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현대자동차가 1974년 발표한 ‘포니 쿠페 콘셉트’를 원형 그대로 복원한다고 밝혔다. 한 시대를 풍미한 자동차 디자인의 ‘원조’가 현대차임을 공표하는 순간이었다.
현대차의 '포니 쿠페 콘셉트' 복원, 긁지 않은 복권?
현대차에 한 번이 아닌 평생토록 돈이 지급되는 연금복권이 발견됐다. 그런데 이 복권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다. 당첨됐던 사실은 과거의 자료들로 증명할 수 있지만 복권표가 없다는 것.
현대차가 맞닥뜨린 이 이야기를 순서대로 나열해보자. 이탈리아의 전설적 자동차 디자이너이자 자동차 디자인의 아버지라 불리는 조르제토 주지아로(Giorgetto Giugiaro). 그는 이탈리아 디자인 회사인 ‘GFG 스타일’의 설립자 겸 대표로, 포니를 시작으로 포니 엑셀과 프레스토, 스텔라, 쏘나타 1· 2세대 등 현대차의 초기 모델들을 디자인한 것으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여하튼 현대차의 첫 번째 자동차였던 포니가 그의 손에서 디자인됐고, 이후 성공가도를 달린 현대차 스토리는 너무 유명한 일화다. 이때 주지아로가 추가로 디자인한 또 1대의 자동차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1974년 이탈리아 토리노 모터쇼에 등장한 ‘포니 쿠페 콘셉트’였다.
여기까지만 해도 ‘복권’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포니 쿠페 콘셉트의 디자인이 하필(?)이면 1970~1980년대를 주름잡은 주지아로 스타일 쿠페의 시발점이 됐던 것이다. 디자이너가 동일인이니 당연할 수 있지만 포니 쿠페 콘셉트와 유사한 요소로 디자인된 주지아로의 여러 작품들이 이후 자동차 역사에 남을 ‘명작’ 반열에 올랐다. 지금까지도 로터스의 역작으로 불리는 ‘에스프리(1976년)’와 란치아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델타(1979년)’가 그렇다. 비슷한 시기에 출시된 이스즈의 ‘피아자(1981년)’ 또한 포니 쿠페 콘셉트와 형제차라 해도 믿을 정도로 같은 디자인 유전자를 계승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에게 영화 <백 투더 퓨처>의 타임머신으로 유명한 ‘드로리안 DMC12(1981년)’는 주지아로가 직접 포니 쿠페 콘셉트 디자인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물론 단 1대의 차가 갑자기 자동차 디자인계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는 경우는 드물다. 모든 것이 점진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포니 쿠페 콘셉트 이전에도 엇비슷한 차들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의 손으로 두드려 풍만한 곡선과 볼륨을 강조했던 1960년대의 자동차와 달리, 1970년대 들어 자동차 산업은 효율적인 자동화 대량생산 체계로 바뀌면서 직선적이고 평면적인 차들이 주류를 이루기 시작했다. 이렇게 자동차 디자인이 급속도로 바뀌어 가는 시점에 전혀 새로운 언어로 쿠페 디자인을 정의한 것이 바로 포니 쿠페 콘셉트였다.
현대차의 '포니 쿠페 콘셉트' 복원, 긁지 않은 복권?
1 1974년 처음 선보인 포니 쿠페 콘셉트
2 영화 <백 투더 퓨처>의 타임머신으로 유명한 드로리안 DMC12
3 지난해 7월, 현대차의 고성능 브랜드 N에서 공개한 N 비전 74

당시 포니 쿠페 콘셉트는 쐐기 모양의 노즈와 원형의 헤드램프, 종이접기를 연상케 하는 기하학적 선으로 전 세계 자동차 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뿐 아니라 테일램프 위 시야 확보를 위한 작은 리어윈도(엑스트라 윈도)와 이들이 통째로 열리는 아주 작은 테일 게이트 등 새로운 시도가 가득했다. 특히 엑스트라 윈도는 쐐기형 실루엣과 후방 시야를 동시에 확보하는 디자인으로 당시에는 매우 파격적인 시도였다. 멋과 공기역학, 여기에 실용성까지 모두 담겠다는 주지아로의 고뇌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포니 쿠페 콘셉트가 새 시대 디자인의 첫 타자가 된 건 우연일지 모른다. 당시 주지아로 같은 ‘거장’의 터닝 포인트가 될 만한 주요 작품을 맡기에, 현대차는 세계 시장에서 변방의 무명 회사에 가까웠다. 주지아로 또한 포니의 양산조차 반신반의 했을 정도라 하니 쿠페 모델은 오죽했겠는가. 주지아로의 속내야 알 수 없지만, 그 또한 포니 쿠페 콘셉트를 그저 가벼운 ‘실험’ 정도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이런 ‘우연’에서 ‘잭팟’이 터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시의 현대차는 굴러 들어온 복을 알아볼 능력이 없었다. 잠시 포니 쿠페 콘셉트의 양산을 추진했던 모양이지만 결국 폐기 수순을 밟았다. 이와 관련된 자료도 1970년대 말~1980년대 초에 대부분 유실됐다. 남아 있는 사진조차 몇 장 되지 않을 정도다. 그렇게 아쉬운 시간이 흘렀고, 포니 쿠페 콘셉트의 디자인 유산을 물려받은 유럽이나 일본 브랜드의 자동차들은 지금도 시대를 대표하는 명품 디자인으로 칭송받고 있다. 대인배라 해야 할지, 아니면 쿨하다고 해야 할지, 그걸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현대차였다.
하지만 이런 현대차를 화들짝 놀라게 한 사건이 있었다. ‘N 비전 74’의 출시가 그 트리거였다. 지난해 7월 처음 공개한 고성능 수소 하이브리드 롤링랩(rolling lab·모터스포츠에서 영감받은 고성능 기술을 양산차에 반영하기에 앞서 연구·개발 및 검증하는 차량) N 비전 74는 다름 아닌 포니 쿠페 콘셉트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됐다. 이 차가 발표된 직후 현대차는 그들이 기대하던 것 이상의 주목과 박수갈채를 받았다. 포니를 추억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 시대를 알 리 없는 Z세대까지도 N 비전 74의 사이버펑크적 매력에 열광했다. 전 세계 미디어의 호평과 찬사도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포니 쿠페 콘셉트와 N 비전 74 사이에 존재했던 수많은 다른 자동차들이 다시 소환됐다. 원조 논란이 벌어진 것이다. 현대차가 서열 정리에 진심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자, 이탈리아까지 날아가 주지아로를 만나야 했던 이유다. 언급된 모든 차들의 원작자인 주지아로의 말이 곧 법이기 때문이다.
이 많은 명차(특히나 드로리안 DMC12)들의 디자인 씨앗을 제공한 모델이 있다는 것은 자동차 회사엔 영원히 써먹을 수 있는 복권이나 다름없다. 더욱이 지금의 현대차는 굴러 들어온 복을 정확히 알아 볼 수 있는 정확한 눈과 능력도 지녔다.
지난해 11월 24일 현대차는 포니 쿠페 콘셉트를 원형 그대로 복원하는 프로젝트를 가동한다고 밝혔다. 이 ‘복권표’를 복원하겠다고 공표한 것이다. 그래봤자 워킹 목업 정도일 이 프로젝트는, 사실 요식행위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원을 강행하는 건, 이 ‘복권’이 확실히 우리에게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으며, 앞으로 연금처럼 두고두고 써먹겠다고 세상에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현대차의 '포니 쿠페 콘셉트' 복원, 긁지 않은 복권?
4 지난해 11월, 현대차의 초청으로 내한한 세계적인 자동차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

2023년 현대차는 아마도 어느 나라 모터쇼 행사장의 수많은 관중 앞에서 그 복권을 긁어 직접 우리 눈앞에 보여줄 것이다. ‘현대차가 원조가 맞다’는 ‘확인 사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앞으로 현대차는 자사 디자인의 시발점을 포니 쿠페 콘셉트에 두고 이 차에서 시도됐던 혹은 발견되는, 다양한 요소들을 향후 현대차 디자인에 요긴하게 활용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 복권에 당첨되면 배가 아파야 할 텐데 어쩐지 이 소식은 기쁘게 들렸다. 이는 아마도 현대디자인센터장인 이상엽 부사장의 “포니 쿠페의 디자인은 현대차의 유산이기도 하지만, 대한민국의 유산이기도 하다”라는 말에 공감했기 때문일 거다.
부디 현대차가 이 말에 책임을 지고, 이 ‘복권’을 원천 삼아 우리나라 자동차 디자인, 아니 자동차 산업을 끊임없이 성장시키기를.
한편, 현대차의 초청으로 한국에 방문한 주지아로는 “포니를 디자인했던 시절, 치열한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 도전장을 낸 한국과 현대차의 디자인을 맡아 뿌듯했다”며 “현대차의 브랜드 유산을 기념하는 포니 쿠페 콘셉트 복원 프로젝트에 힘을 보태게 돼 영광”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김준선 자동차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