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은행, CLUB1 PB센터서 박미나 개인展 ‘이미지생성형 인간지능 미나’ 개최
하루의 시간이 두 배는 빠르게 흐르는 것만 같은 강남구 삼성동. 빽빽한 빌딩 숲에서 유독 눈에 띄는 건물이 하나 보인다. 우아한 상아색 피부에 알록달록 알사탕이 촘촘히 박혀있는 하나은행 CLUB1 PB센터. 2016년 전형적인 은행 건물을 대대적으로 개축해 '문어 빨판'이라는 귀여운 별명을 가진 곳이다. 마치 애니메이션 <네모바지 스폰지밥>에 나올 법한 건물 안으로 쏙 들어가면 곡선형 미감이 조화로운 로비가 나오는데, 이 로비 오른편 지하층으로 이어지는 브리지 공간이 방문객의 눈을 한눈에 사로잡는다.

하나은행은 삼성동 별관을 리모델링 하면서 외관뿐 아니라 알맹이까지 모두 혁신하는 시도를 감행했다. 그 제일의 비전은 바로 '금융과 컬처의 랑데부'다. 자금 업무만 처리하는 전통적인 기관에서 벗어나 은행을 고객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하는 신개념 복합 문화 센터로 개혁했다. 지금 하나은행 CLUB1 PB센터 은행, 도서관, 레스토랑, 카페 등을 결합한 이색적인 공간으로 강남권의 뉴 랜드마크가 되었다.

하나은행의 새로운 도전 중에서도 특히 눈여겨봐야 할 프로젝트는 바로 '아트뱅크(Art Bank)'다. 최근 열리고 있는 핫한 전시 소식을 발 빠르게 전하고, 미술계 거장의 회고전 또는 유망 청년 작가의 그룹전을 개최하며, 수준 높은 아트 컬렉션의 로드맵을 제시하는 '하나 프라이빗 아트페어(Hana Private Art Fair)'까지 다채롭게 기획하고 있다.

사실 은행의 미술 후원은 해외에서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매년 가을 한국의 아트씬을 뜨겁게 달구는 글로벌 아트페어 프리즈(Frieze) 역시 도이치뱅크라는 든든한 후원사를 등에 업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 은행을 포함한 기업의 예술 메세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지는 않다. 그마저도 고미술품이나 아트페어에서 유행하는 일부 작가의 작품 소장에 그칠 뿐이다.

이렇게 빈약한 토양에서 하나은행은 메세나의 모범적인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유명 대가부터 한국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거목, 현대미술의 라이징 스타까지 모두 포용하며 은행 고객에게 동시대 문화예술을 알리는 든든한 메신저 역할을 맡는다. CLUB1 PB센터 지하 1층에 자리한 갤러리가 바로 하나은행 아트뱅크의 주요 거점이다.
19988888, 캔버스에 아크릴릭, 158×158cm, 2009
19988888, 캔버스에 아크릴릭, 158×158cm, 2009
컴퓨터 언어에서 색칠 공부까지
지난 3월 7일(목)부터 CLUB1 PB센터에서 박미나 작가의 개인展 '이미지생성형 인간지능 미나'가 열리고 있다. 박미나 작가는 한국의 대표적인 중견 화가로 회화를 이루는 기본 요소인 선과 색을 활용해 오늘날 회화의 의미를 찾아내는 작업을 꾸준히 이어왔다. 그의 작업은 '재료'를 수집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하나의 사물에 빠지면 그와 연관된 색, 이미지, 도구를 집요하게 모으고 이를 작업으로 변환한다. 그래서 박미나 작가의 작업은 시리즈 개념일 때가 많다.

이번 개인전에는 크게 '딩벳', '컬러-가구', '색칠공부 드로잉' 연작이 출품되었다. 세 연작은 종류별로 구분되지 않고 넓은 갤러리 이곳저곳에 섞여 전시됐는데, 서로 유사한 색상과 채도의 작품끼리 모아서 배치한 점이 관전 포인트다. 이러한 디스플레이는 각기 다른 연작을 뛰어넘어 박미나 작가의 예술세계를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했다. 그럼 이제 주요 출품작을 하나씩 살펴보자.
박미나 작가는 컴퓨터의 ‘딩벳(Dingbat) 폰트’에서 영감을 얻은 시리즈를 통해 언어를 뛰어넘는 생각과 감정을 압축적으로 전달한다
박미나 작가는 컴퓨터의 ‘딩벳(Dingbat) 폰트’에서 영감을 얻은 시리즈를 통해 언어를 뛰어넘는 생각과 감정을 압축적으로 전달한다
딩벳은 컴퓨터의 '딩벳(Dingbat) 폰트'에서 영감을 얻은 시리즈다. 한글이나 알파벳으로 구성된 일반적인 문자가 아니라 가벼운 이미지나 기호가 문자를 대체하는 폰트다. 디지털 세대에게는 언어를 뛰어넘어 복잡한 생각과 감정을 압축적으로 전달해 주는 주요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다. 박미나 작가는 한글 욕설을 영어로 바꾸고 이를 딩벳 폰트로 한 번 더 변환한 다음, 그 디지털 이미지를 확대·채색해 캔버스에 옮겼다. 육두문자를 쨍하고 귀여운 도상으로 변신시켜 문자와 이미지, 현실과 디지털의 괴리를 나타낸다.

다음으로 '컬러-가구'연작의 시초는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날 작가는 한 아트딜러에게 '아파트 벽에 걸 오렌지색 그림이 있냐'는 문의를 받고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다양한 채도, 명도, 질감의 오렌지색 물감을 모두 수집했다. 당시 유행하던 2인용 소파 크기의 캔버스에 각종 오렌지색을 2~3cm 두께로 칠해 스트라이프 페인팅을 완성했다. 2004년에는 오렌지 페인팅을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보라, 검정, 회색, 흰색으로 변주해 아홉 가지의 색과 가구로 확장했다.
2023-녹색-소파, 캔버스에 아크릴릭, 257×290cm, 2023
2023-녹색-소파, 캔버스에 아크릴릭, 257×290cm, 2023
최근 박미나 작가는 이 연작을 20년 만에 업데이트했다. 오늘날 유행하는 침대의 도상에는 온갖 종류의 파란색 202개, 소파에는 초록색 234개, 옷장에는 노란색 234개 등 아홉 가지 가구를 그리는데 총 1,134개의 물감을 사용했다. 20년 전에는 수백 개에 불과하던 색상이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 사회의 속도에 따라 급증한 것이다. 또한 과거보다 하이엔드 가구의 비중이 커지고 아파트의 층고가 높아진 현상도 작품의 도상, 크기에 반영되었다. '컬러-가구'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모르면 색깔의 스펙트럼이 펼쳐진 미니멀 회화로 보이지만, 그 안에는 한국 사회의 투명한 민낯이 담겨있다.
2023-파란색-침대, 캔버스에 아크릴릭, 257×229cm, 2023
2023-파란색-침대, 캔버스에 아크릴릭, 257×229cm, 2023
마지막으로 '색칠공부 드로잉'은 1998년부터 시작된 방대한 프로젝트다. 회화 장르의 근본인 '색칠'을 연구하기 위해 어린이 학습용 색칠 공부 책을 모티프로 삼았다. 학습지에 그려진 해, 달, 별, 동물 등의 도상이 출판사마다 다르게 표현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특정 도상을 제외한 배경을 단색으로 전부 덮어버린 연작이다. 윤곽선을 따라 채색하라는 학습지의 규칙을 지키지 않고 기존 도상 위에 드로잉을 겹쳐 그리거나 스티커를 붙여 자신만의 시스템을 가진 회화로 변형했다.

한편, 이번 전시장에는 박미나 작가의 또 다른 대표작 '스크림(Scream)'이 입구에 첫 번째로 설치되어 있다. 개인전에 방문한 관객을 맨처음 환영하는 작품이자, 전시를 떠나는 관객을 마지막까지 배웅해 주는 작품이다. 소리 지르는 캐릭터를 기하학적으로 묘사한 이 시리즈는 원래 출품 예정작이 아니었으나, 전시 오픈 직전 즉흥적으로 연작 중에서 딱 한 작품만 골라 비치했다고 한다. 하트 뿅뿅 사랑이 넘치는 풍경, 그 너머로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절규하고 있을 캐릭터의 얼굴. 이미지와 현실의 간극을 고찰하는 박미나 작가의 예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 아닐까?
Four Corners Scream, 리넨에 아크릴릭, 글리터, 60×60cm, 2021
Four Corners Scream, 리넨에 아크릴릭, 글리터, 60×60cm, 2021
이처럼 박미나 작가는 회화를 둘러싼 물질, 기술, 문화 조건을 기반으로 회화 작업을 펼친다. 재료 수집, 기호 변주, 그리기의 규율 정립 등으로 일종의 '회화 프로그램'을 만들어 작품을 제작한다. 화면 안팎으로 이어지는 증식, 진화, 매개의 방법론은 박미나 작가 회화의 독자성이라 할 수 있다. 전시는 오늘 4월 9일(화)까지 CLUB1 PB센터에서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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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소개_ 박미나
로드아일랜드 미술대학 회화과, 뉴욕시립대학원 헌터대학의 회화과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현재 성균관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간 국제갤러리, 원앤제이갤러리 등 국내 최고의 갤러리들을 통해 작품을 소개했고,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한 유수의 미술관에서 다수의 개인전과 그룹전에 참여했다.

글. 사진_이현 아트앤컬처 부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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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영 기자 hy541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