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을 뒤흔든 나른한 곡선과 화사한 색조. 알폰스 무하의 작품은 벨 에포크 시기의 아름다움 그 자체다.

[전유신의 벨 에포크]
알폰스 무하의 <자화상>(1899년)
알폰스 무하의 <자화상>(1899년)
19세기 중엽에 시작된 대대적인 도시 재건 사업으로 프랑스 파리는 낡은 중세식 도시에서 오늘날과 거의 흡사한 모습의 근대적인 대도시로 변모했다. ‘빛의 도시’로 불리며 사람들의 환상을 자극하는 꿈의 공간이 된 파리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 ‘벨 에포크(Belle Époque)’도 이때 시작됐다. 벨 에포크 시기의 파리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궁금하다면 근대화된 파리와 당시 사람들의 일상을 포착해 그린, 클로드 모네(Claude Monet)나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같은 인상주의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된다.
하지만 만약 아름다운 시절이 사람들에게 제시했던 꿈과 환상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고 싶다면, 이때 찾아봐야 할 작가는 단연 알폰스 무하(Alphonse Maria Mucha·1860~1939년)다.
무하는 체코 출신의 화가이자 디자이너로, 특히 공연 포스터를 포함한 광고 디자인으로 잘 알려진 작가다. 구매 욕구를 자극하는 상품의 디자인을 주로 했던 이력 때문인지 무하의 작품에는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이미지가 가득하다.
무하는 체코 프라하의 미술학교 시험에 낙방한 뒤,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미술 교육을 받고 장식 미술가로 일했다. 이후 1888년 파리에 입성한 뒤부터는 아카데미에서 최신의 미술 경향을 학습하면서, 광고 디자이너이자 삽화가로 활동했다.
무명의 외국인 작가였던 무하의 삶을 하루아침에 뒤바꾼 드라마틱한 사건이 일어난 것은 1894년 말, 프랑스 사교계의 아이콘이자 유명 여배우인 사라 베르나르(1844~1923년)가 주연을 맡은 연극 <지스몬다>의 포스터 디자인을 맡게 되면서부터다.
무하의 출세작 <지스몬다>(1895년)
무하의 출세작 <지스몬다>(1895년)
당시 베르나르는 공연 기간 연장을 알리는 포스터 제작을 원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연휴 기간과 겹쳐 포스터를 그려줄 디자이너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때 생계를 위해 연휴에도 일거리를 마다하지 않는 무하를 소개받아 급히 포스터 제작을 맡기게 된다.
포스터 속 베르나르는 금박 장식으로 뒤덮인 비잔틴 귀족의 의상을 입은 채, 연극의 소품인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서 있다. 난초 화관을 쓴 베르나르의 머리 위로는 후광처럼 보이는 아치를 그려 넣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주인공의 얼굴로 향하게 했다. 이뿐 아니라 포스터의 상단과 하단에 배치한 연극 제목과 극장의 이름은 비잔틴 모자이크 타일처럼 장식했다. 기존 파리 길거리에 붙어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포스터였다. 포스터가 풍기는 환상적인 분위기는 벨 에포크라고 불리던 당시 분위기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베르나르는 이 포스터의 ‘진가’를 단번에 알아봤다. 무하에게 당장 자신과 계약하자고 말했을 정도였다.
1895년 1월 1일부터 파리 길거리에 붙기 시작한 포스터는 한마디로 ‘대박’이 났다. 파리 시민들은 2m에 달하는 거대한 포스터를 너 나 할 것 없이 집으로 가져가기 시작했다. 이런 도난 사건이 너무 많이 벌어진 나머지, 극장 측에서는 포스터를 4000부나 다시 찍어야 했다. 그야말로 신드롬급 인기였다.
이후 무하는 6년간 베르나르의 전속 디자이너로 일했고, 각종 유명 브랜드의 광고 디자인을 도맡게 된다. 이유식과 비스킷, 초콜릿 같은 식료품에서 샴페인, 맥주, 브랜디 같은 주류 광고는 물론, 유명 잡지의 표지와 달력, 포스터 디자인에도 참여했다. 알폰스 무하라는 이름은 하나의 명품 디자인 브랜드가 됐고, 그의 이름은 전 유럽에 퍼져 나갔다.
그의 작업은 거대한 장식 패널 연작을 제작한 것에서 점차 카펫, 가구, 벽지와 같은 인테리어 영역까지 확장됐다. 여신처럼 보이는 여성을 중앙에 배치한 뒤 꽃과 식물의 곡선과 패턴을 이용해 장식하고 파스텔 톤으로 채색한 그의 작품은 ‘무하 스타일’ 또는 ‘아르 누보(Art Nouveau: 새로운 예술)의 상징’으로 불리며 미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F. 샹프누아> 인쇄소 포스터(1897년)
인쇄소 포스터(1897년)
1900년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는 무하를 다시 한번 국제적으로 알리는 무대였다. 만국박람회는 참여국들이 각국의 과학과 산업, 예술의 발전상을 과시하는 장이다. 그해에는 프랑스가 아르 누보를 미술과 건축 분야의 핵심 양식으로 제시하면서 아르 누보의 상징과도 같은 무하 스타일도 함께 주목받았다.
한편, 무하는 박람회 기간 동안 보스니아 파빌리온의 벽화 제작에도 참여했다. 다양한 종교가 조화를 이루는 발칸반도의 미래를 담은 거대한 벽화는 역사화가로서의 무하의 등장을 알리는 출발점이 됐다.
1910년, 무하는 미술의 수도 파리에서 이룬 엄청난 성공을 뒤로 하고 고향 체코로 돌아갔다. 20대 초부터 꿈꾸던 역사화가로서의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체코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고, 무하는 체코의 독립을 염원하는 역사화를 제작하는 것으로 고국의 독립에 기여하고자 했다.
특히 그는 1000년이 넘는 슬라브족 역사를 그리는 것에 전념했다. 슬라브족의 기원부터 지금까지의 주요 사건 20개를 각각 화폭에 담기로 했다. 이른바 슬라브 서사시 연작이다. 무하는 이것을 그리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 양 마지막 생을 갈아 넣었다.
하지만 무하의 최후는 씁쓸했다. 그의 염원대로 1918년 체코는 독립했지만, 1939년 나치 정부에 의해 다시 프라하가 점령당하는 비극적인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게슈타포(비밀경찰)는 유대인 공동체를 공개 지지한 무하를 퇴폐주의를 지향하는 반국가적 화가라는 허울로 체포했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쇠약했던 무하는 심문 이후 앓아누웠고, 넉 달 뒤 폐렴으로 안타까운 생을 마무리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치가 패망한 뒤에도 무하의 작품은 여전히 창고에 잠들어 있어야 했다. 이후 체코에 들어선 공산주의 정권이 ‘자본주의를 찬양하는 부르주아의 퇴폐적인 그림’이라며 그의 작품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슬라브 서사시 연작의 20번째 그림이자 마지막 그림인 <슬라브 찬가: 인류를 위한 슬라브인들>(1926년)
슬라브 서사시 연작의 20번째 그림이자 마지막 그림인 <슬라브 찬가: 인류를 위한 슬라브인들>(1926년)
무하를 다시 기억해낸 것은 파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무하는 국제적인 미술 중심지였던 파리가 배출한 스타 작가이기도 하다. 프랑스 입장에서 무하는 외국인 미술가들에게도 개방적이고 평등한 기회를 주었던 과거의 미술 중심지 파리의 이미지를 상기시켜주는 작가다. 많은 사람에게 파리의 아름다운 시절이 여전히 현재하는 것처럼 느끼게 해주는 작가가 바로 무하인 셈이다. 이것이 바로 무하의 작품이 시대를 초월해 영원히 사랑받는 이유일 것이다.
그의 작품은 화려한 꽃과 도안,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칼과 옷자락에 둘러싸인 미소녀 캐릭터의 일러스트 등 일본의 만화 화풍에 영향을 주었고, 현대의 만화가와 일러스트레이터들에게 오마주가 되기도 했다.


글 전유신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