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도 끝나고 지겹던 더위도 한풀 꺾였다. 이제는 나 자신을 치유하고 행복해져야 할 시간. 인위적 시설물을 최대한으로 배제하고 자연 스스로 만들어낸 힐링 탐방길을 전북에서 찾았다.

길에서 만나는 '힐링' 전북 생태 탐방길 3선

전설의 화암사 옛 숲길 ‘연화공주 생태숲길
화암사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 내비게이션으로 전북 완주군 화암사를 검색한 후 임도를 따라 곧장 오르면 발품을 팔지 않고도 목적지에 닿게 된다. 하지만 화암사가 있는 불명산자락에 옛사람들이 다니던 숲길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래전 화암사 가는 길은 골짜기가 으슥하고 깊어 사냥하는 남정네도 접근하기 어려웠단다. 골짜기 어귀의 바위 벼랑을 부여잡고 올라야 비로소 절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전해질 정도로 험하고 거칠었다.

들머리인 연화공주공원은 아직 조성 중이라 검색도 되지 않는다. 화암사를 찍고 가다 막바지에 이정표와 안내판을 확인한 후 차를 세워야 한다. 연화공주는 화암사 창건 설화 속에 등장한다.
병든 공주 때문에 시름의 나날을 보내던 신라왕의 꿈속에 부처님이 나타나 연꽃잎을 던져주고 사라졌다. 때는 엄동설한 추운 겨울이었지만 왕은 신하들을 풀어 전국을 헤맨 끝에 지금의 완주군 첩첩산중에서 바위에 핀 연꽃을 찾아냈고, 그것을 공주에게 먹여 병을 낫게 했다는 내용이다. 감복한 왕에 의해 바위 위에 지어진 절이 바로 화암사다.

숲길은 줄기 가득 촘촘히 꽃이삭을 피워낸 맥문동 군락을 거슬러 가며 시작된다. 숲은 천이 과정을 마치고 이미 극상림(안정화 상태로 지속하는 숲) 단계로 접어들었다. 서어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가 만들어낸 푸른 숲 터널을 지나면 산골의 그림자 속으로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수령을 가늠하기 어려운 고목들이 생존의 역사를 뽐내는가 하면 계곡물이 붉은색 암반지대 위를 흐른다. 일행의 말소리가 묻힐 만큼 소리가 우렁차고 바위 표면에 촘촘한 결을 새겨 놓은 것을 보면 근처에 폭포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주민들의 증언이 없더라도 숲은 스스로 복원된 것임이 틀림없다. 땔감 1순위로 남김없이 벌목됐던 자귀나무들이 버젓이 자라나 숲의 일부가 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화암사라는 낡은 표지판 위로는 철제 계단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다. 숲길을 통틀어 탐방객을 배려한 유일한 시설물이다. 벼랑을 타고 쏟아지는 폭포의 실체를 넘어서면 드디어 화암사. 숲길의 끝에서 만나니 더욱 반갑고 신기하다.

화암사는 고찰로 누각 우화루(보물 662호)와 극락전(국보 316호)을 품고 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찬찬히 돌아볼 예정이다.

찾아가는 길: 화암사(전북 완주군 경천면 화암사길 271)를 목적지로 찍고, 연화공주정원 주차장에 차를 세운 후 그곳을 들머리로 탐방을 시작해야 한다.

주변 볼거리: 부근에 조선시대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던 선비들이 신발을 갈아 신었다는 싱그랭이 생태마을과 마을에서 운영하는 식물원 ‘싱그랭이 에코정원’이 있다.

먹을거리: 싱그랭이 마을의 ‘콩밭식당’은 마을 기업이 운영하는 두부요리 전문점이다. 가마솥 두부는 친환경 제조법에 해수를 정제한 천연간수를 사용해 부드럽고 몹시 고소하다.



길에서 만나는 '힐링' 전북 생태 탐방길 3선

자발적 복구 습지로의 자발적 탐방 ‘고창 운곡람사르습지
전북 고창에는 장어와 수박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을날, 걷기 좋은 람사르습지도 있다. 고창의 운곡지구 오베이골로 불리는 골짜기에는 9개의 마을이 있었다. 1984년 원자력발전소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저수지가 조성되면서 마을들은 모두 수몰됐다.

그로 인해 농사가 멈춰지고 인위적인 간섭이 배제된 후 저수지 일대의 저층 산간지대는 생태가 빠른 속도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복원된 운곡습지는 보존 가치를 인정받아 2011년 람사르습지로 지정됐다.

운곡람사르습지에는 4개의 탐방 코스가 있다. 그중 가장 일반적인 것은 탐방안내소를 기점으로 저수지 둘레를 돌아오는 9.6km의 순환 코스다. 코스 중 탐방안내소에서 습지홍보관까지 3.3km 구간은 탐방열차를 타고 편하게 이동할 수 있다.

습지홍보관에 도착하면 세계 최대 크기의 300톤 고인돌과 생태공원 곳곳에 놓인 삵, 고라니, 수달, 멧돼지 등의 조형물을 살펴봐야 한다. 동물 조형물들은 주민들이 폐목재를 이용해 만든 것으로 탐방객도 체험할 수 있다.

운곡습지에는 800종 이상의 식물, 곤충, 양서류, 조류, 포유류가 서식하고 있다. 탐방로는 수변의 흙길을 지나고 데크로드를 따라 이어지는데, 높이를 두어 동물들의 이동을 배려했고 생태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최대한 데크 폭을 좁게 만들었다.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수록 하늘과 숲은 선명해진다. 숲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이곳에서는 바닥의 습지에서부터 생명의 꿈틀댐이 느껴진다. 오래전 다랑논이 있던 자리는 수많은 식생의 터전이다. 비가 내려 물이 고이면 주변의 버드나무가 그 물을 빨아들여 수위를 낮췄던 때문이다. 이렇듯 자연이 스스로 복원되는 과정은 습지 곳곳에서 관찰된다.

습지를 걷는 내내 새소리, 풀벌레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아마도 수십 종의 새와 곤충이 소리를 제공했을 것이다. 한 바퀴를 돌고 나니 더위에 피폐해진 정신이 다시 복구되는 듯하다.

조류관찰대의 망원경 너머로 철새들을 관찰하려면 두세 달은 더 기다려야 하지만 가득 피어난 사초와 고마리 위로 반딧불 빛이 별처럼 흩날릴 날은 머지않았다. 드디어 가을, 가을이다.

운곡람사르습지 탐방안내소에는 숲 해설사가 상주하고 있다. 탐방 시 무료로 해설을 들을 수 있다. 단 2, 3일 전 예약해야 한다.

찾아가는 길: 고창운곡람사르습지 자연생태공원 탐방안내소(고창군 아산면 운곡서원길 15)
주변 볼거리: 운곡저수지 남쪽에 있는 고인돌 유적지와 연계해 탐방을 이어갈 수 있다.

먹을거리: 운곡람사르습지를 둘러싼 6개의 마을 중 용계마을과 호암마을에서 연꽃잎을 테마로 한 생태밥상과 복분자주를 즐길 수 있다(예약: 고창 운곡습지생태관과 협의회).



길에서 만나는 '힐링' 전북 생태 탐방길 3선

금강을 만나는 숲길 ‘장수 뜬봉샘생태길
전북 장수군 수분마을에는 금강물사랑체험관이 있다. 금강에 서식하는 생명과 생태계를 관찰하고 각종 체험 활동을 즐기기 위해 제법 많은 탐방객이 찾아온다. 하지만 탐방객 반 이상은 이곳에 와서야 금강의 발원지가 체험관 뒤편 산속에 있는 작은 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일명 물뿌랭이로 불리는 수분마을에서 시작된 뜬봉샘생태길은 높이 780m의 신무산 8부 능선까지 이어진다. 수분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생태공원 전망대와 금강사랑물체험관을 지나면 1.5km의 오르막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서둘러 오를 수가 없다. 걷는 내내 생태숲이 만들어낸 볼거리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생태연못에서 수생생물을 살피고 야생화 군락지에서 꽃 사진을 찍어 이름을 확인하다 보면 시간에 대한 감각은 자연 무디어진다.

자작나무 힐링 숲을 통과하고 가야의 봉수 유적을 만나면 반쯤 온 것이다. 뜬봉샘생태길은 계곡과 나란히 놓였다. 금강의 첫물은 역시나 맑고 깨끗하다. 그 증표로 큼지막한 가재 한 마리가 물속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낯은 익지만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탓에 나무와 열매는 언제나 새롭다. 자상하게 살펴 가며 걷다가 숨이 차고 등덜미가 촉촉해졌다고 느낄 무렵이면 기다렸다는 듯 뜬봉샘이 나타난다.

뜬봉샘은 마치 오래된 약수터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물맛이 그만이다. 두 바가지를 마시고 수통을 채우니 더는 욕심 부려 담을 곳이 없다. 조그만 샘에서 솟은 물은 장수군, 진안군, 무주군, 옥천군, 영동군, 보은군, 청양군, 부여군, 익산시, 그리고 서천군과 군산시를 거쳐 서해 하구까지 397km의 길고 긴 여행을 하게 된다.

뜬봉샘에는 태조 이성계에 관한 전설이 담겨 있다. 봉황이 나타나 이곳에서 기도 중인 이성계에게 조선 개국을 계시하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다. 봉황이 뜬 자리니 당연히 이름도 뜬봉샘이다.

그러고 보니 시원한 산바람을 타고 뭔가 좋은 기운이 느껴지는 듯하다. 뜬봉샘으로 가는 또 다른 코스는 수분재 고개에서 신무산 능선을 타고 이어진다. 뜬봉샘에 도착한 후 수분마을 방향으로 내려와도 좋다.

찾아가는 길: 금강물사랑체험관(전북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 587-1)

주변 볼거리: 금강물사랑체험관 주변으로 생태놀이터, 생태온실, 생태연못 야생화 군락지가 조성돼 있으며 수분마을에는 천주교 박해의 역사가 담긴 장수성당 수분공소(한옥)가 있다.

먹을거리: 수분마을 방문자센터에서 마을에서 나는 제철 재료를 이용해 주민들이 직접 건강에 좋은 생태밥상을 차려낸다(예약: 뜬봉샘 생태관광지).

글· 사진 김민수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