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 된 웹 IP…가끔 마이너가 변화를 이끈다
[한경 머니 기고 = 문현선 세종대 공연·영상·애니메이션대학원 초빙교수] ‘시맨틱 에러’는 사전적으로 프로그래밍 언어의 문법이 정상적인데도 실행 결과가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는 오류를 지시한다. 즉, 프로그래머의 예측대로라면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오류인 셈이다. 당연히 프로그래머는 당혹스럽다. 외견상 눈에 띄는 ‘신택스 에러’라면 해결이 비교적 쉽지만, 문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면 원인을 찾아내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의 삶에서 이런 오류가 발생한다면 어떻게 될까.

마이너와 마이너가 만났을 때
<시맨틱에러>는 저수리 작가의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왓챠 오리지널 BL(Boy’s Love) 드라마다. BL은 웹소설이나 웹툰에서는 상당한 팬덤을 확보하고 있는 장르이지만, 드라마의 관점에서는 호불호가 갈리기 쉬운 마이너 장르에 속한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플랫폼의 시대라고는 하지만 국내외 수많은 플랫폼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춘추전국시대에 토종 OTT 왓챠는 절대 약자로 분류된다(2022년 12월 11일 기사에 따르면 왓챠는 LG텔레콤에 인수될 예정이며, 왓챠는 어디든 매각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는 상황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2년을 돌이키건대 기억에 남는 단 하나의 드라마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시맨틱에러>다.
희망이 된 웹 IP…가끔 마이너가 변화를 이끈다
<시맨틱에러>는 BL이라는 장르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OTT라는 플랫폼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웹소설과 웹툰을 원작으로 한 IP 드라마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유일무이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BL이라는 장르에 대한 열렬한 애호는 아직 일본 문화 개방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전인 1980년대 말에 순정만화 팬덤에서부터 시작됐다. 오자키 미나미의 <절애-1989->는 아마추어 동인들끼리만 조용히 돌려 보던 야오이(동인들이 그리는 만화에 예쁘장한 남성 캐릭터만 등장하고 ‘절정이 없고 결말이 없고 의미가 없다’라는 비판에서 시작된 용어로서 이후 장르 용어로 사용되다가 BL이라는 정식 장르명으로 대체됐다) 장르가 만화 시장의 주류로 부상했던 역사의 증거다.

오자기 미나미라는 작가와 <절애-1989->라는 작품이 만화라는 서브컬처에서 BL 장르의 공식화를 지시하는 표지였다면, <시맨틱에러>는 드라마와 영화라는 주류 콘텐츠에서 BL 장르가 공식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결정적 순간을 가리킨다.

드라마 <시맨틱에러>는 2022년 2월 16일부터 3월 10일까지 왓챠에서 매주 수요일과 목요일에 공개됐다. OTT 플랫폼에서 공개된 지 6개월이 넘는 드라마가 계속 화제성을 유지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러나 <시맨틱에러>는 2022년 12월까지 거의 10개월 이상 톱10의 지위를 유지했고, 2022년 12월 10일 극장판 <시맨틱에러: 더 무비>는 왓챠에서 공개되자마자 지고무상한 존재감을 입증했다.

추상우 역의 박재찬 배우가 제58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뉴웨이브상을 수상함으로써 <시맨틱에러>의 거센 파고는 정점을 찍었으며, BL은 명실상부한 대세 장르로서 위상을 정립하게 됐다. BL이라는 마이너한 장르의 웹소설 작품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던 아이돌 출신 배우(박재찬은 아이돌 그룹 DKZ의 멤버)가, 그 드라마를 극장용으로 재편집한 영화 작품을 통해 메이저 영화제인 대종상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마이너와 마이너가 만나서 일으키는 반전으로 이보다 더 짜릿한 것이 있을까.

소설이 드라마가 될 때
소설의 영상화는 영화 역사의 초기부터 초미의 관심사였지만, 문자로 된 소설을 영상화하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다. “그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보기 좋은 평균 신장이었다. 재영은 그런 상우가 자신의 눈을 맞추려면 고개를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또한 위에서 비스듬히 내려다본 그의 얼굴이 좋았다.”(원작 웹소설 중에서) 드라마 <시맨틱에러>의 김수정 감독은 추상우 배우가 오디션을 보러 왔을 때, 저수리 작가의 소설 속에서 묘사된 그 사람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아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밝혔다.

<시맨틱에러>는 소설 원작을 섬세하게 영상화한 화면들로 호평을 받았다. 사사건건 대치하는 관계처럼만 보였던 두 사람이 공공의 적(사회적으로 성공한 갑질하는 선배)에 대항해 연대하는 방향으로 선회하는 순간, 재영의 상처를 발견하고 신경이 쓰인 상우가 치료해주는 장면은, 수없이 많은 로맨스 영화에서 되풀이된 클리셰 중 클리셰지만 더할 나위 없이 새롭다.

특히 면봉으로 세심하게 연고를 펴 바르는 상우의 손짓과 “그래도 오늘은 고마웠어요. 싫은 건 싫은 거고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라는 덤덤하지만 상냥한 말, 그 말과 행동을 “추상우답네”라고 정의하는 재영의 대꾸는 적이 동지가 되는 순간의 역전만큼이나 흥미롭고 두근거린다.

반창고를 밀리지 않게 양손의 엄지와 검지로 먼저 붙이고 두 가운데 손가락을 살짝 비껴서 긋는 상우의 다정하면서도 낯가리는 몸짓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잡음으로써, 드라마는 이 순간의 긴장을 맥시멈까지 밀어붙인다. 이처럼 <시맨틱에러>에는 너무 많은 클리셰들 때문에 이제 더 이상은 로맨스 영화에 설레지 않는 드라마 덕후들조차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흘리는 장면들이 종종 등장한다.

사람과 사람이 애정을 나누는 것은 언제나 가슴 떨리는 일이지만, 모두의 관계가 언제나 환영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러브스토리에는 언제나 금기가 등장하고, 때로는 그 금기로 인해 더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때로는 거센 반대와 세찬 비난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래서 BL 드라마는 자주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됐다. 이성애적인 관점에서는 그 관계를 용인하기가 쉽지 않고, 퀴어 관점에서는 민감한 성정체성의 문제를 상품화하고, 소재주의적으로 소모하는 것처럼 읽혔기 때문이다.

마이너 장르의 한계와 상대적으로 웹드라마의 제작 환경 때문에 BL 드라마가 ‘내수용’이라는 딱지를 떼기가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시맨틱에러>는 우리 모두가 익히 아는 로맨스 드라마의 문법을 ‘보이스 러브(Boy’s Love)’라는 장르의 컨벤션을 49:51의 아슬아슬한 균형으로 섞는 데 성공하고 드라마 팬덤의 인정을 받음으로써 그 쉽지 않은 허들들을 통과한 것처럼 보인다.
희망이 된 웹 IP…가끔 마이너가 변화를 이끈다
대한민국 웹소설과 웹툰 IP의 희망
IP(Intellectual Property)는 대중문화의 새로운 화두다. 지식재산권이라는 전문적인 법률 용어로만 알고 있었던 이 개념은 사실 대부분 퍼블릭 도메인이기에 부가가치를 가지지 못하는 자국의 전통문화 요소를 산업적으로 활용하려는 중국 정부의 기획으로 인해 급부상했다. 단순한 스토리텔링이 아니라 문화적 가치를 갖는 모든 인적·물적 요소를 IP로 범주화하는 것은 대중문화 산업에서 매우 유용한 전략이다. 따라서 웹소설, 웹툰, 게임, 스타덤 등을 중심으로 한 IP화는 이제 글로벌한 트렌드로 자리 잡은 것처럼 보인다.

사실 IP와 관련된 미디어 믹스는 새삼스러운 현상은 아니다. 우리나라와 비교해 만화와 애니메이션, 게임을 중심으로 한 서브컬처 장르가 훨씬 앞서 활성화된 일본에서는 망가, 아니메, OVA, 오디오 드라마, 게임, 라이트 노벨, 아니뮤, 관련 캐릭터 상품에 이르는 미디어 믹스 체인이 20세기에 이미 완성됐다.

어느 정도 인지도를 얻은 망가와 아니메는 대부분 이처럼 완비된 제작 시스템에 따라 미디어 믹스가 순차적으로 진행되곤 했다. 2000년대 중반에 이미 웹소설 시장 규모가 출판 시장을 압도한 중국에서는 웹소설이 드라마나 영화로 각색되거나 게임, 만화, 무대극으로 전환되는 시스템이 일찍부터 정비됐고 2022년 현재 300여 편의 드라마 가운데 3분의 2에 이르는 수량이 웹소설 원작을 바탕으로 제작됐거나 예정 중이다. 더욱이 규모 면에서 압도적인 중국 시장에서는 순차적인 미디어 믹스뿐 아니라 캐릭터 및 완구 산업과 연관된 동시적인 트랜스미디어 콘텐츠 전략이 보편화돼 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에서 웹소설과 웹툰을 원작으로 한 미디어 믹스는 줄곧 유명 작가와 인기 작품을 중심으로 해서만 단속적으로 이루어졌다. 1990년대 말에 이미 <바람의 나라>, <리니지>와 같은 순정만화가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무대극이나 드라마에서는 시도 이상의 평가를 받지 못했다.

2000년대 초반에는 <늑대의 유혹>과 같은 인터넷 소설 각색 영화가 강동원이라는 불세출의 스타를 낳기는 했지만 그 이후 소설에서 영화로의 각색 시스템이 정착됐다고 보기 어렵다. 2022년에는 유난히 많은 웹소설 원작 드라마가 출현해 이른바 ‘회빙환(회귀·빙의·환생)’ 신드롬을 낳았지만, 그 역시 완비된 미디어 믹스 체인까지 도달하지는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시맨틱에러>의 성공은 더욱 주목할 만하다. 일반적으로 웹소설과 웹툰을 각색한 영상물은 원작 팬덤들의 강력한 저항을 받곤 한다. 텍스트와 2차원(2D) 이미지는 훨씬 더 자유로운 독자의 상상을 가능케 하는 반면, 드라마나 영화와 같은 실사 영상은 특정한 배우 이미지나 드라마트루기에 따른 고착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독자들 나름의 상상과 완성된 영상물의 결과 사이에는 불가피한 간극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이미 웹소설 원작이 오디오 드라마, 웹툰, 애니메이션으로 성공적인 미디어 믹스 전환을 이루었지만, 영상화의 과정에서 드라마 <시맨틱에러>도 마찬가지 위험을 안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이너 플랫폼이 제작한 이 마이너 드라마는 웹소설에서 영화에 이르는 모든 미디어 믹스에 성공하는 데 키잡이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또는 희망했지만 기대하기 어려운 곳에서, 때때로 믿기 힘든 기적은 일어난다. “완벽하게 짜인” 추상우의 일상에 “가슴 뛰는 에러” 장재영이 나타난 것처럼, 무척이나 사랑했던 어떤 만화의 한 구절이 예언했던 것처럼, “삶은 언제나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갖는다.”

문현선 문화연구자는…
중국 신화와 중국 대중문화를 전공했으며 현재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텍 전공 초빙교수로서 학부 및 대학원의 문화이론 및 콘텐츠 관련 강의를 맡고 있다. 중한 문학 번역자로서 왕원화, 모옌, 팡팡, 쑤퉁, 류전윈, 아라이, 디안, 좡좡, 이스쓰저우 등 작가의 작품을 번역했고, 인문연구모임 문이원에서 동양의 고전들을 번역하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에도 참여하고 있다. 이야기공작소 파수(破·守)의 스토리마스터이자 캐릭터 프로파일러로서 다양한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는 한편, 중국전문언론그룹 더찬란(TheCanLan)의 번역부 고문으로서 문턱이 낮은 인문학을 지향하며 다양한 강연과 토론의 장을 기획 중이다.

글 문현선 세종대 공연·영상·애니메이션대학원 초빙교수 | 사진 왓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