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이로운 소문>부터 <이태원 클라쓰>, <스위트 홈>까지. 오리지널 지적재산권(IP)을 기반으로 글로벌 콘텐츠 시장의 장벽을 넘은 K-스토리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무한한 잠재력을 품고 있는 K-IP 비즈니스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Special] K-IP, 글로벌 콘텐츠 밸류체인을 꿈꾸다
# “K-팝이 세계 음악 시장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았죠. K-스토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 웹소설이나 웹툰에서 파생된 거대한 스토리 유니버스가 글로벌 콘텐츠 시장을 뒤흔들 겁니다.” -국내 콘텐츠 업계 관계자

바야흐로 K-스토리 전성시대다. 웹소설, 웹툰에서 출발한 오리지널 IP가 드라마, 영화 등 전통적인 형태의 영상 제작물로 재탄생하는 것은 물론이고, 게임, 오디오북, 캐릭터 산업에까지 손을 뻗치며 하나의 거대한 팬덤 비즈니스를 형성한다. 한국 웹소설과 웹툰이 주도할 ‘글로벌 콘텐츠 밸류체인(가치사슬)’에 대한 기대감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은 요즘이다.

최근 몇 년 사이 눈에 띄게 달라진 국내 콘텐츠 시장의 흐름은 기존 원소스 멀티유스(OSMU: 하나의 소재를 여러 장르에 활용해 시너지 효과를 노리는 전략)와도 결을 달리한다. 과거에도 원작 소설이나 만화를 기반으로 2차 저작물을 제작해 흥행한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몇몇 콘텐츠가 메가히트(mega-hit)하는 데 그쳤을 뿐, 확장성을 가진 콘텐츠 생태계가 형성됐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원작 로맨스 소설을 기반으로 만든 한류 드라마가 아시아 문화권을 강타하는 상황 속에서도 만화나 장르소설은 어디까지나 ‘B급 문화’, ‘서브컬처’라는 시각이 주를 이루던 시절의 이야기다.

지금은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국내 웹툰 산업이 날로 고도화되며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는 데다, 장르소설은 ‘웹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성을 확보하며 시장 파이를 늘려 가는 중이다. 웹툰과 웹소설을 일부러 찾아보는 유료 독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과정에서 확고한 K-스토리 시장과 고유의 생태계가 확보된 것이다.
[Special] K-IP, 글로벌 콘텐츠 밸류체인을 꿈꾸다
교보증권 ‘웹툰이 곧 글로벌 흥행 IP’ 보고서를 보면, 국내 웹툰 시장 규모는 2013년 1500억 원에서 2020년 1조 원으로 7배 가까이 성장한 것으로 추산된다. 웹소설의 성장세도 가파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국내 웹소설 시장 규모는 2013년 100억 원에서 2018년 4000억 원으로 40배 이상 커졌다. 웹소설 업계 관계자들은 지난해 6000억 원, 올해 1조 원대까지 시장 규모가 커지며 성장가도를 달리는 중이라고 추산한다. 한 업계 관계자는 “정확한 숫자를 말하긴 힘들지만, 적어도 현재 추정되는 규모보다는 훨씬 큰 시장”이라면서 “웹툰을 제외한 웹소설의 비즈니스 가치만 따져도 연 1조 원 이상의 규모라고 본다”고 분석했다.

글로벌 콘텐츠 원천기지 꿈꾸는 두 공룡
[Special] K-IP, 글로벌 콘텐츠 밸류체인을 꿈꾸다
그렇다면 오리지널 IP의 잠재력이 최근 몇 년 사이 눈에 띄게 주목받게 된 가장 큰 배경은 무엇일까. 다양한 원인이 존재하지만, 무엇보다도 거대 플랫폼 기업들의 적극적인 투자를 빼놓고 말하기는 힘들다. 특히 국내 정보기술(IT) 업계의 대표 격인 네이버와 카카오가 IP 비즈니스를 ‘미래 핵심 사업’으로 판단하고 팔을 걷어붙인 것이 주효했다.

네이버웹툰은 콘텐츠 플랫폼 사업 강화를 위해 수년간 지속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최근에는 한성숙 네이버 대표가 직접 “1000억 원 규모의 글로벌 IP 사업 자금을 투자하겠다”고 언급하며 IP 비즈니스를 향한 야심을 드러낸 바 있다. 경쟁사인 카카오엔터테인먼트는 그간 1조5000억 원 규모의 투자액을 IP 개발에 쏟은 끝에 8500개의 오리지널 IP를 보유할 수 있었다. 이 오리지널 IP들은 카카오가 목표로 하고 있는 ‘슈퍼 IP 유니버스’의 꿈을 이뤄줄 핵심 자원이다.

자본력을 가진 IT 대기업이 상업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오리지널 IP를 전략적으로 개발하고, 독자들은 다양하게 가공된 스토리 콘텐츠를 유료로 소비하는 시장이 자리 잡혔다. 잘 짜인 플랫폼 인프라를 중심으로 소비자와 창작자, 자본이 모여들며 IP 산업은 자연스럽게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떠올랐다.
사진=JTBC, 티빙
사진=JTBC, 티빙
각 분야에서 제작 노하우를 갖고 있는 플레이어들을 한데 모아 다양한 OSMU를 추진할 수 있다는 점도 거대 플랫폼이 가진 힘이다. 네이버웹툰은 웹소설과 웹툰, 영상을 아우르는 ‘글로벌 콘텐츠 IP 밸류체인’을 사업 전략으로 세운 상태다. 방탄소년단(BTS) 등 글로벌 아티스트를 연계한 웹툰, 웹소설을 제작하거나 DC코믹스 IP를 활용한 오리지널 웹툰을 제작하는 방안도 준비 중이다.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오디오북 등 2차 저작물을 선보일 수 있는 판로가 과거보다 넓어진 최근의 트렌드도 IP 산업의 호재로 작용하고 있다. 네이버의 인기 웹툰 <스위트 홈>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로 제작돼 공개 4일 만에 해외 13개국 일일 차트 1위를 차지한 바 있다. 카카오의 <이태원 클라쓰>도 OTT를 통해 선보인 드라마 콘텐츠가 해외 팬덤을 구축하면서 원작 웹툰 캐릭터까지 시너지 효과를 누린 IP 유니버스의 성공 사례다. 올해도 이미 대중에게 검증된 오리지널 IP들이 2차 저작물로 제작돼 OTT 시장에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다. 올 9월에는 인기 웹툰 <유미의 세포들>이 드라마로 각색돼 티빙(TVING)에서 론칭했다.
[Special] K-IP, 글로벌 콘텐츠 밸류체인을 꿈꾸다
여기에 글로벌 시장 진출까지 본격화되며 시장의 판은 더 커졌다. 현재 아시아 시장뿐만 아니라 북미, 유럽에서까지 K-스토리에 대한 관심이 무르익은 상황이라, 앞으로 한국 시장이 글로벌 콘텐츠 원천기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적지 않다.

이미 글로벌 시장의 반응은 고무적이다. 네이버웹툰은 지난해 11월 프랑스 유료 서비스를 시작한 이후 현재까지 구글플레이 만화 부문에서 1위를 유지하고 있다. 또 카카오웹툰은 만화 강국으로 불리는 일본 웹툰 시장에서 1위를 기록 중이며, 태국 시장에서도 8월 한 달 매출액 1위를 차지했다.

오리지널 IP 비즈니스를 선점하기 위한 네이버와 카카오의 플랫폼 인수 행보도 숨가쁘다. 최근 네이버웹툰은 국내 웹소설 시장의 최대어로 꼽혔던 문피아의 지분 56.26%를 취득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지분 취득을 위한 투자금은 1687억 원이다. 지분 획득이 최종 완료되면 네이버웹툰은 문피아의 최대주주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올해 1월 북미 최대 웹소설 플랫폼 왓패드를 인수한 데 이어 공격적으로 저변 확대에 나서고 있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도 올해 들어 북미 웹툰 플랫폼 타파스, 웹소설 플랫폼 래디쉬를 인수했다. 인수액은 각각 6000억 원, 5000억 원 규모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 측은 월트디즈니컴퍼니, DC코믹스, 워너 브라더스 등에서 글로벌 콘텐츠 산업을 선도한 인재들이 타파스와 래디쉬에 다수 포진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타파스 최고크리에이티브책임자(CCO)인 미셸 웰스(Michele R. Wells)는 월트디즈니와 글로벌 출판사들을 거쳐 DC엔터테인먼트 부사장을 지낸 스토리 IP 전문가다. 래디쉬 CCO인 수 존슨(Sue Johnson)은 미국 지상파 방송국인 ABC방송국에서 일일 드라마 제작을 총괄했던 스토리텔링 전문가다.
사진=카카오엔터테인먼트
사진=카카오엔터테인먼트
콘텐츠 업계에서는 오리지널 스토리 IP를 기반으로 하는 제작 환경이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웹소설과 웹툰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이 높아지는 것도 중요한 배경이지만, 원천 IP를 토대로 2차 저작물을 만드는 것이 자본과 시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기획 단계부터 2차 제작을 염두에 두고 웹소설이나 웹툰 제작에 들어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원작 웹툰을 기반으로 드라마 대본을 준비 중인 한 드라마 작가는 “이미 흥행한 인기작을 기반으로 안정적인 작품 제작을 하고 싶어하는 제작사가 많아지고 있다. 최근에는 기획부터 웹소설, 웹툰, 영상물을 미리 구상하는 경우도 있다”면서 “웹소설이나 웹툰을 먼저 론칭하면 이 스토리가 시장에서 얼마나 통하는지 미리 테스트해볼 수 있다. 이 단계에서 독자들의 반응이 너무 미비하다면 2차 저작물은 제작하지 않는 쪽으로 빠르게 결론 내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글 정초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