덫은 미끼의 유혹이며, 속임수를 쓴 함정이다. 덫을 놓아 범인을 잡고 진실을 밝힐 수 있다. 하지만 그 목적이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플레말레의 화가 로베르 캉팽의 메로드 제단화 오른쪽 패널, 1472년경,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플레말레의 화가 로베르 캉팽의 메로드 제단화 오른쪽 패널, 1472년경,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악마를 잡는 쥐덫
쥐덫은 말 그대로 쥐를 유인해 잡거나 죽이는 도구다. 중세의 상징에 따르면 쥐는 해로운 동물이므로 도덕과 종교에서 쥐덫은 악마를 물리치는 상징으로 흔히 사용됐다.
미술 작품 중에 쥐덫 모티브로 크게 주목받은 그림이 있다. 북유럽 르네상스 초기의 작품 <메로드 제단화>가 그것이다. 작가는 ‘플레말레의 화가’로 불리는데, 네덜란드의 로베르 캉팽(Robert Campin·1375~1444년경)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세 폭으로 구성된 이 제단화는 ‘수태고지’를 중심으로 왼쪽 패널에는 후원자가, 오른쪽 패널에는 목수 요셉이 그려져 있다. 문제의 쥐덫은 요셉의 작업장에서 발견된다. 요셉은 각종 연장을 늘어놓고 나무판에 구멍을 뚫고 있다. 작업대에 방금 완성한 듯 나무로 만든 쥐덫이 놓여 있다. 비슷한 물건이 뒤쪽 창가에도 하나 더 있다. 밖에서 잘 보이도록 창밖으로 내밀어 요셉의 작품을 광고하는 것 같다.
이 2가지 물건은 같은 종류일까. 논란이 있었지만, 대체로 둘 다 쥐덫이라고 본다. 미술사학자 마이어 샤피로는 이 그림에서 처음으로 쥐덫을 지적하고, 하느님이 마귀를 잡으려고 설치한 덫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교부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쥐덫에 비유한 예를 들었다. 십자가는 마귀를 잡기 위한 덫이고, 그 미끼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죽임을 당한 것은 사탄이 미끼를 물어 패배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요셉이 만드는 쥐덫은 곧 십자가라고 할 수 있다. 톱, 칼, 못, 망치 등 목공 도구는 예수의 수난과 직결된다.
덫의 상징적 의미는 바로 옆에 있는 중앙 패널의 ‘수태고지’에도 이어진다. 성모의 결혼이나 수태고지는 성육신, 즉 예수가 인간으로 태어남을 뜻하는데 이 또한 덫의 속임수라 할 수 있다. 예수의 신성을 인성에 가림으로써 마귀가 속아 넘어가게 했으니 말이다.
이 그림은 성경 속의 사건을 일상의 장면으로 세심히 묘사해 마치 현실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하지만 사물 하나하나가 그저 놓인 게 아니라 모두 종교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처럼 사실적으로 보이는 장면이나 사물 속에 상징적 의미를 숨겨놓는 것을 ‘위장된 상징주의’라고 한다. 북유럽의 르네상스 회화에서 흔히 보이는 중요한 특징이다.

겨울 풍경 속 새덫
100년 가까이 시간이 흐른 뒤 대(大)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hel the Elder· 1525/1530~1569년경)은 쥐덫 대신 새덫을 그림에 넣어 관심을 끌었다. 그동안 네덜란드는 신교로 개종하고 무역과 상업이 번창해 풍요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미술에서는 전통적 종교화보다 실제 자연을 소재로 한 풍경화나 현실 생활을 묘사한 장르화가 발달했다. 그런 그림에 흔히 상징적 의미가 담겼으니, ‘위장된 상징주의’가 종교화를 넘어 풍경화와 장르화에 널리 적용된 것이다. 브뤼헐은 두 장르를 결합해 종종 우의적인 의미를 전달했다. 그중 눈 내린 풍경 속에 일상생활을 묘사한 그림들은 독보적으로 겨울 풍경화의 모범이 됐다.
대(大) 피터르 브뤼헐의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과 새덫이 있는 겨울 풍경, 1565년, 벨기에 왕립미술관
대(大) 피터르 브뤼헐의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과 새덫이 있는 겨울 풍경, 1565년, 벨기에 왕립미술관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과 새덫이 있는 겨울 풍경>은 브뤼헐의 전형적인 겨울 풍경화 중 하나다. 이 그림은 16세기 중엽 유럽의 소빙기에 네덜란드의 유난히 추운 겨울을 묘사했다. 마을과 자연이 온통 흰 눈에 덮이고 마을을 관통하는 개천은 꽁꽁 얼어붙었다. 그림의 구성은 좌우로 비스듬히 양분되며 대조를 이룬다. 왼쪽은 빙판에서 사람들이 스케이트를 타며 놀이하는 장면이고, 오른쪽은 나무 덤불 사이에 놓인 새덫 주위로 작은 새들이 모여드는 장면이다. 왼쪽이 혹한을 오히려 즐기는 활기찬 삶을 보여준다면, 오른쪽은 식량이 부족해 새라도 잡아먹어야 하는 곤궁한 삶을 나타낸다.
겨울철 시골 마을의 현실을 그대로 표현한 듯하지만, 여기에는 인간 존재에 대한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다. 상징물은 오른쪽 중심을 차지하는 새덫이다. 새는 전통적으로 인간의 영혼을 가리키므로 새덫은 영혼을 포획하는 함정이다. 즉, 나약한 인간의 영혼을 낚아채려고 악마가 놓은 덫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미끼에 현혹된 새들처럼 악마의 유혹에 걸려들고 만다.
위험한 새덫의 의미는 왼쪽의 스케이팅 장면으로 확장된다. 미끄러운 얼음판처럼 삶은 불안하고 위태롭다. 그림 맨 앞에 얼음 구덩이가 덫처럼 입을 벌리고 있다.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희망은 배경 중앙에 서 있는 교회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마귀를 잡아줄 쥐덫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노리는 새덫이 놓여 있으니,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혹독한 겨울처럼 마귀는 삶 속에 항상 존재한다. 완전히 몰아낼 수 없다면 스스로 이겨내 영혼의 타락을 막아야 한다. 교회는 길을 찾는 사람에게 안내자가 돼줄 것이다.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는 덫
셰익스피어의 <햄릿>에는 ‘쥐덫’이라는 극중극이 나온다. 햄릿이 극을 상연하는 목적은 아버지인 선왕을 살해하고 왕위와 어머니를 차지한 숙부의 죄를 밝히려는 것이다. 숙부는 연극을 관람하다가 독살이라는 말이 나오자 도중에 나가 버린다. 햄릿은 범인을 확신하고 복수를 다짐한다. 그러나 즉시 행동하지 못하고 주저하다가 엉뚱한 사람을 오인해 살해하게 된다. 이 때문에 햄릿은 검술 시합을 하게 되며, 결국 주인공 모두가 죽음을 맞이한다.
‘쥐덫’은 햄릿이 범인을 잡으려 설치한 함정이었지만 햄릿 자신도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악한 사람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걸릴 수 있다. 인간 세계에서 완벽한 선과 악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착한 사람도 단 한 번의 실수나 우연히 악의 구렁텅이에 빠질 수 있다. 그만큼 인생은 단순하지 않고 여러 가지 사정과 변수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러니 선과 악의 판단 기준도 확고할 수가 없다. 햄릿의 쥐덫은 권선징악으로 유도하지 못하고 인간 세계의 불확실성을 확인시켜줄 뿐이다. <햄릿>이 불후의 명작으로 여전히 재해석되는 것은 덫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의 본질을 꿰뚫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글 박은영 서울하우스 편집장(미술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