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도체 등 컴퓨팅과 바이오, 청정에너지 분야에서 리더십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인 국가 안보 사항이다. 미국은 그동안 기술 분야에서 중국에 한두 세대 앞서가는 정책을 유지해 왔지만, 앞으로는 최대한의 기술 격차를 유지하기 위해 중국의 기술 개발 역량을 봉쇄하겠다.”
이는 제이크 설리번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이 지난해 9월 16일 에릭 슈미트 전 구글 최고경영자(CEO)가 이끄는 특별 경쟁 연구 프로젝트(Special Competitive Studies Project·SCSP) 주최로 열린 ‘글로벌 첨단 기술 서미트’에서 밝힌 기조연설 내용 중 일부다.
미국의 이런 목표 설정을 ‘설리번 테크 독트린’이라고 부른다. 설리번 보좌관은 미국 ‘반도체법’,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대통령 행정명령 등으로 각종 제재 조치를 내려 중국에 대한 핵심 첨단 기술을 전 방위로 봉쇄하겠다고 강조했다.
‘설리번 테크 독트린’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미국 상무부가 10월 7일 중국의 반도체 산업을 고사시키기 위한 초강력 수출 통제 조치를 내린 것을 들 수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중국의 인공지능(AI), 슈퍼컴퓨터 개발 등에 활용되는 고성능 반도체뿐만 아니라 D램, 낸드플래시(낸드)처럼 중국이 수출 경쟁력을 키워 온 메모리 분야에서도 첨단 제조 장비 판매를 사실상 금지하는 것이다.
미국 기업이 △18나노미터(㎚) 이하 D램 △128단 이상 낸드 △핀펫(FinFET) 기술 등을 사용한 14㎚ 이하의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장비와 기술을 중국에 판매할 경우 허가를 받도록 했다. 또 연산능력 100페타플롭스(PFLOPS: 초당 1000조 번의 연산 처리가 가능한 컴퓨터 성능 단위) 이상의 슈퍼컴퓨터에 최종 사용되는 모든 제품 등을 수출하려면 미국 정부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특히 미국 상무부는 이런 조치들에 ‘해외직접생산규칙(FDPR)’을 적용했다. 미국이 아닌 제3국 기업이 만든 반도체라도 미국의 기술과 장비를 쓸 경우 중국으로 수출을 금지하는 조치를 말한다.
설리번 보좌관은 4월 27일 미국 싱크탱크인 브루킹스 연구소에서 ‘미국 경제 리더십의 혁신’이란 주제로 강연을 통해 “미국의 첨단 기술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워싱턴 컨센서스(New Washington Consensus)’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설리번 보좌관은 “중국은 철강 등 전통적 산업 분야는 물론이고 바이오 등 미래 핵심 산업에도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으며, 제조업뿐 아니라 미래 핵심 기술에서 미국의 경쟁력은 약화하고 있다”면서 “미국이 첨단 기술 분야에서 기술 격차의 우위를 유지하려면 중국에 대한 첨단 기술 봉쇄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워싱턴 컨센서스는 1989년 존 윌리엄슨 미국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 연구원이 만들어낸 개념으로, 중국과 중남미 등 개발도상국들에 대해 △국영기업의 민영화 △정부 개입 축소 △자유무역 △정부의 긴축 재정 △규제 완화 △외환 시장 개방 등을 요구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통칭한다. 당시 중국은 이런 요구 조건들을 수용하겠다면서 미국으로부터 그토록 원하던 항구적 정상교역관계(PNTR) 지위를 얻었고,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에 성공했다. 미국은 중국 경제가 워싱턴 컨센서스에 따라 자유 시장 경제에 편입될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미국의 이런 기대는 물거품이 됐다. WTO 가입 당시 미국의 13%에 불과했던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현재 미국의 75%에 달하고 있다. 중국은 워싱턴 컨센서스가 아닌 국가 주도의 사회주의 시장 경제 체제에서 급속도로 성장했다.
설리번 보좌관은 “미국 국내 제조업에 큰 타격을 준 이른바 ‘중국 충격’의 영향을 적절하게 예측하거나 이에 대응하지 못했다”면서 신(新)워싱턴 컨센서스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설리번 보좌관은 미국은 △산업의 공동화 △지정학적 안보 경쟁 △기후위기와 에너지 전환의 긴급한 필요 △불평등과 민주주의의 위기 등 새로운 도전들에 직면했다면서 5가지의 목표를 제시했다.
그 내용을 보면 첫째, 미국 경제 번영을 위한 첨단 산업 정책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다. ‘반도체법’, IRA 등을 통해 자원과 자본을 재분배하고, 미국 산업 경쟁력을 다시 끌어올리겠다는 것이다.
둘째, 동맹 및 파트너 국가와의 협력이다. 미국과 같은 생각을 가진 동맹·파트너들과 첨단 기술 산업 인프라 및 공급망을 함께 구축하는 것이다.
셋째, 협력의 범위 확장이다. 전통적인 관세 철폐나 시장 개방 따위가 아닌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맞는 국제 경제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것이다. 설리번 보좌관은 대표적인 사례로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미주경제번영파트너십(APEP), 미국·유럽연합 무역 및 기술위원회(TTC), 한·미·일 3자 협력 등을 들었다. 이런 파트너십은 모두 특정 목적을 지닌 ‘소다자 협력체’다. 이는 자유무역협정(FTA) 체제와는 달리 말 그대로 새로운 파트너십이다.
넷째,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대응해 ‘글로벌인프라파트너십(PGII)’을 구축하는 것이다.
다섯째, ‘작은 마당과 높은 울타리’을 만드는 것이다, 핵심 첨단 기술을 지키기 위한 수출 통제 등의 조치를 뜻한다. 사미라 파질리 전 미국 국가경제위원회(NEC) 부의장은 “미국 경제는 그동안 자유 시장 체제로 취약해졌으며, 국가 안보를 약화시켰다”면서 “신워싱턴 컨센서스 전략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 목표는 첨단 기술의 국제 룰 세팅 주도
미국 정부는 설리번 보좌관의 테크 독트린과 신워싱턴 컨센서스 전략에 따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강력한 정책들을 추진하고 나섰다. 미국 정부가 배터리, 인공지능(AI) 등 첨단 기술 분야에 대한 국가 표준 전략을 제시한 것도 이런 전략의 일환이다. 실제로 미국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5월 4일 ‘핵심과 신흥 기술(Critical and Emerging Technology·CET)에 대한 미국 정부의 국가 표준 전략’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공개했다.
미국 정부는 경쟁력과 국가 안보에 필수적인 핵심과 신흥 기술(CET)의 대상으로 △커뮤니케이션(통신)과 네트워킹 △컴퓨터와 메모리, 스토리지 기술을 포함한 반도체와 마이크로 일렉트로닉스 △AI와 머신러닝 △생명공학 △포지셔닝, 내비게이션과 타이밍 서비스 △디지털 신원 인프라와 분산원장기술 △청정에너지 생성과 저장 △양자 정보 △바이오 뱅킹 △무인 자동화 운송 시스템 △광물 공급망 △사이버 보안과 개인정보 보호 △탄소 포집 및 제거, 활용, 저장(CCUS) 등을 꼽았다.
미국 정부는 또 국가 표준 전략의 4대 목표로 △CET 연구·개발(R&D) 투자 확대로 표준 개발 지원 △국가 안보에 핵심적인 기술 분야 등에서 민간의 참여 확대 △표준 개발 인력 확충 △동맹·파트너 국가들과의 통합성 강화 등을 제시했다.
미국 정부는 이를 위해 △표준 개발을 위한 R&D 자금 지원 증대 △민간 부문의 참여를 방해하는 장벽 제거 △국제 표준 거버넌스와 리더십에서 미국과 같은 생각을 가진 국가의 대표성과 영향력 강화 △새로운 표준 인력 교육과 역량 강화 △강력한 표준 거버넌스 절차를 지원하기 위해 동맹 및 파트너와의 표준 협력 심화 △표준 개발에 있어 광범위한 대표성 촉진 등 8가지 추진 방안도 밝혔다.
미국 정부가 국가 표준 전략을 추진하는 의도는 핵심 첨단 기술 분야의 표준을 선점하려는 중국을 겨냥한 조치라고 볼 수 있다. 미국 정부의 한 고위 관리는 “우리의 전략적 경쟁자들은 핵심 첨단 기술 분야 표준 개발에 공을 들이고 있으며, 이는 우리 경제 및 국가 안보에 치명적”이라며 “우리는 핵심 첨단 기술 분야에서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국가 표준 전략을 추진하게 됐다”고 밝혔다.
미국의 목표는 중국과의 기술패권 경쟁이 심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동안 민간 영역이 주도하던 표준 개발에 정부가 개입, 핵심 첨단 기술 분야의 국제적인 룰 세팅을 주도하겠다는 것이다. 이 고위 관리는 “이번 보고서는 최초의 국가 표준 전략”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특히 이 보고서는 “미국은 같은 생각을 가진 파트너들과 함께 수십 년간 유지해 온 국제 표준 설정의 핵심 원칙에 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며 중국에 대한 견제 목적이 있음을 분명하게 밝혔다.

미국 의회도 중국에 대한 첨단 기술 수출을 막기 위한 각종 법률을 제정할 계획이다. 상원의 경우 집권 여당인 민주당은 반도체 수출 규제 강화를 비롯한 새로운 중국 제재 법안인 ‘중국 경쟁 법안 2.0’을 제정하겠다고 밝혔다.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는 5월 3일 상원의 상임위원장 14명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고 “‘반도체법’을 모델로 국가 안보를 지속적으로 강화하고 전 세계에서 중국의 역할에 대항하고 경쟁해야 한다”며 “새롭고 중대한 초당적 법률을 제정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슈머 원내대표는 “중국에 첨단 기술이 흘러가는 것을 제한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라며 “첨단 반도체 장비의 중국 반입을 제한한 바이든 정부의 수출 규제 같은 조치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슈머 대표는 중국 견제를 위해 포괄적인 패키지 법안을 제정하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민주당이 준비하고 있는 ‘중국 경쟁 법안 2.0’에는 중국에 대한 첨단 기술 수출 규제와 함께 중국에 대한 투자 제한, 중국의 경제 영토 확장 사업인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대응한 미국 주도의 신흥국 원조 프로그램 등이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상원 공화당 의원들도 대부분 이 법안 제정에 찬성한다는 입장이다.
하원에서도 미국 기업이 첨단 기술 분야에서 중국, 러시아 등 적대국에 투자할 경우 정부의 승인을 받도록 하는 법안이 발의됐다. 민주당 소속 빌 패스크렐 위원과 로사 디라우로 의원 및 공화당 소속 브라이언 피츠패트릭 의원은 5월 9일 ‘국가핵심역량보호법(National Critical Capabilities Defense Act)’을 발의했다. 이 법안은 미국의 핵심 공급망이 중국과 러시아 등 적대국으로 이전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해외 투자에 대한 범정부 심사 프로세스를 만들도록 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법안에는 특정 산업 분야에서 민간 기업의 중국 투자 심사를 위해 국가핵심역량위원회(National Critical Capabilities Committee·NCCC)를 신규 설립하고, 투자 거부 권한을 부여하는 방안이 담겼다.
NCCC는 백악관 주도로 상무부와 재무부, 국토안보부, 국방부, 에너지부, 노동부, 보건복지부, 무역대표부, 국가정보국 등 범정부 부처가 참여한다. 미국 기업이나 개인이 중국과 러시아, 이란, 북한 등 우려국의 핵심 산업에 투자할 경우 90일 전에 서면으로 NCCC에 보고해야 한다.
NCCC는 해외 투자가 국가 안보에 위험을 초래한다고 판단하면 대통령에게 투자를 막거나 위협을 완화할 조치를 권고할 수 있다. 또 공급망이 해외로 이전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미국 내 R&D 투자와 공장 가동률 확대를 지원하는 조치를 권고할 수 있다. NCCC는 심사 과정에서 해외 투자가 미국의 장기 경제, 안보 이해와 위기 대응에 미칠 영향, 투자 대상국이 시장을 왜곡하거나 약탈적인 무역을 한 관행이 있는지, 투자에 참여하는 기업들의 지분 구조, 미국 내 산업 영향 등을 기준으로 평가한다.
핵심 산업은 반도체, AI, 양자컴퓨터, 대용량 배터리, 핵심 광물과 소재, 원료의약품(API), 자동차 제조 등이 포함된다. 패스크렐 의원은 “이 초당적 법안은 공급망에 대한 투자와 우리의 적들에게 이전되는 중요 산업에 대한 검토를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조치”라고 강조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미국 정부는 물론 의회까지 중국의 핵심 첨단 기술 개발과 확보를 저지하기 위해 총력전에 나서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글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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