는 분위기이긴 했지만, 코로나19라는 특수 상황이 강력한 트리거로 작용한 셈이다.

하이퍼로컬의 급부상은 수치로도 확인할 수 있다. 글로벌 리서치 회사인 테크나비오(Technavio)에 따르면 지난해 2280억 달러 규모였던 하이퍼로컬 관련 시장은 오는 2024년 6318억 달러로 3배 이상 성장할 전망이다.

국내 상황도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도 소비자들의 달라진 카드 사용 패턴에서 이런 추세를 읽을 수 있다. BC카드 빅데이터센터 보고서를 보면, 재작년까지만 해도 카드 사용자의 10%에 머물렀던 ‘동네소비형’의 비중이 지난해 13%까지 늘었다. 코로나19로 개인의 행동반경이 크게 줄어들면서 거주지와 가까운 곳에서 지출이 일어나는 ‘동네 소비’가 자연스럽게 증가한 것이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는 최근 국내외 외식 트렌드 조사 보고서를 통해 “안전하고 편리하며 접근성이 좋은 ‘홈 어라운드(home around)’를 중심으로 소비가 이뤄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하이퍼로컬을 이끄는 동네 플랫폼

달라진 것은 소비 패턴만이 아니다. 일상을 보내는 방식도 거주 지역을 기반으로 재편되는 분위기다. 무엇보다도 지역 기반 플랫폼 서비스들이 끼치는 영향이 크다. 중고 거래를 기반으로 커뮤니티 서비스까지 펼치고 있는 당근마켓이 대표적이다. 당근마켓 플랫폼 내 커뮤니티를 통해 동네 주민에게 꼭 필요한 생활 정보는 물론이고, 구인·구직, 분실물 습득 정보까지 자유롭게 오간다. 동네 플랫폼에서 인연을 맺은 또래 이웃과 함께 여가 활동을 즐긴다거나 동네 숨은 맛집을 방문하는 사례가 점차 일상으로 자리 잡히고 있다. 지역 기반 커뮤니티 플랫폼들이 일종의 방앗간 역할을 톡톡히 해주는 셈이다.

대기업들도 하이퍼로컬 트렌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모양새다. 최근 네이버가 내세운 ‘이웃톡’은 당근마켓의 커뮤니티 서비스를 정조준한 선전포고다. 네이버는 이 서비스에 대해 “몰랐던 꿀정보를 진짜 이웃과 나누는 곳이다”라고 정의한다. 지역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네이버에 개설한 ‘지역 기반 커뮤니티’를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든 확장형 서비스다. 네이버가 동네 시장 먹거리를 주문할 수 있는 ‘동네시장 서비스’를 론칭한 것도 하이퍼로컬 흐름과 무관치 않다.

팬데믹을 계기로 온라인 시장이 급성장하는 상황이지만 하이퍼로컬의 흐름을 타고 오프라인 비즈니스의 새로운 기회가 잡을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타 지역의 랜드마크를 구경하기 위해 시간을 쏟는 것보다는 저마다의 콘텐츠를 담은 동네 공간에서 일상을 보내는 쪽에 힘이 실릴 전망이기 때문이다.

골목길 경제학자로 불리는 모종린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는 저서 <머물고 싶은 동네가 뜬다>에서 “생활권 도시로의 변화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며 “원격근무 활성화, 슬세권과 직주일치를 중시하는 MZ(밀레니얼+Z) 세대의 대두는 도시재생사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준다”고 분석했다. 뿐만 아니라 “이제 로컬은 우리에게 ‘생활권’의 의미로 중요해졌다”며 “포스트 코로나 사회에서 생활권 중심으로 도시를 재구성한다면, 현실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문제가 생활권 경제다”라고 내다봤다.

글로벌 시장에서도 하이퍼로컬 붐

팬데믹 상황이 장기화될수록 하이퍼로컬은 전 세계적으로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될 전망이다. 미국의 경우 지역 비즈니스를 지지하는 ‘바이 로컬(buy local)’이 대세로 떠올랐다. 컨설팅 기업 빅레드루스터(Big Red Rooster)가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코로나19 사태 이후 외출자제령 시기 동안 미국인의 68%가 대형 체인망이 아닌 로컬 비즈니스를 통해 소비했다. 코트라(KOTRA)는 “팬데믹 이후에도 지역 내에서 생산되는 제품이나 자영업자가 운영하는 매장을 이용해 비즈니스를 지지하려는 움직임이 지속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올 들어 미국 텍사스주에서는 하이퍼로컬 서비스의 가능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탄생하기도 했다. 사상 초유의 한파와 폭설로 인해 각 가구별로 고립될 위기에 처했던 지난 2월. 넥스트도어를 통해 이웃끼리 생활필수품을 나누거나 동네별 대피 정보를 공유할 수 있었다. 넥스트도어는 2011년 미국에서 시작한 지역 기반 소셜미디어로, 지역 정보 교류와 중고거래가 활발히 이뤄진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당근마켓과 닮은꼴이다.

중국에서는 지역 공동 구매 플랫폼인 핀둬둬, 둬둬마이차이, 메이퇀 등이 지방 소도시와 농촌 지역을 주요 타깃으로 서비스 중이다. 인도 임팩트 스타트업 ‘샵키라나’의 로컬 비즈니스 사례도 눈에 띈다. 샵키라나는 아파트 등 소규모 지역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서비스하는 ‘니드스퀘어’를 론칭, 코로나19로 인한 봉쇄 상황에서 지역사회의 주목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