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전세 시장, 쓰나미 올까 주택 시장의 불안으로 역전세와 깡통전세 등이 속출하며, 150년여간 이어 온 전세제도가 존폐의 위기에 내몰렸다. 과연 전세제도는 그 수명을 다한 것일까. 국내 전세 시장의 리스크 점검을 통해 위기를 극복할 묘책을 찾아봤다.
#자영업을 하는 A씨는 지난 3월 서대문구 북아현동 소재 낡은 아파트에서 은평구 녹번동에 위치한 신축 브랜드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조건이 나은 곳으로 이사를 하면서도 전세금은 5억 원에서 4억3000만 원으로 줄어 7000만 원의 여유자금이 생겼다. 그는 이사 전 임대인과 적잖은 갈등을 겪었다. 지난 2022년 하반기 이후 5억 원을 호가하던 전세 시세가 1억 원가량 떨어져 계약 기간 종료 시점인 올해 2월 집 주인이 돈을 돌려줄 능력이 없다며 막무가내로 버텼기 때문이다.
임대인은 전세 차액에 대한 이자를 주겠다며 A씨를 설득했으나 시세보다 턱없이 높은 낡은 아파트가 부담스러웠던 그는 내용증명을 보내고 나서야 전세금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자금 부담을 이기지 못한 집주인은 결국 아파트를 급매에 내놨다.
‘전세’는 영어로도 ‘Jeon se’로 표기될 만큼 고유명사 같은 단어다. 보증금을 맡기고 남의 집에 임차한 뒤 계약 기간이 끝나면 보증금을 돌려받는 주택임대차 유형으로 대한민국에만 있는 독특한 제도다.
고려 시대부터 전세제도와 비슷한 주거 형태가 존재했다는 설도 있지만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세제도의 기원은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부산, 인천, 원산 등 3개 항구 개항과 일본인 거류지 조성, 농촌인구의 이동 등으로 서울의 인구가 급격히 늘면서 주택임대차 관계가 형성됐다.
150년 가까이 이어 온 전세제도가 존폐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갭투자 사기에 따른 시장 신뢰도 추락, 고금리로 인한 전세자금대출의 매력 하락, 임대인의 월세 선호 현상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빌라, 거래절벽 속 전세 사기 피해액은 상승
최근 전세 사기 피해가 늘면서 빌라는 거래절벽 시대를 맞았다. 빌라 거래는 전체 거래 물량의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한국부동산원 통계에 따르면 올해 2월 빌라 거래량은 7021건으로 집계돼 전체 주택 거래량(7만7490건) 중 9.1%를 차지했다. 통계 집계를 시작한 이래 월별 기준으로 가장 적은 비중을 기록했다.
실제로 빌라 거래 비중은 가파르게 떨어지고 있다. 2022년 9월 19.1%를 차지한 빌라 거래 비중은 올해 들어 12%대로 추락했고 급기야 반토막이 났다.
서울의 빌라 평균 매매 가격 역시 3억4387만 원으로 아파트 평균인 10억3261만 원의 30% 수준에 그쳤다. 자금 부담으로 아파트 거주가 힘들었던 수도권 시민들에게 유용한 주거를 제공했던 빌라가 시한폭탄으로 전락해 버린 것.
건당 전세 사기 피해액은 치솟고 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정우택 의원실과 경찰청에 따르면 전세 사기 건수는 줄어들었지만 피해 액수는 오히려 늘어난 추세다.
지난 2019년 전세 사기 피해자 674명 중 594명(88.1%)이 5000만 원 이하의 피해를 입었고 5000만 원에서 1억 원 구간은 52명(7.7%), 1억 원 초과 피해자는 20명(2.8%) 수준이었다.
하지만 2년이 지난 2021년에는 피해자 전체 424명 중 5000만 원 이하 피해자가 181명(42.6%)으로 절반에 못 미쳤다. 5000만 원에서 1억 원 구간은 167명(39.3%)이었고, 1억 원에서 2억 원 사이는 58명(13.6%)이었다. 특히 3억 원 이상 피해를 본 사람도 10명(2.3%)으로 피해액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에 대해 업계에서는 갭투자 사기와 더불어 집값 하락과 신뢰 추락에 따른 전세 임차인 품귀현상을 주요 요인으로 보고 있다.
전세 사기 피해가 늘어난 만큼 전세자금을 보전하기 위해 가입하는 보증보험 사고도 급증하고 있다. 2022년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전세보증 실적은 약 54조4510억 원으로 전년 대비 5.6% 증가했다.
이 중 전세금 반환보증 사고 금액은 2022년 기준 약 1조1731억 원으로 전년인 2021년 대비 2배나 상승했다. 이에 따라 HUG가 집주인 대신 임차인에게 보증금을 변제해준 규모는 지난해 9241억 원으로 크게 증가했으나 회수율은 23.6%에 그쳤다. 정부, 전세제도 메스 댈까...전세제도 한계 제기
잇따른 서민 피해에 정부도 칼을 빼 들었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전세제도가 우리 사회에서 해 온 역할이 있지만 이제는 수명을 다한 게 아닌가 보고 있다”고 전세제도 손질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정부 차원에서 전세제도 개선 논의가 이어지고 있지만 당장 전세금을 돌려받아야 할 임차인들에게는 사후약방문이 될 수 있다.
전세 계약 기간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주인의 채무 문제로 인해 전셋집이 경매 절차에 들어가게 된다면 세입자의 상황은 더욱 어려워진다.
엄정숙 부동산 전문 변호사는 “세입자가 돌려받을 전세금에 영향을 미치는 부동산 경매 절차가 진행되는 경우라면, 계약 기간이 남아 있어도 세입자가 집주인을 상대로 전세금 반환 요구와 소송을 할 수 있다”며 “세입자가 내용증명, 전화, 문자메시지, 카카오톡 등 연락 수단을 통해 부동산 경매를 사유로 임대차 계약 해지를 요청하겠다는 의사를 집주인에게 통보한 뒤, 집주인이 이를 확인하면 해지 효력이 발생한다”고 말했다. 전세 가격 약세, 언제까지 이어질까
전세 사기 사태 이후 수도권 연립·다세대 주택의 평균 전셋값이 2년 전보다 낮아진 것으로 조사됐다. 실제로 부동산 플랫폼 직방이 국토부 실거래가 공개 시스템을 토대로 수도권 연립·다세대 거래를 분석한 결과, 전용면적 3.3㎡당 평균 전셋값은 2년 전 동일 시점 평균 전셋값과 비교했을 때 가격 차가 점점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함영진 직방 빅데이터 랩장은 “전세 가격 하락과 함께 상대적으로 낮아진 금리 등으로 인해 전세보증금 마련을 위한 금융 부담이 줄어들었기 때문으로 보인다”며 “임차인은 소모성 비용이 있는 월세 거래보다는 전세 거래를 더 선호하기도 하지만 전세 사기 및 역전세로 인해 전세 거래의 우려가 큰 상황에 더해 올해 수도권 아파트 입주 물량도 적지 않아 연립다세대 전세 가격 약세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인만 부동산 경제연구소장은 “지난 2022년 전세 가격이 하락하면서 매매 가격까지 내리는 결과가 나왔는데 2023년은 전체적으로는 하락 폭이 축소하면서 전세 가격 역시 소폭 회복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며 “하지만 아파트와 빌라 및 오피스텔을 구분하면 아파트 전세는 회복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되지만 빌라와 오피스텔 전세 시장은 2023년에도 계속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이어 “2021년 말까지 전세난으로 인해 전세 가격 왜곡이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현재 추세가 올해 말까지는 갈 것으로 보인다”며 “입주 물량 영향도 내년 상반기까지 이어질 수 있어 내년 하반기 정도 되면 어느 정도 안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태윤 법무사가 전하는 전세 계약 체크 리스트 6가지
전세금은 최소 억 대의 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서민들에게는 그야말로 ‘피 같은 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전세 세입자들은 가장 기본이 되는 서류만 확인하는 데 그칠 뿐이다. 임차인들은 눈앞에서 전세금을 날리는 만일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꼼꼼한 확인이 필수다. 입주 전후 자신의 전세보증금을 지키기 위해 세입자들이 꼭 체크해야 할 리스트를 살펴보자.
1. 전세자금대출을 통한 계약 시 계약금 반환: 임차인의 전세자금대출 실행을 전제로 하며, 임대인 또는 임차 목적물의 문제로 인한 전세자금대출 미승인 시 계약은 무효다. 임대인은 계약금을 즉시 반환해야 한다.
- 사회초년생, 신혼부부들은 전세집을 구할 때 대부분 전세대출을 마련해 준비한다. 하지만 임차인의 귀책이 아니라 임대인, 임차물건의 사유로 인해서 대출승인이 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만약 이런 특약을 넣지 않은 상태에서 대출이 승인되지 않았다면 계약금을 그대로 날리는 상황이 발생한다. 따라서 미리 임대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계약을 진행하면 이런 상황을 예방할 수 있다.
2. 전세보증보험 가입 미승인 시 계약금 반환: 임대인은 임차인의 보증보험 가입을 위해 필요한 절차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 임대인 또는 임차 목적물의 문제로 인한 보증보험 가입 미승인 시 계약은 무효로 한다. 또한 임대인은 계약금, 중도금, 잔금 등 지급한 금원 전액을 즉시 반환한다. 다만 (무한정 기간을 주기에는 임대인에게도 불리하므로) 잔금 지급 후 1~2개월 내에 가입할 것을 조건으로 한다.
- 주택임대차에 있어서 전세보증보험 가입은 필수가 됐다. 이 부분이 제일 중요하다. 임대인이나 임차 목적물의 문제로 인해 보증보험 가입을 못하게 된다면 임차인 입장에서는 나중에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은 강력하게 임대인에게 어필을 해야 한다.
3. 담보권 등 새 권리 발생: 임대인은 잔금지급일 익일까지 담보권이나 전세권 등 새로운 권리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 주택임대차의 대항력은 인도와 전입 신고 다음 날에 효력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 효력이 발생하기 전에 담보권이나 전세권 등 위험을 가져올 수 있는 권리가 들어오면 안 된다. 실제로 전입신고 당일에 소유자가 변동되고 근저당도 같은 날 설정돼 갑자기 임차인이 후순위가 돼 피해를 본 사례가 다수 있기 때문이다.
4. 소유권 이전 등기: 임대인은 잔금 지급일 또는 보증보험 가입 예정일 당일까지 소유권 이전 등기를 신청하지 않는다.
- 임대인이 제3자에게 소유권이전등기를 하게 되면 '주택임대차보호법'상 당연히 그 제3자가 임대인의 지위를 승계한다.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볼 수 있는데 실제 업무에 있어서 갑자기 소유자가 바뀌면 보증보험 심사에 시간이 더 소요 될 수 있다.
5. 세금 체납 내역 확인: 임대인은 국세나 지방세, 근저당권의 이자 체납이 없음을 고지하며 임차인이 세금 체납 내역을 확인해보는 것에 적극 협조한다. 만일 세금 체납이 확인되는 경우 잔금일 이전까지 체납액 전액을 상환하며. 이를 어길 시에는 계약은 무효로 하고 지급한 계약금은 즉시 반환한다.
- 임대인에게 체납세금이 있다면 임차물건이 경매에 들어갔을 때 임차보증금에 우선하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이때 임차보증금에 손해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 보통 체납세금은 등기부에 반영이 늦게 되기 때문에 이런 특약이 필요하다.
올해 4월부터 임차보증금이 1000만 원 초과하는 주택이나 상가인 경우 임차인이 임대인의 세금 내역을 열람할 수 있다. 임대차 계약 전이라면 임대인의 동의를 받아야 하고 계약 직후라면 임대인의 동의 없이도 가능하다. 따라서 계약서에 위와 같은 특약을 기재하고 난 뒤 바로 세금 내역을 열람한다면 좀 더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
6. 매매 계약 체결 시 고지의무: 임대인은 계약 기간 중 매매계약 체결 시 임차인에게 이를 고지할 의무가 있다.
- 임대인이 제3자와 매매 계약을 체결하고 소유권을 넘긴다면 제3자는 임대인의 지위를 자동 승계한다. 그런데 전세 사기에 유형 중 하나가 아무런 자산도 없는 유령 법인에 소유권을 넘기고 경매에 들어가게 해서 보증금을 손해 보는 사례가 있다. 따라서 이런 사항을 미리 알게 된다면 즉각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임차인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임대인 지위를 자동 승계하는 것을 거부하고 임대차 계약을 해지함과 동시에 기존 임대인에게 임차보증금을 바로 반환할 것을 요구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반영해 HUG에서는 안심 전세 애플리케이션을 출시했다. 나의 전셋집을 등록한다면 등기부상 변동(집주인 변경·근저당권설정 등)이 있을 시 알림을 받을 수 있다.
글 정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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