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중앙은행 격인 Fed의 통화정책은 곧바로 각국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20년 이상 동안 ‘저물가·저금리’ 국면이 몸에 익었던 경제주체뿐만 아니라 주식 시장을 비롯한 금융 시장도 혼선을 치렀다. ‘대(大)’자가 붙을 만큼 격변과 혼선을 치른 1년이 지난 시점에서 ‘과연 인플레이션이 잡혔는가’ 하는 점이다.
올해 경제 실상이 반영되는 통계가 2월부터 속속 발표되기 시작하면서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의 인플레 지표는 여전히 목표치의 3배 이상 높다.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를 계기로 우려해 왔던 구성의 오류(fallacy of composition), 즉 거시적으로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리는 과정에서 미시적으로 디폴트가 발생하고 있다.
모든 경제정책 가운데 통화정책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통화정책은 의도했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생명인 ‘선제성(preemptive)’을 잘 지켜야 한다. 통화정책 목표가 다수일 때는 ‘틴버겐 정리(Tinbergen theorem)’에 따라 목적에 적합한 수단을 가져가야 한다. 정치적 포퓰리즘에서 벗어나 독립성을 지켜 중앙은행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지난 1년 동안 1980년대 초에 이어 두 번째로 강력한 금리 인상을 추진했음에도 의도했던 효과를 제대로 거두지 못한 데는 이 모든 전제조건을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플레 초기 진단 실패로 선제성을 잃었다. 공급 측 요인에 주로 기인한 인플레를 수요 측 대책인 금리 인상에 매달렸다. 바이든 정부의 정치적 압력에도 끊임없이 시달렸다.
코로나19발 통화정책의 후유증을 처리하기 위한 금리 인상은 한국은행이 가장 빨리 추진했다. 금리를 가장 많이 내리고 돈을 가장 많이 풀었던 미 Fed보다 7개월 앞서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첫 금리 인상 당시 성장률이 0.3%(2021년 3분기)로 워낙 낮아 경기, 금리, 물가 간 트릴레마 국면에 처할 것이라는 비판이 처음부터 제기됐다. 한은, 금리 인상 정책 효과 보았나
우리의 경우 통화정책 시차가 1년 내외인 점을 고려하면 시기적으로 2021년
8월 이후 추진해 온 금리 인상 효과를 평가해볼 수 있는 충분한 때가 됐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금리를 올릴 때 내걸었던 대부분 목표를 달성하는 데 미흡했다. 10년 만에 새로운 총재를 맞이하지만 뚜렷한 대안이 없는 일본은행(BOJ)처럼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Fed처럼 양대 목표를 설정하는 논쟁 속에 한은이 고집했던 물가 안정 목적부터 평가해보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대표적인 물가 지표인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지난해 5월 이후 7개월 연속 5% 이상 수준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은이 명시적으로 내걸고 있지 않지만 인플레 타기팅선은 2%다.
코로나19 사태 이후처럼 인플레가 공급 측 요인이 강할 때는 총수요 물가 관리 대책인 금리 인상은 적합한 수단이 아니다. 일부 금융통화위원이 주장했던 금리 인상을 통해 원화를 절상시켜 수입물가를 잡는 것은 비기축통화국인 우리에겐 한계가 있다. 오히려 수출 감소 등을 통해 실물경기를 더 어렵게 한다.
가계부채를 줄여 금융 안정성을 도모하겠다는 목적도 기대만큼 달성하지 못했다. 금리 인상 이후 가계부채 증가 속도는 줄어들었지만 절대 규모는 늘어났다. 질적으로도 MZ(밀레니얼+Z) 세대와 소상공인 등 취약계층을 비제도권으로 내몰아내 극단적 선택 등 사회병리 현상이 늘어났다. 지니 계수, 10분위 계수 등으로 본 계층 간 소득 불균형도 더 심화됐다.
우리처럼 가계부채가 위험 수위를 넘은 상황에서는 가계부채 대책은 경착륙보다 연착륙시키는 방향으로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 4대 은행의 허시만허핀달지수(HHI)가 1700 이상 나올 정도로 독과점이 심하고 어려울 때일수록 경제적 약자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담보 관행과 같은 구조적 취약점이 있는 여건에서는 더 그렇게 해야 한다. 위험 수위가 넘은 가계부채를 경착륙시키면 은행 임직원들은 성과급 잔치 속에 취약계층은 거리로 내몰린다.
외국인 자금 이탈을 방지하는 목적도 달성하지 못했다. 금리 인상 이후 한미 간 금리 역전과 외국인 자금의 유출입 간 관계도 ‘유의미’하게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처럼 외환위기 경험국은 무역수지, 외환 보유, 성장률 등과 같은 펀더멘털 요인이 외국인 자금 유출입을 결정하는 데 더 중요한 요인이다.
모든 정책은 양면성을 갖는다. 우리 내부 여건을 고려하지 않고 Fed를 따라간다는 인상을 주는 식의 통화정책을 추진해서 의도했던 효과를 내지 못하면 부작용이 크게 나타난다. 가장 크게 우려되는 것이 미국 SVB 파산 사태에서 재확인됐듯이 원화의 변동성이 커지는 점이다.
Fed가 금리를 인상한 지난 1년 동안 원화의 변동성은 하루 평균 0.53%에 달한다. 1300원을 기준으로 한다면 7원에 해당한다. 같은 기간 중 인도네이사 루피아화와 인도 루피화 변동성에 2배에 달할 뿐만 아니라 베트남 동화의 변동성보다 무려 5배에 달해 원화가 2류 통화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시각이 고개를 들고 있다.
평가 기간을 코로나19 사태로 길게 보면 2020년 3월 중순 1285원을 정점으로 2021년 1월 초 1082원까지 떨어졌다. 그 후 코로나19 백신 보급과 함께 갑작스럽게 상승세로 돌아선 이후 지난해 10월 초에는 1448원까지 급등하다가 일부에서 2000원까지 오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지난 2월 초에 1227원까지 급락했다. 지난 3년 동안 연평균으로 보면 200원이 넘는다.
코로나19, SVB 등과 같은 대외 여건이 불안정할 때마다 원화 가치가 크게 흔들린다는 것은 우리 경제가 그만큼 취약하다는 점을 반영한다. 한동안 잠잠했던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 논의가 재연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리디노미네이션이란 화폐 가치에 변화를 주지 않으면서 거래 단위를 낮추는 것을 의미한다. 달러당 네 자릿수대의 원화 환율을 두 자릿수대로 변경하는 것을 말한다.
특정국에서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할 경우 △거래 편의 제고 △회계기장 처리 간소화 △인플레 기대심리 차단 △대외 위상 제고 △부패와 위조지폐 방지 △지하경제 양성화 등의 장점이 있다. 하지만 △화폐 단위 변경에 따른 불안 △부동산 투기 심화 △화폐 주조 비용 증가 △각종 교환 비용 등 단점도 만만치 않다.
어수선할 때마다 리디노미네이션 논의가 재연되는 것은 우리 경제 위상에 맞지 않는 원화 거래 단위로 충격을 더 받는다는 이유에서다. 하드웨어 면에서 우리는 선진국으로 분류된다. 무역액, 시가총액, 외환보유액은 모두 세계 8위, 1인당 소득(GDP)은 12위다. 30K-50M(1인당 소득 3만 달러·인구 5000만 명) 클럽에도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가입했다.
하지만 부정부패, 지하경제 규모 등으로 평가되는 소프트웨어 면에서는 신흥국으로 분류된다. 독일의 국제투명성기구(TI)가 발표하는 한국의 부패인식지수(CPI)를 보면 경제 발전 단계에 비해 가장 높은 단골 순위가 좀처럼 개선되지 않아 하드웨어 위상에 비해 여전히 부패가 심한 국가로 평가되고 있다.
우리와 같이 선진국과 신흥국에 중간자 위치에 있는 국가는 대전환기에는 쏠림현상이 심하게 나타난다. 좋을 때는 선진국 대우를 받아 외국 자금이 대거 유입되다가 나쁠 때는 신흥국으로 전락해 외국 자금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면서 어려움이 닥친다. ‘경기 순응성’과 ‘원·달러 환율 등 금융 변수 변동성’이 심해진다는 의미다.
앞으로 원화의 변동성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미국 여건부터 살펴보면 지난해 말에 비해 달러 강세 요인이 더 강해졌다. 펀더멘털 면에서 미국 경제는 ‘노 랜딩’에 진입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견실하다. 통화정책 면에서 인플레 우려가 재차 불거지면서 방향 전환, 즉 피봇(pivot)에 대한 기대가 약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비기축통화국, 금리 차보다 펀더멘털
달러인덱스 구성 비중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유럽 경제는 겨울철 이상고온으로 천연가스 가격이 폭락하면서 회복세가 뚜렷하다. 올해 첫 회의에서 Fed는 기준금리를 0.25%포인트로 한 단계 올린 대신 유럽중앙은행(ECB)은 0.5%포인트로 두 단계 인상해 금리 차가 축소됐다.
대외적인 면에서 달러 강세와 약세 요인이 혼재돼 있어 원화 가치의 변동성은 더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경상수지 균형 모델, 환율 구조 모형 등으로 추정된 원·달러 환율의 적정선은 1230원 내외 수준이다. 외국인 자금 유출입 입장에서 적정선 이상이면 환차익을 기대하나 그 이하이면 환차손을 우려한다.
비기축통화국의 외국인 자금 유출입을 결정하는 주요인은 금리 차보다 펀더멘털 개선 여부다. 성장률, 인플레이션율, 실업률, 경상수지 등 거시경제 4대 변수 중에서는 성장률과 경상수지를 중시한다. 외환위기를 경험했던 낙인(stigma) 국가는 외환보유액이 최광의 개념의 캡티윤 모델로 추정한 적정 수준 이상 확보됐는지도 주목한다. 우리 경제는 지난해 4분기 성장률이 -0.4%로 역성장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여전히 인플레 타기팅선보다 2배 이상 높은 수준이다. 외국인이 비기축통화국에 투자할 때 가장 경계하는 스태그플래이션 초기 국면이다. 외환위기 경험국에 투자할 때 가장 주목해서 보는 무역적자도 올 들어 지난 3월 10일까지 228억 달러에 달한다.
일부에서 외국인 자금 이탈과 원·달러 환율의 상승세를 방지하기 위해서 2월 금융통화회의에서 금리를 올렸어야 한다는 비판은 지극히 위험한 발상이다. 미국 경제의 경우 펀더멘털이 받쳐줘 금리를 올리면 인플레를 안정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외국인 자금 이탈과 원·달러 환율의 상승세를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 경제처럼 펀더멘털이 안 좋은 여건에서 인플레와 외국인 자금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금리를 올리면 ‘금리 인상→펀더멘털 악화→외국인 자금 이탈→원·달러 환율 상승’ 간 악순환 고리가 형성될 확률이 높다. 우리는 비기축통화국이자 외환위기를 경험한 낙인 국가다.
지금처럼 4대 거시경제 목표 간 상충 관계가 뚜렷한 상황에서는 인플레보다 성장률과 경상수지에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이 발표한 경제 전망을 토대로 우리의 투자 매력도를 잃지 않기 위한 올해 성장률 최저선은 2%다. 한은과 정부가 예상하는 1%대로는 안 된다. 올해 무역적자가 불가피하더라도 경상수지 흑자세는 유지해야 한다.
더 이상 우리 내부 여건을 고려하지 않고 Fed를 따라간다는 인상을 주는 식의 통화정책을 추진해서는 곤란하다. 한은처럼 통화정책 추진 여건이 어려울수록 더 그렇게 해야 한다. 현시점에서 ‘물가 안정’과 ‘경기 부양’만을 놓고 따진다면 우리의 경우 후자에 무게를 둬서 통화정책을 추진해야 할 때다. SVB 사태 후폭풍을 잡기 위해서도 금리를 올리면 안 된다.
인플레 문제도 그렇다. 지금처럼 ‘반드시 잡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관리 가능하면 같이 가야 한다’는 유연한 사고를 갖을 필요가 있다. 최근 들어 Fed가 기준금리 변경, 공개시장 조작과 같은 전통적인 통화정책 수단보다 인플레 타기딩선 상향 조정, 수익률 곡선 통제(YCC) 등 제3의 통화정책 수단을 검토하기 시작한 점을 참조해야 한다.
글 한상춘 한경미디어 국제금융 대기자 겸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사진 한국경제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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